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LS Trophy
작년 9월 맨해튼 요트 클럽 주최로 개최된 요트대회, Lady Liberty Regatta에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한 팀이 있었다. 개회식이나 파티에는 핫핑크 블레이저 재킷을 입고 다니고, 대회복으로는 베이비핑크 모자와 피케셔츠를 입는 금발머리 언니들. 모두 다 화이트, 블랙, 블루만 입는 요트계에서 핑크는 확실히 눈에 띄고 예뻤다. 심지어 팀 이름도 핑크 웨이브, 모나코 요트 클럽 내의 여성 세일링 팀이다.
6개월 후, 우리는 핑크 웨이브 팀을 통해 모나코 요트 클럽의 초청을 받아 이곳, 모나코에 도착했다.
WLS Trophy
Women Leading and Sailing Trophy
남성 위주로 발전해 온 요트계에 여성들이 여성을 위한 요트대회를 열었다. 7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모나코 요트 클럽 내에 여성 세일링팀인 핑크 웨이브팀이 결성된 것이 고작 5년 전이라고 한다. 그들이 주축이 되어 전 세계의 여성 세일러들을 모아 축제를 열겠다며 첫 대회를 개최한 것이 작년 2023년의 일이다. 두 번째 대회인 올해 2024 WLS Trophy에는 전 세계 13개국에서 20개 팀을 초청했다. 나이, 국적, 세일링 경력의 제한은 없으나 조건은 단 하나, 세일러 전원이 여성일 것.
총 20팀이 출전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당일에 와보니 19팀이 리스트에 있었다. 대회 중에 프랑스 팀 선수에게 전해 듣기로는, 오기로 했던 독일 팀 스키퍼가 갑자기 암선고를 받아서 못 오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통영이건 부산이건 전국 요트대회를 가면 항상 인사를 나누는 얼굴이 있는 것처럼, 이들도 유럽 전역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항상 마주치기에 서로 안부를 주고받고 있었다.
요트 대회는 날씨가 생명이다. 바람이 세도 대회를 진행할 수 없고 그렇다고 약해도 안 된다. 대회 기간 동안 비가 오지 않고 파도나 해일이 적절한 것도 중요하다. 대회 첫날은 등록과 연습 세일링이 진행되었다. 우리 팀은 J70이라는 요트 자체는 익숙하기 때문에 얼른 준비를 하고 수역에 해상상황을 체크하러 나가기로 했다. 지중해 바다에서 요트를 타는 것은 처음이니까.
‘와아~~ 지중해다~~~’ 라며 해상에 나갔으나, 바람은 약한 반면 너울만 심해 멀미가 나기 시작한다. 요트를 좋아한다고 해서 뱃멀미를 안 하는 것은 아니다. 파도나 너울이 심한 곳에서 세일링을 할 때는 종종 뱃멀미 약을 먹어야 하기도 한다. 나는 다행히 멀미가 구토로 오지는 않고 졸음으로 쏟아지는 편이라 선상에서 뜨거운 태양을 맞으며 잠깐 졸았다.
둘째 날이 되니 바람도 적당히 불고, 지중해 바다에 적응도 되었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대회모드로 전환되어 멀미 따위는 잊고 대회를 할 수 있었다. 모나코 요트클럽은 10대의 J70을 보유하고 있었다. 10팀씩 두 개의 플리트 fleet로 나누어 게임을 진행하고, 다른 플리트 선수들은 관람정을 타고 나가 다른 플리트의 경기를 구경했다.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척수가 함께 대회를 하는 것이 흔하지는 아니지만, 보령에서 개최되는 J70 대회에서 10척가량이 동시에 스타트를 하는 대회를 해 본 적이 있던 터라 쫄지는 않았다.
우리는 A조 Fleet A에서 대회를 했고, 3경기를 5등, 2등, 4등으로 마쳐 Fleet A의 3위를 차지했다. 20팀이 출전한 터라 첫날 성적으로 Fleet A의 5위까지, 그리고 Fleet B의 5위를 묶어 새로 Gold Fleet를 만들고, 각 조의 6위 이하로 Silver Fleet을 만들어 2일 차 경기를 진행하게 되었다. 각 조의 상위권 팀을 합친 Fleet A에서 우리 팀은 점수 상 10팀 중 5위 팀이었다.
유럽에서 요트를 타는 것은 처음인데, 성적상으로 유럽팀들에게 크게 밀리지 않으니 자신감이 올라왔다. 내일은 더 잘해보자고 으쌰으쌰 파이팅을 했다.
