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의 삶은 언제나 길 위에 있었다. 그는 더 나은 빛과 풍경, 더 진실한 자신을 찾아 끊임없이 떠돌았다. 그는 정착하는 대신 떠났고, 떠나는 길마다 하나의 그림이 되었다. 그는 상처를 멈추고,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대하며 1890년 5월 20일 아침, 고흐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파리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들판과 회색 지붕들이 펼쳐지는 작은 시골 마을에 도착했었다.
우리는 오세르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관람한 감동을 안고 그의 흔적을 따라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향했다. 겨울 아침, 파리 북역에서 오베르 마을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창밖의 풍경이 회색 도시에서 들녘의 빛으로 바뀌자 우리는 수다를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고흐의 그림 속 색채들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오베르에 도착했을 때, 밝은 햇살이 건물 담벼락을 부드럽게 감싸며 중세 마을의 정취를 더했다. 교회 앞마당에 들어서자 가지치기된 나무들이 줄지어 서서 기하학적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정면에서 본 성당은 웅장하고 단아했다, 우리가 기억하던 고흐의 붓질이 갈등하듯 뒤틀린 그림과 사뭇 달랐다. 즉 그림 속 교회는 불안정하고 격렬하지만, 실제 풍경은 조용하고 균형 잡혀 있었다. 같은 풍경인데도 다른 시선으로 그려진 장면 앞에서, 우리는 고흐의 마음을 다시 읽게 되었다.
1890년 6월, 고흐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작은 언덕 위에 선 교회를 마주하고 붓을 들었다. 짙은 코발트블루와 검은빛이 소용돌이치는 하늘은 불안하고 무겁고, 회색과 보랏빛으로 생기를 잃은 교회는 힘이 없어 보인다. 그와 대조적으로, 황금빛으로 물든 땅은 살아 숨 쉬듯 밝게 빛난다. 고흐는 생명을 잃어가는 교회에 강렬한 색을 입히고, 정적인 건물을 요동치는 존재처럼 그려냈다. 왜곡되고 기울어진 교회, 그리고 그 아래 머뭇거리며 걷는 연약한 한 여인은 인생의 갈림길 앞에 선 화가 자신을 닮았다.
〈오베르의 교회〉는 고흐가 생의 마지막 한 달 동안 그린 작품 중 하나다. 단순한 풍경화가 아닌, 자기 내면을 고백하듯 그려낸 그림이다. 어린 시절 목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품었던 신앙은 삶의 고통 속에서 점점 껍질만 남았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구원을 바라지 않았다. 그림으로 그린 교회는 침묵하는 신 앞에서 고흐가 말할 수 있는 마지막 언어였다. 삶과 죽음, 고독과 희망 사이에서 버티기 위한 그의 조용한 외침이었다.
아무도 없는 교회 앞, 반 고흐가 마지막 붓을 들던 그 자리에서 우리는 코발트블루, 자홍빛, 연두색, 주홍색의 스카프를 둘둘 말아 똬리를 틀어 머리에 올렸다. 쌀쌀한 바람을 비껴가며 노르웨이 전통적인 사미 음악에 맞춰 조용히 교회 앞을 걸었다. 천천히 춤을 추자, 스카프와 외투의 색들이 어우러져 고흐의 그림 속 색채처럼 공간을 채웠다. 색이 춤이 되는 순간이었다.
춤 짓은 크지 않았지만 고요하게 서있는 교회와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그 작은 움직임은 오히려 깊은 울림으로 퍼져간다. 마치 삶도 그런 흐름처럼 반복되는 일상의 순환 속에 있다는 듯, 우리는 걷고, 멈추고, 다시 걸었다. 춤은 무대도, 경계도 없이 교회 앞을 살아 있는 장면으로 바꾸었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지만, 우리의 춤은 어떤 기도처럼 느껴졌다. 죽은 화가를 위한, 혹은 그 화가처럼 삶을 힘겹게 살아낸 모든 이들을 위한 위로의 춤이었다. 정지된 건축물과 움직이는 몸짓이 교차하자, 우리는 고흐의 색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점심 무렵, <Le Chemin des Peintres — 화가들의 길>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레스토랑에 들렀다. 음식이 나왔을 때, 시선은 보는 것을 넘어 감상의 차원으로 바뀌었다. 미디엄 레어로 구워진 스테이크 위에 노란 꽃잎 하나, 물방울 같은 잎채소, 붓 터치처럼 흩뿌려진 허브가 정물화 같았다. 고흐가 오베르의 들판에서 그렸을지도 모를 야생화처럼, 그 한 접시는 인생의 찰나를 아름답게 붙잡고 있었다.
칼끝이 고기에 닿자 육즙이 번졌고, 껍질째 구운 감자는 바삭하면서도 촉촉했다. 두 식감을 동시에 담아낸 솜씨에 유능한 셰프의 정성이 느껴졌다. 맛은 시각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입안으로 퍼졌다. 디저트는 ‘카페 구르망’ 스타일로, 판나코타, 브라우니, 슈크림, 에스프레소 한 잔이 투명한 유리 플레이트 위에 조각처럼 놓여 있었다. 우리는 스푼을 그림 그리듯 섬세하게 움직였고, 단맛은 짧았지만, 여행의 긴장을 녹여주었다. 짧은 식사였지만, 그것은 미술관을 걷듯 한 점 한 점을 음미하는 경험이었다.
겨울 햇살이 비치는 늦은 오후, 우리는 나란히 서서 담쟁이덩굴로 덮인 묘소 앞에 고개를 숙였다. 왼쪽엔 빈센트, 오른쪽엔 테오 두 형제의 무덤이었다. 서로를 놓지 않으려는 인연처럼, 담쟁이는 조용히 자라 묘비를 감싸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모두가 그 자리에 선 이유는 분명했다. 한 예술가의 삶에 대한 깊은 경외, 그 감정이 공기처럼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먼저 흐느끼기 시작했고, 곧이어 다른 이들의 울음도 번져갔다. 표현하지 못했던 미안함, 그리고 그의 고통으로 누리게 된 아름다움이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당신의 고통으로 행복해졌습니다.”
내가 자주 하던 말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예술은 그의 피와 같았고, 우리는 그 피를 자양분 삼아 그림 앞에서 웃고, 감동하고,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지독한 외로움과 절망, 가난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진실한 응답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일이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날의 장면은 예술가의 삶과 죽음 앞에 드리는 깊은 헌사였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고흐의 그림이 시간 위에 놓인 것 같은 마을이었다. 고흐가 그토록 사랑했던 색들이 실제 풍경처럼 살아 있었다. 그가 걷던 길, 바라보던 하늘, 그리고 그림 속에 남긴 붓질의 흔적이 지금도 이 마을 곳곳에 흐르고 있었다. 나비고 교통카드 한 장으로 다녀온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 하루는 어떤 전시회보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고흐의 시선으로 풍경을 다시 바라보고, 그의 붓질을 따라가며, 우리는 그의 삶과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