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첫 이사는 27년 전 겨울이다. 우리 가족이 10여 년간 살던 주택을 떠나 36평 아파트로 이사를 가는 기념비적인 날. 눈이 잘 내리지 않는 내륙지방이었지만 이삿날에는 가볍고 커다란 덩이의 눈송이들이 펑펑 내렸다. 12층 아파트의 7층, 그 집에서는 어쩐지 행복하게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며, 쉴 새 없이 오르내리는 사다리차를 바라보며 나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눈을 맞았다. 2월에 이사를 하고 그 해 3월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은 기억나지 않아도 입학식 전의 이삿날은 여전히 기억이 또렷하다. 어쩌면 20년 동안 같은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던 내 삶이 어느 순간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여러 번의 이사로 점철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일지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가족은 종태의 직장 근처, 작은 마당이 딸린 두 칸짜리 주택에서 살았다. 내 어릴 적 기억의 소실은 8세 전후로, 8세 이전의 인생은 평소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다가도 몇몇의 기억들이 시간과 함께 뒤엉켜 불쑥불쑥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종태의 직장 앞마당에서 초록색 원피스에 흰색 타이즈를 받쳐 입고 출장사진을 찍은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시골의 농협이란 무릇 직원에게도, 그 가족에게도 매우 자랑스러운 직장이었다. 그래선지 당시 농협 식구들은 가족의 대소사를 앞두고 읍내 사진사를 불러 종종 기념사진을 찍고는 했었다. 우리 가족도 단정한 옷을 맞춰 입고 정원수가 잘 손질된 농협의 앞마당에서 독사진과 단체사진을 찍었다. 당시 농협 사원들 사이에서는 직장 앞마당에서 사진을 찍는 게 유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날의 기록은 오랫동안 액자에 담겨 거실 한편을 장식했다. 두 칸짜리 주택에서 읍내의 36평 자가 아파트, 외곽의 18평 짜리 임대 아파트로 이사를 다니는 동안에도 액자는 늘 같은 자리에 붙어 있었다. 자식 셋의 사진 중 가장 뙤릿하게 나온 내 사진은 특별히 크게 뽑아 액자에 넣어졌다. 3*4 사이즈로 인화된 나머지 사진들은 이미 오래되어 찐득하고 무거운 앨범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아크릴 재질의 짙은 청록색 니트 원피스를 언제부터 언제까지 입었는지, 그 옷이 어떻게 내 옷이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식구가 많은 집의 차녀들에게 옷의 출처는 때때로 모르는 편이 더 나은 쪽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결단코 새 옷은 아니었을 그 옷을 입고 나는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고,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내 어린 시절의 첫 번째 모습으로 남았다.
스무 살이 되고 나는 본격적인 이사의 세계로 혹은 무주택자의 삶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학교 근처의 작은 원룸이 첫 시작이었다. 스무 살의 첫 독립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모아둔 돈이 없었기에 나는 마지막으로 종태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대학을 보내지 않으려는 종태의 작전을 피해 나는 몰래 학자금 대출을 신청했다. 입학 첫 해의 딱 한 학기 등록금이 대출금으로 나왔다. 스무 살의 낭만 같은 것은 내게 가당치 않았다. 자취를 시작한다는 것은 노동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나는 친구들이 주말에만 가는 호텔 뷔페 알바에도 꼭 따라가고, 방학 때는 마트 푸드코트 안의 작은 회전초밥집에서도 일했다. 최저시급이 2500원도 되지 않던 때라 그렇게 많이 일을 해도 학비와 생활비를 겨우겨우 충당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 종태는 '자녀양육'이라는 것에서 본격적으로 손을 뗀 듯 했다. 월세를 보내주지도, 생활비나 교재비를 보내주지도 않았다. 덕분에 처음 집을 구할 때 걸었던 보증금 300만 원이 다달이 월세로 깎아 먹히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시 집주인은 월세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상의 했으니 걱정없이 열 달을 지내라 말해주었고, 마지막 두 달치의 월세는 내 몸에 스며든 생선 비린내와 바꾼 작고 소중한 알바비로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도 경희가 김치며 반찬을 종종 보내주어 굶지는 않으면서 첫 자취생활을 했다. 집에 먹을 것은 없었지만 친구들은 늘 내 방으로 모여들었다. 김치와 쌀만 있으면 뭐든 만들어먹는 조리과 학생들이라 우리는 없는 살림에도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하지만 첫 자취 2년 동안 라면을 너무 많이 먹어서 대학을 졸업하고 몇 해 동안이나 나는 라면을 입에 대지 못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실은 갈 곳이 없었다. 가정은 이미 해체되었고 나는 무려 대학까지 나왔으니 내 앞가림을 스스로 해야 하는 사람이 나도 모르는 새에 되어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한다는 취업뽀개기 같은 단어가 없던 시절이었다. 전문대 조리과를 졸업한 사람의 다음 절차는 자연스레 생계전선으로 뛰어드는 길 밖에 없기도 했다. 배운 기술이 있으니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고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지만, 4년 동안 공부해서 휘황찬란한 스펙과 함께 세상으로 나온 친구들과는 시작점 자체가 다른 인생을 스스로 결정한 셈이기도 했다. 학과 사무실 문에는 숙식이 해결되는 도시의 일자리들이 돈 없고 겁 없던 우리를 유혹했다.
