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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Jul 06. 2021

인간과 함께 할 자격을 얻은 동물, 그렇지 못한 동물

“나는 대상을 좋아해서 행한 표현이, 저 대상에게도 동일하게(좋게) 작용할까?”



모든 권력관계에서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질문을 틀림없이 공유하지 않을까.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삐뚤어진 사랑이나, 성비위에 대한 인지가 결여된 남성권력층이 내뱉는 ‘호감표시’ 등은 앞의 질문에 대한 무지에 기인한다. 나는 이것을 인간 집단 내의 문제에서 좀 더 나아가, 동물과 인간의 관계까지 확장시키고자 한다. 일각에서, 동물권 운동을 단순히 보살피고 보호하는 것만이 아닌 ‘권력관계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정치적 성격이라 주장하는 건 이 지점을 가리키지 않을까.



나도 분명 고양이를 좋아하고 강아지를 좋아하지만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꺼린다. 나의 머뭇거림을 목도한 주변의 사람들은 동물을 무서워하거나 알러지가 있냐며 물어보기도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쟤들이 귀찮을까 봐’라는 말을 삼킨 채 입을 다물고 있다. 나와 달리 선뜻 다가가 그들을 어루만지는 누군가에게 날 선 비판의식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행하기에는 무언가의 불쾌가 가로막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못한다. 가끔은 내가 너무 급진적인가 싶어 그런 관점을 삐뚤지 않게 고쳐보려 하지만, 귀여운 동물이 우리의 공간에 포착되는 순간 너도나도 달려가 둘러싸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동물에 이입된 압박감에 당장에라도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분명 어딘가 잘못되었다.



“말이나 고양이, 황소, 심지어 당나귀조차 집에 있을 때 대체로 키가 크고 체격이 좋고 기운차며 힘도 세고 용맹스럽다. 그러나 가축이 되면 이러한 장점의 절반은 잃고 만다. 그리고 이 동물들을 소중히 돌보며 키우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오히려 그들을 퇴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나오는 인상 깊은 구절이다. 자연에서 힘들게 먹잇감을 사냥하는 들개보다 가만히 자고 있으면 코 앞에 고급 사료가 놓이는 부잣집 개가 더 나은 삶이라 할 수 있을까. 당장 내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으니 된 일인가. 현재의 구조에서 내가 반려동물에게 최선의 노력으로 사랑을 준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불평등과 애완산업의 양극화는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다. 결국 가축, 애완동물, 반려동물까지 흘러온 데에는 인간의 선택과 판단만이 존재했다. ‘반려동물’하면 떠오르는 동물의 범위도 인간이 선택했다. 인간과 함께 할 자격을 얻지 못한 다른 동물들은 동물원에 갇혀있다. 나는 미래에 동물의 의사표현을 통역할 수 있게 되어, 옆집 개가 ‘항상 내가 꼬리 흔드니까 만만해 보이냐’고 반항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도봉산을 오르다 만난 고양이. 자연 속에서 편안한 낮잠을 청하고 있다. 


강아지가 너무 귀여워서 만져봐도 되는지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 조심스레 만지는 행위를 볼 때면, 애완동물은 주인의 소유물이라는 확신이 든다. 부모 품에 안긴 아이가 너무 귀여워 몇 살이냐 묻자, 말을 못 하는 아이 대신 부모가 답하고, 결국 아이는 가만히 있는데 어른들이 몰입해 질의응답을 주고받는 그런 상황. 각각의 상황에서 아이와 동물은 표현 능력이 부재한 이유로 주체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철저히 권력관계의 우위인 성인과 인간에 의해서 의사가 결정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반려동물의 ‘주인’이란 표현부터 이상하다. 법률에서 부모가 아이의 보호자이자 대리인인 것처럼, 반려동물의 ‘주인’도 더 이상 주인이 아닌 ‘대리인’의 자격으로 불릴 수 있을까. 혹은 좀 더 근사하게 ‘권한대행’이 어떨까. 바둑이 권한대행.



아무리 바람직한 길을 걷고 싶은 나로서도 육식은 차마 아직 내려놓지 못했다. 최근 들어 대학교 학식이나 각 프랜차이즈 등 우리 주변에 가까이 채식주의자를 위한 채식 공급이 늘어났다. 그런 식으로, 내가 혼자 공부를 하고 신경을 쓰며 지출하는 에너지 비용이 확실히 줄어들면 충분히 선택할 용의가 있다.



<서울신문>, 2019.11.12.

2019년 겨울,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생해 돼지고기 소비가 크게 줄어들었다. 양돈농가가 타격을 입게 되자, 그들을 지역구로 두고 있는 정치계에서도 움직였다.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이 ‘돼지탈 모자’를 쓰고 아프리카돼지열병때문에 고통받는 ‘양돈 농가’를 돕자는 ‘2019 국회 우리 한돈 사랑 캠페인’에 참석했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본인이 돼지를 닮았다며 “동족을 살려달라”한다. '돼지를 살리자'와 '돼지고기 소비 촉진'. <동물보호법>의 담당 기관이 농림축산식품부인 한국 사회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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