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마텔의 <라이프 오브 파이>(2012년에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됨)에서 주인공 ‘파이’는 얼룩말, 오랑우탄, 호랑이와 함께 구명보트에서 227일 동안 태평양을 표류한다. 그 과정이 마냥 낭만적이지는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바다, 배, 동물이라는 소재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스럽고, 사랑하는 소설이다.
요트학교에서 요트를 배우면서도 이를 스포츠로만 여겼지, 바다 항해를 꿈꾸지는 못했다. 그건 소설 <라이프 오브 파이>나,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나 가능한 것이고, 그나마 우리나라에서 요트로 국내, 세계일주를 하는 것은 특별한 분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다. 이를테면 허영만 화백(<허영만과 함께 타는 요트 캠핑>에 기록으로 남기셨다.)이나, 세계일주로 유명한 김승진 선장(<인생은 혼자 떠나는 모험이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같은 분들 말이다. 요트를 시작한 지 이제 꼭 1년이 되는 지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첫 요트 항해이자 첫 섬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바다 항해가, 그것도 요트 항해가 대중적이지는 않으니, 인터넷에서 정보 찾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요트 조종면허를 따면서 배웠던 내용들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출항 신고서를 작성하고, 내비오닉스(navionics) 라는 해도 앱을 설치해서 인천 왕산마리나부터 굴업도까지 가는 항로를 체크했다. 크루는 스키퍼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배운 것을 떠올리며 뭐든지 할 수 있을 마음과 머리의 준비를 했다. 지시를 못 알아들으면 안 되니까 용어들을 숙지하고, 유튜브를 보며 시뮬레이션했다.
인스타그램으로 찾아본 우리의 목적지 굴업도는 한국의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백패킹의 성지이고, 7가구 밖에 살지 않는 청정한 섬이라고 했다. 야영을 하는 개머리고개에서는 밤에는 은하수를 볼 수 있고, 낮에는 바로 옆에서 노루 가족이 뛰어논다고 했다. 백패커들은 인천항에서 출발하여 덕적도에서 배를 갈아타고 굴업도로 들어가는데, 왕복 8시간 정도 걸리다 보니, 백패킹은 1박 2일이 기본 일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포인트가 완전히 다르다. 인천에서 굴업도까지의 세일링이 목적이고, 굴업도는 회기점이라 우리는 하루 코스를 잡았다.
새벽 6시부터 시작한 엔진, 배터리, 고무보트 등의 각종 점검이 오전 7시가 훌쩍 지나서야 끝났고, 엔진을 켜고 마리나를 빠져나왔다. 인천 근해에는 어망이 많아서 부이(bouy, 해협을 표시하기 위해 물에 띄우는 부표)를 보며 조심조심 지나가야 했다. 요트의 킬(배 밑바닥에 길게 뻗어있는 무거운 추 같은 것으로 용골이라고도 부른다.)이 물속 깊이 펼쳐져있는 어망에 걸리면 빠져나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한참을 게임하듯 부이를 피하면서 운전해 어망을 거의 빠져나와서야 세일을 펼칠 수 있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세일을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것을 호이스트(hoist) 한다고 말하는데, 이 요트는 마스트 안쪽에 말려있는 세일을 풀어내는 방식 (in-mast furling sail)이었다. 펄링 세일을 처음 보는 우리는 마스트에서 풀려나와 점점 커지는 메인 세일을 입을 벌리고 쳐다봤다. 메인에 이어 제노아까지 펼치니 근사한 세일 요트가 완성되었다.
스키퍼의 지시에 따라 태킹(tacking, 방향을 바꾸는 것)을 하고, 우리가 평소에 타던 24피트의 것과는 크기도, 위엄도 다른 43피트용 시트(세일을 조절하기 위해 잡아당기는 세일에 묶어놓은 줄)와 윈치(winch, 힘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도르래 같은 역할을 한다)를 사용하며 세일을 조절하는 우리는 신이 났다. 세일이 바람을 받기 시작하니, 5노트 정도로 가던 요트의 최고 속도가 8노트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이게 바다 세일링이란거구나!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한껏 들떠있다는 것을 눈치 채신 선장님은 평소에 잘 쓰지 않는다는 코드 제로까지 펼쳐보자고 하셨다. 코드 제로는 바람이 약할 때 한껏 바람을 안아주는 스피네이커와 같은 역할을 하는 세일이다. 코드제로까지 갖춘 크루징요트는 그리 많지 않고, 실제로 선장님도 세일링을 하면서 많이 펴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코드제로는 동그랗게, 볼륨이 잘 산 앞머리 같이 뽕 띄워서 연같이 하늘로 높이 높이 날리는 것이 관건이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포지션을 바꿔가며 굴업도에 도착했다. 바람이 약했고 계획보다 늦게 출발한 터라 굴업도에 정박하는 대신, 굴업도 앞바다에 앵커를 내려 배를 멈춰세우고 섬을 감상하며 점심을 먹기로 했다. 선미에 달린 바비큐 그릴에 숯을 피워 대파, 버섯, 옥수수와 돼지고기를 굽고, 선실에서 라면을 끓였으며, 포트락 파티처럼 싸온 과일, 샌드위치, 샐러드, 그리고 와인을 꺼냈다. 10명 모두 요트조종면허 소지자라 식사 후에는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이 스키퍼가 된 것은 물론이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요트 뒤에 졸졸 달고 간 소형 고무보트를 노 저어서 굴업도에 들어갔다. 개머리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의 색깔은 요트 위에서 보는 색깔과 달랐다. 초록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새파란 바다와 하얀 세일의 요트는 또 다른 장관이었다.
배를 기분좋게 채우고, 아름다운 경치를 눈에 가득 담고 우리는 다시 세일을 펼치고 인천으로 돌아가는 항해를 시작했다. 조류와 반대 방향으로 세일링을 하느라 시간이 좀 더 걸린 덕분에, 붉은 노을에 펼쳐진 새하얀 돛을 감상할 수 있는 멋진 기회까지 덤으로 얻었다.
요트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부자들이나 즐기는 여가라는 편견이 있고, 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요트 위에서 비키니 미녀와 샴페인을 마시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사회적 성공의 잣대로는 결승선에 반도 못 미친 2~30대 여자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다에서 도전하고 즐기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안다. 바람, 햇빛, 파도와 잘 노는 방법도 말이다. 오늘의 첫 바다 항해는 그 새로운 장을 열었다.
글: Edi
그림: Sama (https://instagram.com/y.sam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