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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마지막 여름 - 오베르의 들판에서

-오르세 미술관 고흐 탄생 170주년 특별전-

by 씨네진

오르세 미술관에 들어서자 우리는 5층부터 관람을 시작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모여 있는 이곳은 감각이 폭발하던 시대의 빛과 색채가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이한다. 감상의 첫걸음을 가장 빛나는 작품에서 시작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곳은 예술의 애피타이저 같은 곳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첫 번째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작품은 마네의〈풀밭 위의 식사>였다. 책에서 봤던 이미지보다 훨씬 큰 실물 앞에 선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화면을 지배하는 검은색의 권위감,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들, 대담한 구도가 단숨에 나를 짓눌렀다. 모네의 부드러운 빛, 르누아르의 웃음과 따뜻한 살빛, 쇠라의 점묘 속에 깃든 침묵, 고흐의 들판 위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 고갱의 강렬한 색채, 그리고 카유보트의 도시적이고 세련된 구도까지 인상주의 회화를 만난 기쁨이 밀려들었다. 잠시 쉬려고 그 감정의 잔상을 안고, 거대한 시계 창이 보이는 미술관 카페로 향했다.


기차역이었던 공간이 철제 기둥과 격자 천장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황금빛 펜던트 조명이 낮은 속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은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우리는 커피와 따뜻한 호박 수프를 주문했다. 수프는 고운 벨벳처럼 부드러운 질감이 혀를 감싸며 매끄럽게 스며들었다. 단호박 특유의 달콤함은 땅에서 스스로 익어 나온 듯 자연스러웠다. 바게트 한 조각을 찍어 먹으니, 수프의 부드러움과 빵의 탄탄한 질감이 어우러지며 입안에서 다시 한번 맛이 살아났다. 프랑스인들이 식전 수프로 이 요리를 즐기는 이유는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천천히 풀기 위해서라고 들었다. 나 역시 따뜻한 호박 수프 덕분에 관람을 마치고 찾아왔던 흥분이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이 카페는 화가들이 압생트 한 잔으로 벅찬 감정을 달래던 곳처럼, 가상공간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가기 전 잠시 머무는 작은 정류장 같은 공간이었다.


아직도 볼 그림들이 많았지만 나는 고흐 특별전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반 고흐: 마지막 달〉을 보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2023년 가을, 오르세 미술관은 반 고흐 탄생 17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 마지막 두 달을 조명하는 특별전을 열었다. 1890년 5월부터 7월까지, 고흐는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머물며 70점 이상의 회화와 수십 점의 드로잉을 남겼다. 〈오베르의 교회>, 〈까마귀가 나는 밀밭〉, 〈가셰 박사의 초상〉 등 대표작이 모두 이 시기의 작품이다. 마침 이 특별전을 하는 시기에 우리가 미술관을 방문하게 되어 이 또한 행운이었다.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동안 전시 포스터를 계속 바라보았다. 이 전시 포스터에 사용된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의 〈오베르의 평원(Plain near Auvers)>이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생의 마지막 두 달 동안 머물렀던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그린 마지막 풍경화이다. 왜 이 그림이 전시 포스터로 사용되었을까 이유가 궁금했다. 기다리며 보고 또 보았다. 그런데 그림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니, 한 사람의 고독과 위안이 동시에 밀려왔다. 새순 같은 연한 초록색 위로 아무도 없는 들판에 무거운 구름만 떠 있는 풍경이 너무 외로워 보여서 가슴이 아팠다. 언뜻 보기엔 평온한 시골 풍경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거운 하늘과 땅의 균열 사이로 침묵처럼 고통이 번지고 있다.

“나는 슬픔을 캔버스 위에 풀어놓고 있다.”


그의 말처럼, 이 들판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그의 내면이었다. 고흐는 이 풍경을 단순히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펼쳐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갤러리 안에서 전 세계에서 온 관람객들이 짧고 강렬한 붓질로 물결처럼 이어지는 터치들이 내는 소리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림 속 아주 연한 순색의 색채는 순한 양 같은 마음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 작품들을 천천히 감상하다가 다시 <오베르의 평원>을 만났다. 그림은 가로로 긴 이중 정사각형 캔버스 위에 그려졌다, 포스터가 아니라 순수 그림으로 보니 아주 특별하게 보였다. 넓게 흐르는 초록 들판과 높이 치솟은 하늘이 선명한 수평선으로 나뉜다. 그 단순한 직사각형 구도로 그려진 고요한 풍경에는 어딘가 모를 불안이 스며 있다. 들판은 넓지만, 들판은 넓은데 갇혀있는 마음이 동시에 다가온다.


하늘은 깊고 무거운 울트라마린 블루로 가득 차 있다. 그 안에는 회색빛 구름이 서서히 번지고 있고, 구름 사이사이로 번지는 흰색의 질감이 하늘의 정적을 뒤흔든다. 이 푸르름은 고요한 위로가 아니라, 내면의 불안을 감싸는 무거운 푸름이다. 하늘의 색은 침묵하는 고흐의 절규처럼, 차갑지만 강렬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반면, 땅은 온통 초록과 연노랑, 그리고 민트와 연둣빛으로 흔들린다. 생명이 가득한 들판, 그러나 그 생명조차 편안하기보다는 격정적인 붓질로 흔들린다. 붓끝은 흔들리고, 색은 불규칙하게 겹치며, 풍경은 평온한 풍경이 아니라 휘몰아치는 감정의 비바람처럼 보인다. 그 안에서 나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 있던 화가의 마음을 느꼈다.

그림 속 들판에는 아무도 없다. 그는 그림 밖 어딘가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지막 여름을 살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 푸른 하늘 아래에서 그의 마지막 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색으로 말했고 붓으로 울었다. 들판은 살아내려는 몸부림으로 흔들리고 하늘은 현실의 돌덩이처럼 푸르게 짓누른다. 이 그림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끝내 삶을 그리려 했던 고흐의 영혼의 편지 같다. 고흐는 이 들판에서 스스로에게 총을 겨눴고, 이틀 뒤, 동생 테오의 품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금도 그 들판은 오베르에 고요히 남아있으며, 그는 테오와 나란히 그곳에 잠들어 있다.


이번 전시는 고흐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 70일의 흔적을 담고 있지만, 결코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온 힘을 다해 그려낸 그림들은 정수된 물처럼 맑았다. 고흐가 그렸던 작품 <오베르 평원>에서, 나는 그의 영혼의 소리를 들었다. 그는 이미 세상에 없지만, 여전히 저 들판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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