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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젤리 Feb 20. 2024

싸우지 마세요

- 90년대 승무원 이야기 10

 다양한 인간상이 있지만, 비행기라는 좁은 공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정말 상상 이상이다.

 

 범죄자와 그를 호송하는 경찰도 있었고 연예인과 정치인 등 유명인이 타는 경우도 많았다 수학여행 시절마다 학생 단체들이 정신을 쏙 빼놓았고, 단체 여행으로 기분 좋아진 일행들이 기내에서 고스톱판을 벌이는 것도 보았다. 금방 쓰러질 것 같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탑승해 가슴 졸인 적도 있고, 해외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환자를 태우기도 했다.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 이미 만취한 신랑을 태워야 하나 실랑이를 벌인적도 있고, 성도착자가 옆 자리 여성을 희롱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말로 다 풀어낼 수 없는 수많은 일들 중, 오늘은 그나마 좀 점잖은 이야기이다. 




 뉴욕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긴 비행이었다. 승무원들은 중간 앵커리지에서 전원 교체되지만 손님들은 공항에서 한 시간 정도 대기하다 다시 탑승해야 했다. 그동안 비행기 주유도 하고, 케이터링도 다시 받는 것이다. 그날도 나는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뉴욕-앵커리지 노선을 맡았던 전 승무원의 인수인계 사항을 확인했다. 5시간 정도의 짧은 밤 비행이라 별 내용은 없었고 모든 것은 순조로워 보였다.


 하지만 손님들이 다시 탑승하고 나서 얼마 후 뒤쪽에서 다툼 소리가 들렸다. 한 부부가 원래 자리가 아닌 다른 부부의 자리에 앉으며 싸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예 좌석이 만석이면 이런 일은 없겠지만, 애매하게 몇 자리가 남으면 눈치 빠른 손님들이 그걸 놓치지 않는다. 이미 뉴욕에서 앵커리지까지 5시간여를 편하게 온 원래 자리 부부는 이들을 자리 도둑처럼 취급했고, 침략자가 된 부부는 같은 돈을 내고 탔는데 왜 그들만 편하게 가야 하는 것이냐며 양보하라고 했다. 

 

급하게 탑승하고 있는 손님들 사이를 헤치며 가보니, 남편들은 이미 멱살을 잡고 의자 위에 올라서 있고, 아내들은 그 뒤에서 말싸움을 지르고 있었다. 일단 의자 위 남편들을 진정시켜야겠는데 이들은 이미 이성을 잃었고 승무원들의 제지는 듣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승무원들과 남편들을 하나씩 잡고 떼어 냈다. 기내에 한 명 있는 남자 매니저는 그 상황에 끼고 싶지 않은 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20대 여승무원 몇 명이 그들의 허리를 잡고 늘어졌다. 


 씩씩거리는 부부를 각기 다른 쪽으로 격리시켰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고 들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는 나대로 이쪽 부부에게 ‘그러셨군요. 아이고’ 적당히 추임새를 붙였고, 저쪽에서 다른 승무원이 열심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이제 비행기는 곧 출발해야 하고, 이들을 마냥 세워둘 수는 없었다. 우리는 자리를 바꾸려는 부부에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설득했다. 지금 더 문제가 심각해지면 비행기 문을 다시 열고 내려야 한다고 조용히 협박도 했다. 비행기 안에는 승무원들이 쉴 수 있는 자리를 세 줄 정도 남겨 두는 데, 승무원 휴식 시간이 지나면 그쪽으로 옮겨드리겠다고 약속도 했다. 

 

 출발 전부터 진을 다 뺐더니 앞으로 갈 길이 막막했다. 내가 맡은 쪽의 부부는 틈 날 때마다 나에게 하소연을 하더니 이런저런 주문도 많았다. 결국 술을 여러 잔 들이켜고 겨우 잠들었고, 그렇게 어렵게 비행을 끝내나 싶었다. 


 하지만 그날 우리의 비행기는 서울이 아닌 제주로 향했다. 겨울에서 봄으로 접어들면 따뜻한 날씨와 함께 안개도 짙어지는 회항의 계절도 돌아온다. 특히나 김포 공항은 안개로 아주 악명 높았다. 그날도 어김없이 안개 마왕은 우리를 찾았고, 우리는 모든 승객들과 함께 비행기 안에서 꼼짝없이 기다리게 된 것이다. 원칙적으로 비행기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문도 열지 못했다. 기내에 남아있는 과자나 사탕, 음료수를 몇 번씩이나 돌렸지만 다시 돌아간다는 소식은 없었다. 


 이제 손님들 몇몇이 큰 소리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런 천재지변은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해도 듣지 않았다. 그들의 불평불만에 상처받지 않으려면 그야말로 유체이탈을 해야 한다. ‘언제 가냐’고 물으면, 속으로 ‘언제 갈 수 있을까요?’ 되물었다. ‘김포 공항의 안개에게 물어야지요.  언제쯤 사라질 예정이신지요.’ 


 그날 어떻게든 서울로 돌아왔다. 화내고 소리치던 손님들도 다 웃으면서 내렸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술기운에 잘 주무신 그 부부들도 기분 좋게 내렸다. 약간 머쓱해하는 웃음과 함께 말이다. 특히 그 아내 분은 내 손을 잡고 ‘힘드셨죠?’라는 위로의 말도 건넸다. 그리고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에 기분 좋아진 나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비행기에서 싸우지 마세요. 도망갈 데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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