“와. 다이내믹 마크다!”
“응, 나도 보고 깜짝 놀랐잖아. 저런 마크 있으면 마크 줄에 걸릴 일도 없겠네.”
“맞아. RC정에 깃발도 봐봐.”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하나씩 들어 올리는 것이랑 차원이 다르잖아.”
맨해튼 요트 클럽에 갔을 때 허드슨 강 내 자유의 여신상 근처에 ‘Honorable William Wall’이라는 클럽하우스가 있어서 그곳에서 대회도 관람하고 맨해튼의 야경을 보며 파티를 하는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모나코 요트 클럽은 한 수 위여서, 럭셔리한 클럽 꼭대기층에 아예 선상 파티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럭셔리한 클럽 하우스가 아닌 다이내믹 마크라는 사실! 우리의 관심은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한 대회 신문물들이었다.
RC정 Racing Committee boat에 대회의 약속된 언어인 깃발들이 쪼르르 준비되어 있는 것, 그리고 경기 중에 돌아야 하는 마크가 다이내믹 마크라는 것 등 말이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쓰는 마크가 공기를 넣어 부푼 원뿔모양 마크에 줄로 무거운 앵커를 연결해 수역에 띄워놓는 것인데 반해, 다이내믹 마크는 고정을 위한 앵커 없이 GPS를 조종에 맞춰 마크가 수역 위에서 스스로 이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종종 요트의 킬이 수심 아래 늘어져 있는 줄에 걸려 마크를 걸고 이동하는 등의 사고가 발생할 사고 등은 없다.
드디어 대회 마지막 날. 우리는 오늘 두 게임 이상을 진행하면, 모두 좋은 성적을 내서 어제의 낮은 순위인 5위를 버리자는 계획을 세웠다. 이번 대회는 총 5게임을 하면 가장 낮은 성적 1개를 버릴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속한 골드 플리트는 각 조의 상위 5팀이 모였으니 생각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바람아 제발 불어줘. 지난주만 해도 센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왜 이러는 거니?”
“그러게, 우리 이 대회를 위해 17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심지어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
어제보다도 약한 바람에 오랫동안 대기를 하다가 수역으로 나왔다. 바람의 컨디션이 최상은 아니었지만 대기 중인 선수들이 있었기에 4번째 경기를 시작했다. 오히려 미풍일 때 실력이 드러나는 법인데! 우리 팀은 바람을 읽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Gold Fleet 10팀 중 9등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5번째 경기. 4번째 경기의 성적이 너무 낮은 우리 팀은 결의를 다지며 아마도 마지막이 될 이 경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끝내 바람은 사그라졌고, 5번째 경기는 대회 중간에 취소가 되었다. 이로서 4경기를 진행하며 우리 팀은 최종 7위가 되었다.
이제 시상식. 네덜란드, 스위스, 프랑스, 독일, 체코, 이탈리아, 영국, 미국, 모나코 등에서 참여한 팀 중 1등은 네덜란드 팀이, 2등은 스위스, 그리고 3등은 프랑스 팀이 차지했다. 1등에게는 모나코 요트 클럽의 문장이 새겨진 재킷을 나눠주는데 그 재킷이 너무 예뻐서 다들 부러움의 환호성을 지른다. 예쁜 옷을 알아보는 눈은 전 세계가 똑같나 보다. 여성 세일러들의 축제와도 같은 대회이다 보니 서로 축하하고 기뻐하는 분위기이다.
“우리는 이제 출발해. 6~7시간 정도 운전하면 집에 갈 수 있어. 너희는?”
“우리는 내일 아침 니스에서 파리로 갔다가, 파리에서 한국으로 출발해.”
“긴 여행이 되겠네. 조심히 돌아가. 내년에 또 만나!”
“응, 내년에 꼭 보자.”
유럽 친구들은 자동차를 운전해서 독일로, 이탈리아로 돌아간단다. 우리는 마치 매년 통영 요트대회에서 만나는 인천팀, 부산팀 친구들과 대화하듯 내년에 만나자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이제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분명 대회 전 주 김포에서 마지막 연습을 할 때만 해도 배와 등에 핫팩을 붙이고 털모자를 쓰고 연습을 했었는데, 지금 여기는 완전한 여름이다. 고작 열흘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남프랑스와 모나코 생활에 푹 빠져서일까, 서울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