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재는 바로 추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메신저로 텐빌스 데뷔 타이틀곡 뮤직비디오 링크도 함께 보냈다. 동트기 직전 늦은 새벽이었지만 추자에게서는 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24시간 언제든 전화를 걸면 화답하는 추자가 진심으로 좋았다.
“얘네 뭐냐? 되게 귀엽네? 너무 귀여워서 밤 새 마신 술이 홀딱 깨네.”
“추자야 얼른 자고 일어나서 우리 얘네 보러가자. 아니 보러 가야돼.”
불도 켜지 않은 컴컴한 거실에서 새벽 내내 본 티비 속에서, 갓 알에서 부화해 나온 것처럼 모든 게 낯설고 서툴고 어색하지만 잘해보겠다고 용쓰는 그 애가 있었다. 데미안의 한 구절처럼. 희재는 또 알을 깼다.
차연오.
같은 반에 있으면 외우는데 일주일 넘게 걸렸을 그 이름이 걔 이름이라고 하니 지구에서 가장 특별해보이는 기적이 일어났다. 미팅에 수십 번 나가도 빠지지 않았던 사랑이, 역시나 텔레비전 모니터 앞에서는 퐁당 잘도 빠졌다. 세계의 알에 금이 쩍 가는 소리가 났다. 사랑. 희재 사랑은 늘 TV 모니터의 은은한 전자파 열감 앞에서만 부화했다.
추자와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지난밤 내린 눈 여파로 길은 질척이고 미끄러웠다. 시청률 0.1%도 안 나오는 텐빌스 데뷔 예능 프로그램으로 한강공원을 찾은 팬들은 별로 없었다. 추자와 희재는 나란히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무대 주변을 서성였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인파가 드물었다. 기획사가 신생이라 선배 그룹을 좋아하다 텐빌스를 좋아해 주는 대물림 팬들도 없었다.
설치해둔 작은 무대 단상 위로 두시가 조금 넘자 텐빌스가 나타났다. 무대의상이 하필이면 신인의 진리와도 같은 교복이라 무척 추워 보였다. 한파에 덜덜 떠는 기색도 없이 마이크 든 텐빌스는 ‘여러분의 악동이 되고 싶은 텐빌스입니다!’ 인사했다. 어쩌다보니 두 사람은 맨 첫 번째 열, 멤버들 바로 앞이라 이목구비가 속속들이 보였다. 6화 녹화도 진행하는지 카메라 몇 대도 계속 돌아갔다. 텐빌스는 모인 팬들이 신기한지 여기저기 허리 숙여 인사하고 손을 흔드느라 바빴다. 바로 데뷔앨범 타이틀곡과 수록곡 두곡을 연달아 선보였다. 수 만번 연습했을 춤과 노래 부르는 그들은 관객 수와 상관없이 행복해 보였다.
“쟤 진짜 귀엽다.” 추자는 희찬에게
“쟤 진짜 멋있네.” 희재는 연오에게
이번에도 같은 그룹에 사랑에 빠졌다. 어김없이 다른 멤버에게.
희찬은 반듯하고 곱상하게 생겨 까불까불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매력을 풍겼다. 연오는 잔뜩 찢어진 눈매에 날력한 턱선 때문에 날카롭고 예민해보이는데 고분고분 순하게 말했다. 극명한 취향 차이였다.
“이 추위에도 텐빌스 보러 와주신 관객 분들에게 인사 한 번씩 해볼까요!”
베테랑 엠씨가 사회를 보기 위해 무대로 올라와 말했다. 얼마나 추운지 마이크 잡은 손등이 뻘겋게 부르튼 게 객석의 희재에게도 다 보였다.
“팬분들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오늘 너무 감사합니다.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이렇게 추운데도 저희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좋은 음악으로 오래오래 같이 걸을게요.”
앞선 네명의 멤버는 엄마 아빠 삼촌 할머니 고모 이모 총출동해서 울먹울먹하는데 연오만 울지 않고 덤덤하게 팬들에게 이야기했다. 아직 팬덤명도 없던 시절이었다.
