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

- 비밀입니다 3

by 고미젤리

저녁 자리에 이 차장이 지윤과 함께 나왔다. 이 차장 말로는 지윤이 갑자기 자신도 끼워달라고 전에 없는 붙임성을 보였다고 했다. 셋은 회식에서는 절대 먹을 수 없는 파스타와 샐러드를 몇 개 시키고 와인잔을 기울였다. 물론 배가 남산만 한 수경은 물 잔으로 건배하며 알코올로 무장해제 되어 가는 그들의 이야기에 열심히 맞장구만 쳤다.

미혼인 이 차장은 40대 중반의 나이가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마음은 소녀였다. 그날도 이 차장은 수경에게는 따분하고 하품만 나올 연애사를 흥미진진 이야기하며 자신의 흥에 취해가고 있었다. 수경은 이미 여러 번 들은 이야기였다. 십여 년 전 야간대학원 때 남자 동기가 자신을 좀 특별하게 대했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오늘 이 차장은 술에 나른해진 듯, 턱을 한 손에 괴고 와인잔을 돌려가며 꿈꾸는 눈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그 남자 동기가 했다는 ‘애틋한’ 행동들이 수경이 듣기엔 별 게 아니었다. 여럿이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흑기사를 해줬다는 이야기, 택시를 잡아주며 기사에게 택시비까지 줬다는 정도였다. 수경은 그가 술을 너무 좋아해서 안 마시는 사람들 것까지 자청해 마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택시를 잡아주며 “기사님, 어르신 댁까지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할 수 있는 연애의 순간들이 그 정도밖에 없는 이 차장의 인생이 불쌍하기도 했다. 그래서 수경은 오늘도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인 양, 무슨 세기의 로맨스인 양, 이 차장의 이야기들을 참고 들어주었다.

하지만 지윤이 갑자기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차장님, 그게 무슨 추억이야.”

정신이 번쩍 든 수경은 눈이 빨개진 지윤이 고개도 못 들고 쿡쿡대는 모습을 쳐다봤다. 자신이 반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윤은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했고, 급기야 눈물까지 훔치며 꺽꺽 이상한 소리를 냈다. 당황한 이 차장과 황당한 수경은 어찌할 바를 몰라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수경은 나이에 비해 조신하다 생각했던 지윤이 드디어 가면을 벗었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모습이 지난 한 달간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의 진짜 얼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죄송해요. 제가 한 번 웃기 시작하면 자제가 잘 안 돼요.”

지윤은 한껏 풀어진 표정으로 변명했다.

“전 이상하게 술만 마시면 웃음이 많아져요.”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아직 기분이 상한 듯한 이 차장도 할 말을 잊었다. 하지만 지윤이 갑자기 그런 이 차장의 손을 덥석 잡자, 펄쩍 놀란 이 차장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몸을 내뺐다. 지윤은 그 손을 놓지 않고 몸을 앞으로 더 기울여 이 차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차장님, 내 얘기 좀 해드릴까요? 저 진짜 파란만장했거든요.”

수경은 얼른 시계를 봤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그 ‘파란만장’한 하소연이 싫었다. 하지만 아직 8시 반밖에 안 됐다는 게 문제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만 가자고 했을 텐데, 오늘은 영락없이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할 처지라 난감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수경과 이 차장은 지윤의 이야기를 꼬박 들었다. 지윤이 웃음과 눈물을 담아 자신의 이야기를 할수록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지윤이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은 그녀의 비밀을 지켜 주겠다며 손가락까지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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