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년대 승무원 이야기 11
해외에 남자 친구가 있는 승무원들이 몇 있었다. 다양한 개인적 연애사야 그들만의 일이지만, 그것과 관련된 잊을 수 없는 작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그날은 유난히 피곤한 날이었다. 하필 엄마가 차로 데려다주겠다더니 가는 길에 사고가 났고, 겨우 수습하고 회사에 들어오니 지각을 겨우 면한 시간이었다. 안도의 마음은 잠시뿐, 망가진 차를 가지고 돌아갈 엄마가 걱정이었다. 이리저리 전화를 하고 비행 브리핑은 또 해야겠고, 정신없이 우왕좌왕하다 보니 벌써 지쳐버렸다. 시작부터 무거운 마음으로 12시간의 비행을 한 후 겨우 현지 호텔에 도착했다. 시차가 안 맞는 승무원들은 근처 한인 마켓에 가서 밤에 먹을 걸 잔뜩 사두고 겨울잠을 자지만 나는 너무 피곤해 그냥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스르르 깨어 보니 이른 아침이었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 잘 자서 개운했고 배도 너무 고팠다.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어디 카페라도 문을 열었겠거니 싶어 일단 문을 나서기로 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로비로 들어서는 순간, 어떤 한국인 남자가 나에게 ‘승무원이냐’고 물었다. 얼결에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나에게 '00 승무원을 아느냐?'고 물었다. 살짝 의심이 들어 무슨 일이시냐고 되물었더니, 남자친구인데 여기서 만나기로 했다고, 미안하지만 그 승무원 방에 올라가 노크를 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자신은 외부인이라 객실 쪽으로 들어가는 게 안 된다고 했다.
너무 귀찮은 마음이라 그냥 가려고 했지만, 이 남자 거의 울 듯 말 듯 분위기가 이상했다. 결국 짜증 나는 마음으로 나는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 노선은 비행이 여러 대라 그 호텔에는 보통 3팀 이상의 승무원이 묵고 있었고, 그 선배는 우리 팀이 아니었다. 나는 다짜고짜 문부터 두드리는 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해 그냥 내 방으로 가 그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닝콜인 척하고 전화를 받으면 바로 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몇 번 더 시도해 보다 포기하고 그냥 내려갔다.
아까 그 남자는 엘리베이터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는다. 아마 방에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전화는 자기도 계속했다며, 가서 문을 두드려 달라고 했다. ‘너무 지나친 거 아닌가요?’ 했지만 듣지 않았다. 이제 이 사람이 조금 무서워졌다. 나는 필요하면 호텔 직원에게 직접 부탁해 보라고 말하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 사람, 갑자기 축구의 골키퍼 자세를 취하더니 나를 못 나가게 했다. 갑자기 우리 둘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옥신각신, 톰과 제리가 되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지금 이 시간에 무슨 짓인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주변에 사람은 아무도 없고, 어떻게든 생쥐처럼 빠져나가 보려 했다. 하지만 그는 내 옷을 잡고 늘어지기까지 했고, 나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그러자 어이없게도 이 남자,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이 무슨 낭패인지. 누가 보면 내가 이상하게 오해받기 딱이었다. 나는 갑자기 주저앉아 우는 사람을 내버려두고 얼른 도망 나왔다. 호텔 직원에게 말할까 했지만, 일단 나부터 좀 피하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렇게 호텔 근처 카페로 가 자리를 잡았더니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죄지은 사람도 아닌데 구석에 숨어 대충 뭐라도 먹고 나니 기운도 좀 났다. 아마도 그 남자는 선배의 이별 통보를 받아들이지 못해 농성을 벌이는 것이었으리라 생각됐다. 그래도 그렇지 싫다는 여자를 스토킹 하다 나같은 제삼자까지 괴롭히다니 화가 났다. 한참을 앉아 있다 조심스레 호텔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 사람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안도의 마음으로 내 방에 올라와 다른 승무원들에게 이 이상한 이야기를 전했다. 울고불고 하는 걸 보니 앞으로 어떤 짓을 할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2박 3일 동안 그 사람을 봤다는 다른 목격자는 없었다. 그가 불러 달라고 했던 선배도 이미 서울로 돌아가고 없어 어떻게 된 건지 묻지 못했다.
30년이나 지나 그때의 일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아마도 그는 나랑 옥신각신하다 자신도 현실 자각을 하고 그만 포기한 건 아닌가 싶다. 그래도 그렇지, 도대체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