나는 전화로 일산에 있는 일자리를 잡아두고는 기차표를 끊었다. 해산물 뷔페에서 한 달에 세후 98만 원을 받으며 일했다. 규모가 크고 일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나는 도시의 깍쟁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제공된다는 숙식은 식당 근처의 한 칸짜리 원룸이었고, 성별로 호실을 나눠 모두 한 방에 집어넣었다. 어떤 때는 두 명, 또 어떤 때는 일곱 명이 방 한 칸에서 생활했다. 모두 나처럼 숙소의 유혹에 사로잡혀 도시로 온 시골내기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덜 시골내기들은 무리를 지어 밤마다 놀러를 나갔다. 조금 더 어리고 어리숙한 몇몇은 노동의 고됨과 타지 생활의 괴로움을 이불과 함께 뒤집어쓰고 몰래 울며 잠이 들었다.
서너 달이 지난 후 나와 함께 입사했던 촌애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이제 깍쟁이 무리들과도 함께 치킨과 맥주를 마시는 사이로 발전했다. 나는 5월에 입사해 함께 일을 시작한 4명 중 가장 마지막까지 버티며 일을 했다. 그래 봤자 다섯 달이었다. 깍쟁이들도 촌뜨기들도 모두 지겨워졌다. 일이 끝나고 숙소에 돌아가면 또다시 출근을 한 것 같았다. 그 작은 방안에서도 줄타기와 편 가르기가 성행했고, 나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처럼 웃으며 빨래며 청소를 했지만 언제까지고 그곳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짐을 싸서 기숙사를 나왔다. 첫 번째 퇴사였다. 직원 중 가장 최연소였던 나의 퇴사는 얼마간 식당의 이슈가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같은 파트에서 일하던 이모님 두 분과 마지막으로 식사를 했다. 돼지갈비를 맛있게 얻어먹고 배웅을 받았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나는 비빌 언덕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일산에서의 생활을 정리한 후 고향으로 내려가 얼마간 경희의 집에 머물렀다. 경희와 지내면서 유일하게 마음이 편했던 때이기도 했다. 그때의 경희는 아프지 않았고, 나는 우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희가 목욕탕에 다녀와 늦은 아침상을 내밀면 나는 눈곱도 떼지 않고 숟가락을 들었다. 경희가 해준 밥상은 반찬이 몇 가지 없어도 어쩐지 내 입맛에 딱 맞아 밥이 꿀떡꿀떡 잘 넘어갔다. 경희는 매일 아침 내 이부자리로 밥상을 들이밀었다. 먹고 다시 자라는 경희의 말이 내게는 묘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자식을 먹이는 일에서 해방되어 혼자 살던 경희에게, 나는 다시금 신경 쓰고 끼니를 챙겨야 하는 존재가 되었지만 경희는 불평 없이 기꺼이 나를 먹여 살렸다. 우리는 그동안 아무 일이 없었던 사람들처럼 무덤덤하게 밥을 먹고 산책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고기가 없는 조촐한 식사를 서로 말이 없이, 그러나 마음의 어느 구석에도 불편함이 없는 안온한 상태로 함께 했다.
