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뚝이 인생

by 고미젤리

나는 잘 넘어진다. 넘어지는 이유를 한 가지로 꼽아 볼 수는 없지만 정말 다양한 이유로 넘어졌고, 심하게 다쳤던 것도 여러 번이다.

가장 먼저 기억나는 사건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이다. 엄마 하이힐을 신고 장난치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고, 한쪽으로 넘어지며 얼굴과 손가락까지 다쳤다. 마침 집에는 아무도 없어서 나는 그냥 한참 엎어져 울다 툭툭 털고 집에 들어갔다. 한참 뒤에 계단 밑에서 망가진 구두를 손에 들고 온 엄마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어 있는 내 등짝을 때리며 야단을 쳤다. 하지만 나는 다친 얼굴을 보이면 더 혼날까 봐 이불을 들칠 수 없었고, 손가락을 다쳤다는 말은 더욱더 할 수 없었다. 바로 며칠 후 피아노 대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는 병원으로 달려갔고, 다행히 단순 찰과상 정도라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지금도 대회 무대에 서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뱉어냈던 웅성거림이 기억난다. 하지만 그날의 사진 속 나는 트로피를 손에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비록 얼굴에 커다란 딱지는 물론 여기저기 긁힌 자국도 그대로지만 말이다. 어쩌면 얼굴이 저렇게 되서까지 대회에 나온 용감한 어린이에게 주는 위로의 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기억은 중학교 때이다. 그날은 뙤약볕 밑에서 운동회 연습이 있었고, 다 같이 무슨 한국 무용을 연습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몰래 도망가기로 했다. 당시 수위 아저씨들의 경비는 상당히 삼엄했고 우리는 학교 뒷문 쪽 담을 넘기로 했다. 운동 신경이 전혀 없는 나는 튀어나온 돌을 딛고 겨우겨우 꼭대기에 걸쳐 앉긴 했다. 하지만 길 쪽으로 뛰어내려야 할 바닥은 학교 운동장보다 한참 밑이고, 내려다보면 볼수록 내 심장은 쪼글쪼글 도저히 내려갈 엄두가 안 난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사이 선생님이 지휘봉을 휘두르며 나를 향해 뛰어오는 게 보인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큰 용기를 내어 뛰어내렸지만, 정작 도망가려고 발을 내딛는 순간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야속한 친구들은 이미 눈앞에서 멀어지고, 나는 선생님에게 붙잡혀 다시 운동장으로 끌려갔다. 넘어지면서 삐끗한 발목이 아프다고 하소연해도 선생님은 들은 척도 안 하신다. 결국 나는 전교생 앞에서 굴욕스러운 모습으로 벌을 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든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학교 앞 분식집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친구들이 보였다. 나는 참았던 설움이 폭발하며 울었고, 멀리 도망가지 않은 친구들의 우정에 감동해 또 울었다.


이렇게 어릴 때 넘어지고 다치고 했던 기억들은 어떻게 보면 즐거운 추억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몇 년 전 다 큰 어른이 된 내가 또 길가에서 호되게 넘어졌다. 우리 가족은 시내 이색 식당에서 밥을 먹고 주변 상점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한겨울 추위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걷고 있었고, 깜빡이는 신호의 건널목을 보자 서둘러 건너가려 뛰어갔다. 하지만 길가에 또 뭐가 있었는지 나는 원인도 모른 채 그대로 앞으로 굴러 버리고 말았다. 뒤따르고 있던 남편과 아이가 놀랄 틈도 없이 나는 얼굴로 낙하해 버렸고, 신호를 기다리던 차들은 황당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일단 창피한 마음에 일어서 보려했지만 진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떻게 보도로 올라왔는지 기억도 안 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택시 안이었다.

바로 병원에 가 소독을 하고 약을 받았는데, 어릴 때 다쳤던 얼굴 쪽에 또다시 찰과상이 크게 생겼다. 사실 찰과상도 문제지만 그 밑으로 엷게 피어난 멍은 무슨 격투기라도 한판 하고 온 사람 같다. 그 후로 치료차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상처를 보일 수 밖에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도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묻지 않는다. 상처 난 얼굴로 용기 있게 필라테스까지 갔건만 모든 회원이 흘끔흘끔 쳐다만 볼 뿐 이유를 묻지 않으니 내가 먼저 구차하게 설명하기도 뭐하고, 무슨 가정 폭력의 피해자로 보는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결국 이 모든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빨리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는 레이저 시술을 받았고, 단순히 상처가 아무는 것 뿐만 아니라 오히려 좋아지게 되었다.




인생이 새옹지마라더니 넘어지고 굴러도 오뚝이처럼 회복되는 운이 내게 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나이에 또 넘어지는 건 조심해야겠다. 어디 골절이 되는 건 둘째 치고, 괜한 남편까지 오해받게 만드니 말이다. 오뚝이 인생이라 자만하지 말고 칠칠맞게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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