대머리 박상무

- 비밀입니다. 2화

by 고미젤리

한 달여의 인수인계가 끝났다. 어짜피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이곳에 큰 미련을 두기 싫어 수경은 지윤과 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했다. 지윤도 앞으로 자신이 잘 보여야 할 사람은 수경이 아닌 걸 금방 알았는지, 깍듯한 예의를 벗어나는 과도한 친근함을 보이지 않았다. 지윤이 잘 보여야 할 사람 절대 권력자 사장님일테니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수경은 비서실의 진짜 실세는 이차장이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비서실 말단인 지윤이 가장 부대껴야 하는 사람은 꼼꼼하고 까탈스러운 이미영 차장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머리 뒤에도 눈이 달렸다는 박상무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수시로 연락해야 하는 수행비서 윤과장도 허투루 다룰 수 없기는 했다.


이 모든 걸 눈치 빠른 지윤은 홀로 깨우쳤다.


수경은 인수인계 기간 동안 비서실 사람들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는 아무것도 지윤에게 전하지 않았다. 지난 오 년간 수경이 경험으로 얻은 인간들 그 자체에 대한 평가는 나눌 필요가 없으며, 그런 팁까지 준다는 건 지나친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비서 윤리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수경은 박상무가 사실상 이혼 상태라는 것, 이차장이 40이 넘은 나이에 혼전 순결주의자라는 것은 언급조차 안 했다. 수행비서 윤과장이 자신을 ‘기사님’이라고 부르는 걸 제일 싫어한다는 것도 함구했다.


수경은 오늘 하루종일 책상을 정리했다. 지난 5년 동안 쌓인 직장의 세월을 누군가에게 넘기고, 버리고, 박스에 넣었다. 그렇게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보니 집에 가져가야 할 물건들이 사과 박스로 두 개였다. 남편에게 전화해 저 짐들을 좀 들어줘야겠다고 말했다. 같은 여의도땅에 근무하지만 야근이 잦아 통 얼굴을 볼 수 없는 남편은 “10시는 넘어야 끝날텐데, 괜찮겠냐?”라고 말끝을 흐렸다. 어짜피 오늘 수경도 이차장과 저녁을 먹기로 했으니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사실 얼마 전 공식적인 팀 회식은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 자리를 주도하는 박상무는 회사의 미래가 어쩌고 비전이 어쩌고 하다가 사장님의 건강을 걱정하더니, 급기야 자신의 풍성해진 머리숱 자랑으로 자리를 끝냈다.


그런 박상무가 택시를 타고 사라지자 이차장이 한마디 했다.


“저 인간 오늘 회의 자료에 떨어진 머리카락 갖고 자기 걸까 봐 얼마나 벌벌 떨었는지 몰라. 기획팀 김대리가 자기 거라고, 색깔이며 굵기며 딱 자기 거라고 억지를 쓰더라.”

수경은 그런 이차장의 말에 웃음도 안 나왔다. 사실 수경이 처음 입사했을 때 이차장이 한 특별 당부도 박상무, 아니 당시 박이사의 머리숱이었다. 이차장은 행여나 실수로라도 머리쪽은 절대 쳐다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사실 오 년 전 수경이 보았던 박상무의 머리는 가녀리고 풀기없는 머리카락 몇 가닥으로 억지스레 이마를 가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 후 머리카락을 이식하고, 특별 처방받은 약도 꾸준하게 먹는다더니 잔털도 조금씩 자라고 예전보다는 확실히 나아 보이긴했다. 하지만 이런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쩔 수 없는 ‘대머리 박상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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