그렇게 몇 달간 일산에서 일을 하며 모아둔 돈으로 생활을 했다. 졸업 시즌이 되었고 각자의 살 길을 찾은 동기들의 소식이 드문드문 날아왔다. 당시 내가 가진 재산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산 연보라색의 싸구려 캐리어와 통장잔고 43만 원이 전부였다. 괜히 조바심이 났다. 영원히 시골에서 경희와 살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울행을 결정했다. 친구와 함께 을지로 4가의 건어물시장 근처에 고시원 방을 잡았다. 우리는 그 방에서 세 달을 함께 살았다. 친구도 나도 서울에서의 첫 직장을 그곳에 사는 동안에 구했다. 나는 압구정, 친구는 종로로 출근했다. 직장을 구하고, 고시원 방값을 내고 나니 차비가 모자랐다. 첫 월급이 나오기 전, 나보다 조금 여유가 있던 친구에게 10만 원을 꾸어 생활했다. 세 달뒤, 언니가 대전에서 올라와 나는 또 이사를 했다. 친구는 부모님의 도움으로 아현동 언덕에 작은 원룸으로 이사를 했다.
언니와는 얼마간 지내다가 직장을 따라 다시 기숙사로 들어갔다. 분당에 있는 으리으리한 복층 오피스텔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복층의 윗부분만을 사용했다. 기숙사라기보다는 창고에 가까웠고 아래층에는 레스토랑의 매니저로 일하는 다른 사람이 성벽처럼 쌓아둔 철제 캐비닛 뒤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3년, 일산에서의 5개월, 기숙사 생활은 이제 이골이 났지만 나는 돈을 모을 작정으로 다시 기숙사 행을 택했다. 아무의 도움 없이 도시로 온 젊은이들에게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나와 달리 4지선다형 인생을 사는, 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적인 지지를 받는 보통의 젊은이들이 내 주변에는 많이 있었다. 그들의 소식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게로 날아왔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전셋집을 구해 도시생활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조금 더 심층적인 공부를 위해 취업 대신 외국의 요리학교로 떠났다는 누군가의 소식이 스물세 살의 내 근간을 흔들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신문에 난 프랑스 요리학교 모집공고를 가위로 오려 지갑에 넣고 다녔지만 그건 그냥 내게 신기루 같은 존재일 뿐, 차마 거기에 가고 싶다고는 내 입으로 내뱉을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학비를 자랑하는 그곳으로 내가 아는 평범한 사람들이 떠났기 때문이었다.
분당에서의 생활은 다른 동네의 그것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동네의 특성상 젊은 손님들이 외제차를 타고 브런치를 먹으러 모여들었다.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러 오는 아르바이트생도 부모님의 e클래스를 운전해 출근을 했고, 레스토랑의 주인은 서른다섯도 되지 않는 젊은 여자였다. 도시의 경제력은 시골의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나는 그곳에서 번 돈으로 서울에 월세방을 구할 계획을 세우고 하루에 13시간의 노동을 했다. 젊음과 건강을 갈아 넣으면 돈이 생겼다. 마음이 점점 저 밑바닥까지 떨어졌지만 통장에는 돈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으니 괜찮았다. 일주일에 한 번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에 가서 친구를 만나면 술을 많이 많이 마셨다. 밤새 술을 마시고 첫차를 타고 분당으로 돌아와 잠을 자면 하루가 다 갔다.
대단한 재주가 없이 몸을 갈아 하는 노동은 그 끝이 모호했다. 부자가 될 수는 없었고, 성실한 사람은 될 수 있는 것 같았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세상은 끝이 났고, 드라마틱한 신분 상승이나 재산 변화는 내게 일어날 리 만무해 보였다. 2평도 되지 않는 좁은 주방에서 한 그릇에 2만 원이 넘는 파스타를 만들어 쉴 새 없이 내보냈다. 출근 길에는 아래로 탄천이 흐르는 다리에 들러 검정치마의 노래를 들었다. 우중충한 표정으로 검정치마의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더욱 아래로만 곤두박질쳤다. 뛰어내려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높이였기에 뛰어내릴 용기를 낼 수 없었다. 노래 한곡을 다 듣고 나면 어그적 어그적 레스토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에도 누군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알량한 희망이 있었다. 서른 언저리가 되면 경희와 함께 살 수 있는 작은 전셋집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할 수 있었다.
검정치마 - 난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