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갓 데뷔했으니 인지도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그들은 커피와 씨름하면서 고군분투했다. 손님인 척 연기하는 몰래카메라 연기자들의 진상 연기를 통해 위기상황에도 놓였다.(역시 이런 맛에 이 음악 방송국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어디서 어떻게 소년들을 골탕먹여 시청자들이 발 동동 구르며 재밌어할지 아는 이 기막힌 편집점!) 기껏 연습한 생크림 빵은 다 무너지고 휘핑은 제멋대로 이리저리 튀어버리고. 손님 컴플레인에 카메라 돌아가는 방송이란 것도 잊고 쩔쩔 진땀 빼는 멤버들.
방금 전 진상 손님이 몰카라는 게 밝혀지자 상기된 얼굴로 결국 왕 울음을 터트려버리는 막내.(해맑고 사랑받는 것에 갈증 많은 천진한 막래라니! 이 그룹이 흥할 수밖에 없다고 희재가 확신하게 된 순간!) 의젓하게 모두를 챙기는 리더. 재기발랄 아이디어 넘치는 까불이 둘째. 묵묵히 싱크대 앞을 떠나지 않고 성실한 셋째. 몰카인데도 생글거리며 손님 달래려고 애교 시전하는 넷째. 요령 없지만 하는 행동 모든 게 귀여운 막내. 다섯의 캐릭터를 잘도 부각해주는 신인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그들을 알리겠다고, 커피를 더 팔아보겠다고 발바닥에 불나도록 장사하는 텐빌스.
그날그날의 판매 커피잔만큼 시간을 환산해 그룹을 홍보할 수 있는 막간의 홍보 시간도 준다. 그럼 또 애들은 열심히 외우고 습득한 본인 그룹 정체성과 회사에서 만들어준 본인 캐릭터 매력을 피력했다.
“백 마디 말보다, 그냥 춤을 보여드릴까요?”
찰나에도 기지를 발휘하는 둘째는 말보다 몸으로 표현했다. 리더가 꿋꿋이 준비된 대본을 읊으면 둘째와 넷째는 뛰쳐나가 돌발상황을 연출하며 춤을 췄다. “우리도 나가자.” 준비한 대본을 다 말하고 나서야 리더가 말하면 그제야 셋째도 움직였다. 다섯명 그룹에서 첫째는 리더 둘째는 통통 튀는 재간둥이, 넷째는 흑화한 세침때기 애교쟁이, 다섯째는 사랑스러운 막내 도련님. 제일 어정쩡한 건 아무리 봐도 셋째였다. 말수도 적고 둘째 넷째처럼 애교에 특화된 것도 아니요, 첫째처럼 회사가 의젓함의 롤을 쥐어준 것도 아니고,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신비주의 컨셉인가 싶게 존재감이 없었다. 자꾸 앵글 귀퉁이에만 사부작대는 모습이 잡혀 희재는 점점 티비 끝에만 집중하게 됐다. 정중앙이 아니라 끄트머리에만 잡히는 애가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간신히 셋째가 나오는 분량마저도 ‘아직도 설거지 중’, ‘라떼 하나 만들고나면 매번 스팀기 닦는 꼼꼼함’, ‘그릇 배열 흐트러진 걸 못 봐서 또 정리 중’ 이런 자막으로 겨우 등장했다.
넷째와 다섯째는 청소 담당임에도 홀을 돌아다니며 커피 맛있으세요? 드실만 하세요? 곰살맞게 물었다. 둘째는 계산을 맡아 손님들과 만담을 나눴다. 나중에 텐빌스가 세계적인 그룹이 되고 우연히 만나면 오늘 만난 인연을 얘기해달라는 넉살까지 부렸다. 우직한 첫째는 밖에 나가 전단지 돌리는 걸 맡아 야외 분량이 독차지였다. 셋째만 싱크대 붙박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결국 그들은 안타깝게도 가장 작은 규모로 정해진 한강 야외 공연을 하게 됐다. 카페 운영 마지막 날 폭우가 내려 파리가 날린 탓이었다. 그들은 상심하지 않고 야외라 오가는 사람들에게도 텐빌스를 보여줄 소중한 기회를 잡은 거라고 서로를 위로했다.
5화에선 카페 영업을 모두 종료한 그들이 피디의 깜짝 선물로 방송국 옥상으로 향했다. 아이돌 예능에서 빠질 수 없는 캠프파이어가 연출됐다. 아롱아롱 켜진 촛불 앞에 앉은 멤버들 표정도 감상에 젖었다.
“해보니까 어땠어? 장난 아니었지? 우리 진짜 카페 차려도 될 것 같더라. 다들 너무 고생했어.”
고작 스물한 살 리더의 독려에 열여덟 막내는 벌써 울먹였다.
“걱정 많이 했는데 우리가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너무 좋아요.”
막내 말에 열아홉 넷째가 그의 어깨를 폭 감싸줬다. 깊어지는 우정을 보는 것만큼 재미있는 게 있을까. 희재는 점점 더, 더, 더 티비 앞으로 이동했다.
“제가 첫날 생크림 베이글 서빙 나가다가 미끄러졌잖아요. 접시 깨졌는데 연오형이 다 수습해주고….”
씩씩하고 싹싹한 넷째가 훌훌 타는 불빛을 보며 말하다 이내 목소리 끝이 호롱불처럼 떨렸다.
“팬분들도 많이 만나야되는데, 막 더 팔아야 하는데, 그 생각 하다가, 마음이 자꾸만 급해져서….”
