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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탈출 교육

- 90년대 승무원 이야기 14

by 고미젤리

얼마나 반복했는지 아직까지 기억나고 툭 치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승무원 업무 중 하나는 무엇일까? 나에게는 ‘비행기 탈출 교육’이다.


사실 승무원들은 정기적으로 이런 훈련을 거친다. 대게 교육이라고 하면 책상머리에 앉아서 하는 주입식을 생각하겠지만, 승무원 교육은 대부분 롤플레이(role play)로 이루어진다. 정기적 안전 교육이 있는 날이면 하루 5-6번은 슬라이드를 타고 비행기를 탈출해야 하는 것이다. 다들 얼마나 진지한지 웃거나 떠드는 사람도 없다. 정해진 시간 안에 모두 탈출시키지 못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역할극이 끝나면 어느 부분이 부족했는지에 대한 자아비판 및 지적 시간도 이어진다.


나처럼 선천적으로 목소리가 작은 사람은 이런 실습 한 번으로도 바로 목이 쉬어 버렸다. 안전 교육을 통과하려면 목소리 크기 ‘데시벨 테스트’도 있었던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얼굴이 터져버릴 정도로 소리쳐도 야속한 숫자는 오르지 않고, 이러다 득음이라도 하겠다 싶을 정도가 되어야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다.


나에게 안전교육이 목소리와의 싸움이라면, 몇몇 승무원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슬라이드를 타는 것이었다. 사실 처음 비행기 문 앞에 펼쳐진 슬라이드를 보았을 땐, 생각보다 아득한 저 아래를 보고 나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비행기 탈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한시라도 빨리 더 많은 승객을 탈출시켜야 하니 슬라이드 앞에서의 망설임은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는 승객 역할도 충실히 했다. 무서워 못 내리겠다고 소리치는 사람, 어딘가를 다쳐 혼자 힘으로는 탈출하기 어려운 사람, 정신적 충격을 호소하며 소동을 부리는 사람 등, 모두 여우주연상에 버금갈 만큼 연기력이 뛰어난 승무원들의 활약이 펼쳐졌다.

그렇게 실습에 실습을 계속해서일까?


승무원을 그만 둔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이 비행기에는 몇 대의 소화기가 있지, 위치는 저기 어디겠지, 구조 신호를 보내는 비콘(beacon)은 저기였지, 숨어있는 안전 장비들을 떠올리곤 한다.



이런 몸에 익은 탈출을 시도도 못해 본 이번 비행기 사고가 그래서 더 안타깝고 슬프다. ‘만약’이란 가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안전’은 끊임없는 반복학습, 실전같은 실습에서 얻어진다는 교훈을 다시 되새기는 하루다.


사진출처: 비행기 비상탈출은 이렇게 (국제신문, 20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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