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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다리담 Oct 03. 2023

#19. 익숙함이 주는 아늑함

하와이 원격근무 일상

오늘도 여느 때와 없는 일상이다. 서핑하고 밥 먹고 일하는 삶. 


오늘만 일하면 주말이다. 일한 지 이틀 되었지만 주말이라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 역시나 일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구나. 오늘도 여느 때처럼 다섯 시 반 기상. 하와이가 나에게 갓생을 선물했다. 익숙하게 파도차트를 보며 밥을 먹고는 서핑스폿으로 출발했다. 오늘은 파도가 어제보다 조금 더 클 것으로 예상해서 기뻤는데 실제로는 작았다. 사실 오늘은 와이키키에서 서핑한 날 중에 파도가 가장 작았다.


파도가 작은 날은 라인업(파도를 기다리는 라인)이 좁아져서 괴로운 일이다. 나는 항상 라인업을 모아나 서프라이더의 오른쪽 쌍둥이 빌딩 사이로 잡는데, 파도가 작아지면 파도를 잡을 수 있는 구간이 좁아져서 모두가 그곳으로 몰린다. 그곳을 피크(peak, 파도가 가장 큰 부분)라고 하는데, 피크에서 잡는 사람들은 거의 항상 있기 때문에 나는 파도를 못 탈 확률이 높다. 파도가 사이즈가 더 크면 라인업이 넓어져서 파도가 크지 않은 숄더(피크의 오른쪽, 사람의 어깨에 빗댄 말)에서도 무난하게 탈 수 있는데 말이다. 시간이 지나 파도가 조금 더 커지기를 바라며 서핑을 시작했다. 파도가 깨지는 곳 주변에서만 파도가 잡히는 탓에 잡자마자 바로 방향을 틀지 않으면 라이딩이 그리 재미있지 않다. 오른쪽 턴은 잘 되는데 왼쪽 턴은 항상 한 템포 느리다. 왼쪽으로도 바로 턴 하는 것을 열심히 연습해야지.


카누스는 파도가 작아도 항상 파도는 잘 잡힌다. 어떻게 이런 곳이 있는지 새삼 감격스럽다. 내가 여태 타 봤던 스폿들 중 가장 편안하고도 안전한 동시에 파도를 잡기 쉽다. 오늘처럼 파도가 깨지지 않으면 귀나 코에 물이 들어갈 일도 전혀 없다. 매일 아침 이곳에서 서핑할 수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행운이다. 이곳을 재미없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젠가 나도 실력이 좋아지면 이곳이 재미없어지는 날이 과연 올 지 궁금하다.


며칠 전 만난 서핑친구 다이앤은 이곳에서 서핑한 지 1년 남짓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라이딩이 정말 예쁘고 여유롭다. 그러고 보면 이곳 사람들은 악착같이 패들 하지 않는다. 양양에는 왼쪽에는 선풍기 패들, 오른쪽에는 프로펠러 패들이 잔뜩인데 말이다. 나도 여기서 일 년 정도 매일매일 서핑을 하면 저런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나는 이곳이 너무 잘 맞는데 말이다.


파도를 타고 돌아와 라인업에 자리를 잡는데 내 옆에 동그란 작은 물체가 있다. 흘깃 무엇인가 보았더니 거북이! 너무 귀여운 아가거북이다. 내 몸통사이즈만 한 사이즈였다. 수면 가까이에서 꽤나 머물렀고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푸우하고 물을 뱉었다. 아 너무 귀엽다. 한참이고 바라보고 싶었지만 거북이가 싫어하지 않게 조심조심 옆으로 피했다. 조금 후에는 물속에 니모물고기도 보았다. 노랑 검정 세로 줄무늬가 있는 니모의 찾아서에 나온 바로 그 물고기. 니모는 물 밖에서도 저렇게 눈에 잘 띄어서 천적을 어떻게 피하지 하는 걱정이 잠시 들었다. 


한참 물속에 떠 있었더니 배가 고프다. 점심을 브런치를 먹을지 포케를 먹을지 고민이 깊다. 그러던 중 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발이 미끌려서 보드를 놓쳤다. 나는 가까스로 넘어짐을 면했지만 보드가 쿵 떨어졌다. 한국에서는 소중한 보드가 상하면 의례 눈살이 찌푸려지기 마련인데, 이곳에서는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표정이다. 네가 잘못하려고 한 거 하나도 없는데 왜 미안하냐고 되레 말해줬다. 날씨가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걸지, 아님 원래 좋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인 건지 궁금하다. 사람들이 친절해도 너무 친절하다. 보드가 떨어질 때 핀으로 부딪혔는지 플라스틱 스크루가 부러져서 핀이 달랑달랑했다. 다행히 핀박스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았고 자세히는 못 봤지만 보드도 괜찮은 것 같다. 죄송해요 서핑샵사람들.


오늘 메뉴는 팬케이크로 정했다. 터벅터벅 집 주변 가게로 갔다. 메이플 시럽을 잔뜩 뿌리고 버터를 올린 3층 팬케이크를 크게 썰어 한입 먹었다. 혀가 아리게 달다. 이때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한 입 들이켜 삼키면 이곳이 천국이다. 혼자 노트북을 하며 팬케이크를 먹고는 집으로 왔다. 커피를 먹어 낮잠을 설쳤지만 커피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오늘은 목요일, international marketplace에 장이 열리는 날이다. 마침 과일이 똑떨어진 차였기에 점심시간에 살짝 가서 과일을 사 와야지 했다. 점심시간 없이 하루종일 회의라 오후에 30분 짬이 간신히 나서 다녀왔다! 망고와 쏨땀, 타피오카컵, 파인애플까지 샀는데 단돈 18달러다. 와이키키에서 가장 저렴한 곳을 찾는다면 이곳이다. 룰루랄라 돌아와 빠싹 일을 했다. 시간이 부족해서 주말 동안 잠시 들어가서 일을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괜찮아. 크게 야근하지 않으니 일도 참말 할만하고 삶도 참 살만하다.


어느새 여행보다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더 좋다. 모든 게 다 처음인 곳에서 구글맵을 보며 여기 갈까 저기 갈까 10번 고민하고 새로운 풍경에 호들갑을 떨며 사진을 찍는 것도 좋다. 하지만 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건 익숙한 포케집에서 포케를 픽업하고 집 앞의 팬케이크집을 구글맵을 켜지 않고도 갈 수 있는 아늑함이다. 익숙한 것을 소중히 할 수만 있다면 그 속에서도 여행같이 살게 된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소중하다. 매일매일 행운이 일어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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