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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귀신

- 90년대 승무원 이야기 15

by 고미젤리

아직까지 그런지 모르지만, 당시 승무원들 사이에선 하와이 호텔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다. 호텔 복도에서 누군가가 지나갔는데 무심코 뒤돌아보니 다리 없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는 이야기, 자다 눈을 떠보니 누군가 내려다보고 있어 다시 자는 척했더니 스르르 사라졌다는 말도 들렸다. 이런 괴담 때문인지 많은 승무원들이 1인 1실 원칙에도 불구하고 하와이에서만큼은 둘씩 방을 같이 썼다.


그리고 그날 하와이 비행은 우연히 동기 3명이 함께하게 되었다. 이런 흔치 않은 기회에 우리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 미국 본토에 비해 비행시간이 짧아서 피곤한 줄도 몰랐다. 우리는 이미 서울을 뜨기 전부터 하와이 3박 4일을 생각하며 들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던지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와이키키 해변을 거닐며 여기저기 사람 구경도 하고, 면세점과 상점을 들러가며 쇼핑도 실컷 했다. 저녁에는 유명한 매직쇼를 보며 샴페인도 한 잔씩 했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 조금 아쉬운 마음에 방에서 한 잔씩 더 마시기로 했다. 나는 번거로운 짐들을 들고 먼저 들어가 있기로 했고, 곧이어 두 손 가득 간식과 맥주를 껴안고 동기들이 도착했다.


“우리가 뭘 샀는지 알아?” 깔깔대며 들어서는 동기들 뒤로 문을 닫으려는 찰나, 커다란 발 하나가 문틈으로 쓱 들어왔다. 반쯤 돌아서 있던 나는 어리둥절 문을 닫으려 했는데, 갑자기 몸집 큰 남자가 문을 확 밀었다. 그리고 그 충격에 나는 바닥으로 넘어졌고,이 무뢰한은 발로 내 등을 내리눌렀다. 나는 순간적인 충격에 놀라 납작 엎드려 꼼짝 못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너무 놀란 동기들과 나는 뒤늦게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나를 제압하느라 이놈이 한눈파는 사이 동기 한 명이 방 밖으로 탈출해 다른 방문을 두드리며 구조를 요청했다. 또 다른 한 명은 방 안에 있던 전화로 호텔 프런트에 신고하며 손에 잡히는 건 아무거나 도둑을 향해 내던졌다. 그렇게 요란법석에 놀랐는지 다행히 도둑은 곧 도망가 버렸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른 방문을 두드리다 프런트까지 맨발로 뛰어간 동기가 호텔 직원들을 몰고 올라왔다. 그들은 경찰에 신고를 원하냐고 물었지만, 잃어버린 물건도 없고 크게 다친 사람도 없고 해서 우리는 괜찮다고, 신고하지 않겠다고 전했다.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되고 방문을 닫고 나니 그제야 눈물샘이 터졌다.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인지. 생각할수록 어이없었다. 게다가 뒤늦게 살펴보니 나는 바닥에 넘어지며 무릎과 팔꿈치가 다 까져 있었고, 프런트까지 한 달음에 달려갔던 동기도 발목을 접질린 것 같다고 했다. 그나마 몸은 다치지 않은 동기도 너무 소릴 질러 목이 다 쉬어 버렸다. 일이 이렇게 끝났으니 다행이라고 했어야 되는 건지. 어쨌든 우리는 사가지고 온 맥주는 손도 못 대고 긴긴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서울로 돌아오는 날, 반팔 유니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이는 내 상처를 보고 모두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넘어져서 다쳤다고 얼버무렸다. 괜히 보고한다고 경위서 쓰고 상담하고 하면서 불려 다니는 게 더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어떤 후배가 또 귀신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는 착한 귀신이라고, 옆 침대에서 자고 있는 동기에게 귀신이 이불을 덮어주더라고 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였지만, 꿀꺽 삼키며 후배들에게 한마디 했다.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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