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넷째 날 아침, 창문을 열자 파리의 차가운 겨울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제야 창밖 회색 지붕 너머로 에펠탑이 보였다. 커튼 끝자락이 햇살에 간 질리듯 흔들릴 때마다, 거대한 철골 구조물이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여행자가 꿈꾸는 ‘에펠탑이 보이는 호텔 아침 식사’가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는 희미하게 보이는 에펠탑을 바라보며 식탁 앞에 앉아, 오랜만에 익숙한 리듬을 되찾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내가 만든 신선한 샐러드가 놓였다. 양상추와 루꼴라, 토마토, 파프리카, 사과, 오이를 넓은 접시에 담고, 된장과 참기름,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를 섞어 만든 드레싱을 뿌렸다. 오레가노와 후추를 흩뿌리자 식탁 가득 허브향이 감돌았다. 누군가 챙겨 온 된장과 참기름 덕분에, 파리의 풍미와 서울의 향이 조화된 특별한 샐러드가 완성되었다.
샐러드 그릇이 식탁 위에 놓이자 대화는 멈추고, 포크가 말을 시작했다. 된장과 참기름은 어딘가 길을 잃은 듯하면서도, 어디에선가 부드러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발사믹의 날카로운 산미가 누그러지면서, 사과의 단맛이 뒷맛을 담당했다. 이건 단순한 샐러드가 아니라, 입 안에서 벌어진 작은 맛의 잔치였다. 그날 이후, 이 아침 샐러드는 매일 아침 식탁에 오르는 기도문 같은 요리가 되었다.
우리는 미술관으로 ‘출근’할 준비를 했다. 파리에서 매일 아침 미술관으로 향하는 일이 점점 우리의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콩코르드(Concorde) 역에서 내려, 여행객이 없는 텅 빈 튈르리 정원을 가로질러 센강을 건넜다. 오래된 기차역 건물을 개조한 오르세 미술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으로는 센강의 윤슬이 반짝였고, 거대한 시계탑이 마치 얼굴처럼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보안 검색대를 지나,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이 살아 숨 쉬는 예술의 성전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5층으로 올라가 인상주의 작품들을 감상하고, 1층으로 내려와 19세기 후반의 회화를 둘러보던 중, 우리는 한 벽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 벽에는 시대를 응시한 두 점의 대작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화가의 작업실, 진정한 알레고리》(1855)와 《오르낭의 장례식》(1849–1850). 각각 가로 6미터, 7미터에 달하는 압도적인 규모였다. 우리는 한참 그림을 바라보다가 《화가의 작업실》 앞에 멈췄고, 몇 가지 질문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화가는 풍경화를 그리고 있는데, 왜 화면 앞엔 풍경이 보이지 않을까?
왜 그는 화면 중심에 앉아 있는 걸까?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누구이며, 왜 그런 구도로 배치된 것일까?
우리는 제목 《화가의 작업실, 진정한 알레고리》를 깊게 생각해 보았다. 전통 회화에서 ‘알레고리’는 신화, 종교, 도덕, 이상적 관념을 추상적인 상징 인물이나 장면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쿠르베에게 알레고리는 허구나 신화를 거부하고, 현실을 진실한 상징으로 삼아 예술과 삶, 개인과 시대를 정직하게 마주하려는 사실주의 예술가의 선언과 같다.
이런 배경 속에서 우리는 그가 그리고자 한 현실의 의미를 그림 속 인물들을 알아보았다. 중심에는 화가 자신인 쿠르베가 있다. 그는 고향 오르낭의 풍경을 묵묵히 그리고 있다. 주변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서 있지만, 그의 시선은 오직 아이와 자신이 그리는 풍경에만 고정되어 있다. 그는 창조자이자, 삶을 그리는 노동자로 보이다.
그 옆에는 두 인물이 선다. 왼편에는 누더기를 입은 소년이, 오른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의 여인이 있다. 소년은 말없이 그림을 응시하며 순수한 시선을 상징하고, 여인은 신화적 존재가 아닌,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그녀는 예술적 뮤즈가 아니라, 예술이 다뤄야 할 삶 그 자체를 대변한다.
왼편에는 성직자, 거지, 악사, 노파 등 사회의 하층민들이 무질서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들의 굳은 표정과 흩어진 시선은 갈등과 고통을 드러내며, 쿠르베가 응시한 현실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
반면 오른편에는 철학자 푸르동, 시인 보들레르, 수집가 브뤼야스, 평론가 샹플뢰리 등 쿠르베의 지적 동료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조용히 대화를 나누지만, 그림의 중심은 아니다.
놀랍게도, 이 거대한 회화의 진정한 중심은 화가도, 지식인도 아닌, 화가 앞에 조용히 서 있는 ‘작은 아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러나 깊은 눈으로 화가의 그림을 바라본다. 바로 그 순수한 눈이야말로 쿠르베가 그리고자 한 현실의 시선이 아닐까. 그림의 중심에서 화가와 아이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만큼, 둘은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존재로도 읽힌다.
《화가의 작업실》은 단순한 시대의 자화상이 아니다. 이 그림은 예술과 현실, 이상과 사회가 뒤섞이고 만나는 넓은 무대다. 우리는 그 앞에서 화가와 나, 그림과 현실, 삶과 예술이 서로 마주하는 순간을 경험했다. 나 역시 이 그림 앞에서 조용히, 때로는 격렬하게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다. 관람객으로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의무란, 그림 앞에서 삶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뒤 미술관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햇빛은 센강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오롯이 예술과 함께한 하루였다. 우리는 강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돌에 부딪히는 물소리, 유람선이 남긴 물결, 멀리 보이는 노트르담 성당을 배경으로, 우리는 유랑자처럼 파리의 오후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날, 우리는 하나의 장면, 하나의 풍경이 되어 있었다. 그림에 대해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다. 말보다 먼저 반응한 것은 마음이었다.
예술도, 여행도, 삶도 결국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하루를 살아낸 것처럼, 단 한순간을 깊이 있게 살아내는 일. 그것이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