결국 넷째 눈이 촉촉해졌다. 형 울어요? 막내가 넷째 얼굴을 고개 숙여 살펴보는 그때 넷째에게서 다이아몬드같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 기어이 막내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시청률 올라가는 소리가 타닥타닥 타는 불씨처럼 여기까지 들렸다.
“야야 너네 왜 울어! 왜 우냐 갑자기!”
둘째 희찬이 손을 휘저었다. 전단지 돌리자고 의견 내고 손님들에게 ‘텐빌스’를 가장 열심히 알리던 희찬 눈매도 점차 붉어졌다. 닷새 카페 운영보다는 지금까지 고단한 연습생 생활을 견디고 데뷔한 감회가 북받쳐오른 듯했다.
“우리 앞으로도 힘든 일이 더 많을 거야. 지금보다 더 많을 거야. 아마 지금까지 일은 아무것도 아닐 거야. 그래도 우리 오늘 이 마음 잊지 말고 힘든 건 서로 도와가면서 힘내보자.”
리더가 의젓하게 말했다. 희찬이 형까지 왜 그러냐며 질색했다. 넷째와 막내는 거의 꺽꺽대며 울었다.
“우리가 진짜 데뷔를 했어요. 제가 형들이랑. 그게 믿기지가 않아요.”
막내의 소감에 리더도 결국 눈시울이 붉어졌다. 희찬도 소매로 눈매를 꾹꾹 찍어냈다.
“우리 회사 옥상에서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이 방송국 옥상이 보이잖아. 회사에서 연습 끝내고 옥상 가서 이 방송국 내려다보면서, 우리가 데뷔해서 저기 가볼 수 있을까 항상 얘기했었는데, 진짜 데뷔해서 같이 여기에 있네. 감회가 너무 새롭고 그래. 진짜 우리가 꿈을 이뤘네.”
반짝이는 눈망울의 리더 말에 희찬도 고갤 푹 숙였다. 막내와 넷째는 옥상이 떠나가라 오열했다. 셋째만 멀끔했다. 셋째는 그저 예쁘게 아롱거리는 캠프파이어 불길을 바라봤다. 희재는 꿈을 이룬 직후의 반짝이는 친구들을 보자 덩달아 눈가가 붉어졌다. 저 기분을 느끼고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우리 차연오만 안 울어서 카메라 잘 받겠다!”
희찬의 말에 셋째, 연오가 멋쩍게 웃었다.
“좋은 날 다들 왜 울어. 우리 이제 시작이잖아.”
지금까지 미비한 존재감과 분량을 날리는 셋째 연오의 담백하고 결연한 한방 있는 말투.
물론 아이돌에게 우는 것은 미덕이자 필수 요소라 할 수 있겠으나 연오게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빛난 순간이었다. 어딘가 깊은 사연 있어 보이는 촛불 쳐다보던 동갑내기 스무살 연오 눈빛이 뇌리에 남았다. 예능 내내 연오가 말하는 모습은 거의 안 나와서 이 모습이 귀했다. 말투가 저렇게나 느렸구나 이제야 알게 됐다.
“연오형은 진짜 멋있어요. 강하고. 진짜 안 울고. 저 연오형 우는 거 한번도 본 적 없어요.”
얼굴 전체가 뻘개질 정도로 운 막내 말에, 연오가 손을 들어 머리칼을 정리해줬다.
“아직은 아니야.”
뭐가 ‘아직’이라는 건지 갓 데뷔해 푸르댕댕 싱싱한 연오 꿈이 궁금했다. 연습생 꿈이라면 데뷔가 끝일텐데 이걸 ‘아직’이라고 표현할 만큼 대단하게 바라고 있을 미래가 궁금했다. 글 쓰려다 포기한 희재에겐 없는 악바리 근성이 그에겐 있는 게 분명했다. 사실 연습생이 데뷔하면 다 이뤘다고 착각하기 쉬웠다. 연습생의 인생 목표는 데뷔이지 않나. 모든 수험생 목표가 대학입학인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날 연오는 대입과 데뷔가 아직 고작 <관문을 넘은 하나의 시작>이라는 걸 아는 눈이었다. 고작 스물 주제에 어떻게 그걸 깨우칠 수 있었을까? 모두가 데뷔 대입만 세뇌시키는 세상에서 어떻게 저렇게 먼 곳을 쳐다볼 수 있을까. 신기했다. 신비로움은 궁금증으로 호기심으로 더 알고 싶어 시선이 가는 마음으로 피어올랐다. 새벽 네시 반, 5화가 끝나갈 무렵엔 쿠션을 껴안고 전자파가 느껴지는 티비 코앞에 앉아 차연오 이름을 입 속에 굴려 발음 중이었다. 5화 엔딩크레딧 자막이 올라갔다.
12월 27일 오후 2시 반포 한강공원에서 열리는 텐빌스의 첫 팬미팅 공연을 보러와주세요!
희재는 핸드폰 액정을 눌렀다. 액정은 오늘이 12월 27일 새벽 4시 38분임을 알렸다. 몇 시간 뒤 날이 밝으면 공연이 열리는 거였다. 하필 공연 직전에 기적처럼 우연에 이끌려 이 방송을 본 거였다. 텔레파시가 초대장을 보낸 거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개 가슴이 벅차올라 이성보다 감정이 앞설 땐
이런 상황을 운명이라고 착각하고 싶어지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