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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젤리 Dec 06. 2023

공항에서 길을 잃다

- 90년대 승무원 이야기 9

 공항에서 길을 잃었다. 그것도 비행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 승무원인 내가, 한 두 번 간 것도 아닌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서 길을 잃었다.

 사건의 발단은 별 것 아니었다. 나는 렌즈를 잃어버렸지만, ‘하루쯤이야’ 싶어 호기롭게 비행에 나섰다. 평소처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승무원들을 따라 공항 면세점으로 향했고, 이런저런 화장품과 향수를 테스트해 보며 짧은 여흥도 즐겼다. 그렇게 자잘한 화장품 몇 개를 사고 고개를 들어보니 동료 승무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별 위기감은 없었다. 나는 예정된 게이트를 찾아갔지만 내가 타고 가야 할 비행기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게이트 변경이 있었던 것 같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공항 모니터를 살펴보았다. 해당 편수와 게이트가 깜빡대는데 맨눈으로는 도저히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체면 불고하고 옆에 있던 사람에게 00 항공 서울행이 어디냐고 물었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어쨌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렇게 터덜터덜 바뀐 게이트로 갔더니 비행기 앞 카운터에는 낯선 유니폼의 직원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뿔싸. 친절해 보였던 그 사람을 믿으면 안 되는 거였다. 나는 저절로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쭈뼛대며 타 항공사 직원에게 우리 비행기의 게이트를 다시 물었다.


 이번엔 정확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예상 못한 큰일이 하나 더 있었다. 공항 내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먼 게이트였던 것이다. 심청이를 찾아가는 심봉사의 마음이 이랬을까? 나는 이제 너무나 급해진 마음에 창피고 뭐고 가릴 수가 없었다. 마침 한국인 승객을 한 명 만났고, 그를 따라 게이트까지 함께 뛰었다. 이미 탑승 시작을 알리는 방송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승무원들은 비행기에 오르면 보안 점검뿐 아니라 각종 서비스를 미리 세팅해야 하기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우아한 모습은 공항 게이트 앞에서 끝나는 것이다. 기내에 들어가는 순간 가방을 던져 넣고 낮은 굽의 신발로 갈아 신은 후 면장갑을 손에 낀다. 한 무더기로 들어온 신문 뭉치는 풀어 좌르륵 펴 놓고, 잡지 홀더에 각종 잡지를 꽂아둔다. 2리터짜리 생수 6개 번들을 가볍게 들어 올려 냉장고에 쌓는 건 물론 바닥에 드라이아이스를 던져 깬 후 음료수 칸칸이 채워 넣어 칠링 시킨다. 제일 먼저 서비스가 나가는 화이트 와인과 샴페인, 오렌지 주스 등은 짧은 시간 되도록 차갑게 만들기 위해  얼음을 채워 넣은 물에 담가 둔다. 뜨거운 타월을 오븐에 데우고, 각종 너트를 손님 수에 맞게 접시에 담아둔다. 화장실 내 비품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는 건 물론, 코트룸에 네임택과 볼펜도 준비해 둔다. 이 밖에 무궁무진한 할 일들을 마친 후 선배들을 돕는 것이 비즈니스 클래스 막내의 의무였다.


 이미 탑승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비행기에 다른 손님들을 뚫고 올랐다. 매니저의 그 싸늘한 눈빛과 후배들의 당황한 표정을 맞닥뜨리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오늘 집으로 가는 7시간 비행은 그야말로 지옥이 될 게 뻔했다. 비즈니스 석으로 가기 위해 후다닥 계단을 오르는데 계단 끝에 선 선배가 나를 째려보고 있다. 그 강렬한 눈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해 보지만, 듣는 것 같지 않았다.




잠시 이 상황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되돌아보자. 그 소용돌이치는 폭풍 한가운데 할 일을 해야 할 후배가 안 보인다. 매니저에게 보고한 후 비즈니스 담당 2명이 3명의 일을 해치우느라 눈썹이 휘날린다. 공항 직원에게 내 상황을 알리며 방송을 부탁한 매니저는 다른 걱정에 시달린다. 혹시 이 승무원이 사고를 당했나? 납치를 당했나?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혹시 불법 체류라도 하려는 건가? 시간이 되었으니 탑승 사인을 내긴 해야겠는데, 이 친구를 못 태워가는 불상사가 생기면 어쩌나? 승무원 관리 소홀로 징계가 내려질 수도 있는 건 물론, 남아 있는 승무원들로 기내 서비스가 가능할지도 가늠이 안 됐을 것이다. 그 순간 내가 가방을 덜거덕대며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으니, 안심과 황당과 분노의 융합 감정 속에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날 마주치는 승무원들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거냐고 물었다. 공항에서 길을 잃었다고 하니 다들 입을 못 다물었다. 매니저는 서울에 도착하면 경위서를 제출하라고도 했다. 그동안 수많은 경위서를 쓰며 때로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신파였고 때로는 분노와 반전의 스토리였다면, 오늘 나의 경위서는 대역죄인의 사죄여야만 했다. 그렇게 석고대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교육원에서의 보수 교육 처분이 내려졌지만 말이다.



 ‘오늘 전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 누워서 식은 죽 먹다 체한 바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굳이 변명하자면 렌즈를 잃어버려 까막눈이었다는 것이고, 그래도 잘했다는 건 저처럼 늦은 손님 한 분을 무사히 모시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내용보다 분량이 더 중요했던 내 경위서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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