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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곰리의 몸으로 말하는 조각들

로댕미술관 안토니 곰리 특별전

by 씨네진

파리 7구, 연한 베이지 외벽과 창문 베란다에 꽃이 핀 19세기 건축물 사이로 철제 정문 너머 로댕미술관(Musée Rodin)이 모습을 드러낸다. 회색빛 석재 벽과 조용한 아침 거리, 정돈된 건물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예술의 문턱 같다. 원근법이 살아 있는 도시 거리를 배경으로 나는 붉은 패딩에 검은 모자와 목도리를 두르고 미술관 앞에서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잿빛 거리와 대비되는 선명한 나의 옷차림은 사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 사진은 마치 ‘여행자의 서문’처럼 한 장의 프롤로그였다.

석조 건물 외벽 모서리에 붙은 전시 포스터에는 ANTONY GORMLEY: CRITICAL MASS II라는 제목과, 바닥에 앉은 청동 인체 조각들이 정원 너머로 이어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포스터만으로도 묵직한 울림이 전해졌다. 인간의 몸과 공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영국 조각가 안토니 곰리의 대표작 Critical Mass II(1995)는 2023년 가을부터 2024년 초까지 로댕미술관 정원과 본관에 전시되었다. 열두 가지 기본 자세를 표현한 60개의 조각 작품은 로댕의 작품과 시각적 대조를 이루며, ‘몸’이라는 조각의 본질을 다시 묻게 한다. 그 전시를 로댕미술관에서 접할 수 있었던 건 예기치 않은 행운이었다.


미술관 정원을 지나 전시장에 들어서자 말문이 막혔다. 입구 통로에서 처음 마주한 조각은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반쯤 굽은 자세로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벽 앞에 선 인간의 절망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나도 모르게 그 고통에 동참하고 있었다. 조각 곁에서 나 역시 고개를 숙이며 몸으로 응답해본다. 괴로움이 척추를 따라 곡선으로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하얗게 침묵하는 벽 위에, 검고 무거운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절망의 몸짓으로 시작된 만남은 곧 《Critical Mass II》로 이어졌다. 말 없는 조각들로 가득한 공간, 하얀 벽에 아주 검은 조각 덩어리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조각 작품들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며,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지 그 자리에 있다. 선 채로, 앉은 채로, 무너진 채로. 마치 시간에 붙들려 멈춰버린 존재들처럼. 그런데 감정을 지운 조각들 앞에서 나는 왜 이토록 마음이 흔들릴까. 파도처럼 밀려드는 이 감정은 어디서 오는 걸까. 곰리는 조각에 감정을 새기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조각들은 오히려 내 안에 감정을 끌어올렸다.

중력에 순응하듯 쓰러진 몸, 벽에 기댄 형상, 허공에 매달린 인체들. 서 있는 자세는 마치 저항하듯 당당했고, 앉은 자세는 사유에 잠긴 내면의 몸짓처럼 보였다. 무릎을 꿇은 조각은 기도인지 절망인지 모를 슬픔을 머금고 있었다. 높은 천장 아래, 공중에 매달린 조각들 사이를 지날 때 나는 무중력 속을 떠도는 듯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몸은 허공에 떠 있고, 균형 감각을 잃었다. 조각은 정지해 있었지만, 그 불안은 나를 작품과 깊은 교감의 상태로 이끌었다. 그 순간,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부유하는 내 모습을 들켜버린 듯했다.


하얀 전시실 한가운데, 수많은 인체 조각들이 뒤엉킨 채 한 무더기로 누워 있었다. 겹겹이 쌓인 몸들 사이에서 뻗은 손과 달리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보이기도 했고, 무너진 문명의 잔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작품 가장자리에는 벽을 향해 무릎 꿇은 형상들이 하나씩 떨어져 놓여 있었다. 중심에 집단으로 쌓여있는 조각상들에서 느끼는 혼란스러움과 달리, 그들은 침묵과 고립의 감정을 조용히 전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저렇게 쌓여있는 무리 속에 내가 있을까, 아니면 홀로 떨어진 저 인물에 가까울까. 작품 주변을 천천히 돌며, 나는 계속 묻는다.

전시실 한쪽 구석, 웅크리고 앉은 인체 조각이 있었다. 우리는 하나씩 그 곁에 다가가 앉거나, 등을 감싸듯 안아주는 몸짓을 하기도 했다. 말은 없었지만, 그 조각에 무언가를 건네고 싶었다. 작품은 혼자 고민에 잠긴 현대인의 모습처럼 보였고, 우리는 안아주듯 무심히 옆에 앉아 그 곁을 지켰다. 그렇게 조각과 우리 사이의 경계는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위로하는 사람이 오히려 위로받는 듯했고, 관람자인 내가 어느새 작품의 일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몸으로 대화하고 있었고 우리의 행위가 하나의 예술적 제스처로 환원되는 순간이었다.

미술관 안에서 시작된 조각과의 조우는 바깥에서도 이어졌다. 《생각하는 사람》, 《발자크》, 《칼레의 시민》, 《지옥의 문》, 그리고 그 문을 응시하듯 앉아 있는 안토니 곰리의 조각들을 배경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우리는 정원 한가운데 앉아 있는 안토니 곰리의 조각 앞에 자연스럽게 모였다. 누군가 팔을 벌려 조각의 팔에 닿을 듯 말 듯 동작을 보탰다. 또 다른 이는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굽혀 다가갔다. 어떤 이는 등 뒤에 살포시 앉았고, 또 다른 이는 조각의 발 앞에 조심스럽게 마주 앉았다. 각자의 몸짓은 다 달랐지만, 그 모두가 하나의 다정한 응답이었다.

조각상들과 주고받는 몸과의 대화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몸짓은 어느새 춤 짓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것은 춤이라기보다 아주 느리고 작은 몸짓이었다. 손을 잡고 작품 주변을 걷다가, 땅을 향해 몸을 낮추고, 손을 가슴에 얹은 채 회전하며, 다시 하늘을 향해 팔을 뻗는다. 그 조용한 제스처들 속에 말 없는 평화의 언어가 깃들어 있었다.그 순간, 조각은 더 이상 차가운 청동이 아니었다. 우리의 손짓과 시선, 침묵과 웃음을 고요히 받아들이는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자,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이 보이고 뒤를 돌아보니 정원에 자리하고 있는 다른 조각들이 보인다. 정원이 조용한 무대가 되었고 곰리작품과 로댕 작품은 무대 장식이 되었다. 말 없는 조각상 앞에서 느리게 천천히 춤을 추자, 굳어 있던 마음이 풀리고, 멈춰 있던 몸이 조용히 반응했다. 그것은 춤이라기보다는, “나는 여기 있다”라는 존재의 징후 같은 움직임이었다. 왜 우리는 조각상 앞에서 춤을 추었을까. 아마도 그 침묵의 형상이 우리 마음을 흔들었고, 우리는 그 울림에 몸으로 응답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조각에 의미를 부여하는 놀이였지만 우리는 그 덕택에 안토니 곰리의 작품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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