“어제 눈도 오고 이렇게 추운데 와주셔서 감사해요. 우리 꼭 같이 꿈 이뤄요.”
마지막으로 연오가 소감을 전하던 순간 분명 눈이 마주쳤다. 그런 착각이야 공연을 가면 누구나 하는 것이지만 희재는 확신했다. 아메리카노 들고 몇 시간 잠도 못 자고 푸석한 꼴로 후드를 뒤집어쓰고 온 저를 분명히 쳐다보며 연오가 말했다. 희재 인생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꿈>을 함께 이뤄보자고.
“봤냐? 방금 쟤가 나 보면서 말한 거?” 희재가 추자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추자는 희재와는 전혀 다른 사이드를 쳐다보며 넋이 나갔다.
“쟤는 자꾸 나만 보는데.” 추자 시선이 닿은 곳은 연오와 정 반대 오른쪽에 선 희찬 쪽이었다.
무대를 모두 마치고 올해 케이팝 대상을 휩쓴 선배들의 커버무대까지 마치고 텐빌스는 내려갔다. 감사합니다, 추운데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음에도 저희 꼭 보러 와주세요, 저희 정말 잘 할게요, 또 만나요 꼭! 멤버들은 내려오라는 스탭 말에도 연신 무대 위를 떠나지 못하고 인사하고 또 인사했다.
한강변에서의 그날. 희재는 새하얗게 눈으로 물든 세상에서 아직 안 온 연오의 미래를 제 손으로 만들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의지가 생기는 순간 팬과 아이돌 사이에도 어떤 씨앗 하나가 자란다. 세상에는 그 감정을 통칭할 마땅한 단어가 없다. 기껏해야 사랑 정도. 미팅 소개팅에서 발화하는 그것과 같은 단어. 이 감정이 고작 사랑으로 말할 수 있는 걸까. 사랑 미달인지 사랑 이상인지 희재는 분간할 정신도 없었다.
두 사람은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고 각자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희재는 차연오를 추자는 주희찬을 검색 중이었다. 차연오. 그 얼굴을 보는 내내 쓰고 싶은 글들이 한참 쉰 휴화산 터지듯 콸콸 용암으로 뿜어 나왔다. 프로스타스 해체 이후로 멈췄던 창작의 마그마가 다시 분출을 시작했다. 분명히 날티가 폴폴 나게 생긴 얼굴에, 학교는 창문으로 넘어다닐 것 같이 생긴 앤데 느리고 단정한 말투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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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입덕했다.”
추자와 희재는 그날 공찬이 사는 옥탑방으로 왔다. 추자와 희재는 대학도 물리적으로 가까웠다. 공찬은 S대 정문에서 가까운 낡은 옥탑방에서 자취했다. 지대가 워낙 높아 전경만 보면 어느 타워 부럽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이곳은 추자 희재 공찬의 아지트가 됐다. 추자는 처음 만난 날부터 공찬과 친해졌다. 세 사람은 평상에서 가끔 고기도 구워 먹었고 맥주와 스크류바를 함께 먹으면 꽤나 맛있다는 것도 배워갔다.
“누군데?” 공찬이 예의상 한마디를 물었을 뿐이었다.
“생긴 건 볼따구에 당장 데일밴드 붙여야 될 정도로 날라리같이 생겼는데 하는 짓은 물만두같아!”
공찬 물음에 희재는 평상 앞에서 펄쩍 뛰며 랩퍼처럼 텐빌스에 대해 쏟아냈다. 우연찮게 텔레비전 있는 집으로 가서 예능을 보게 된 것, 하필이면 오늘 게릴라 공연 날이었던 것, 맨 앞줄에서 연오와 눈을 마주친 것, 메인댄서라 춤을 너무 잘 춰서 싹수가 보이는 연오의 춤선, 그런데도 공허해보이는 눈동자는 어딘지 모르게 처연하다는 것까지….
추자는 희재가 어쩌다 공찬과 친해진 덕에 공찬의 신수가 피곤해졌다고 생각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평상 앞에서 신나서 고작 입덕한지 몇 시간 안 된 텐빌스에 대해 설파하는 희재는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텐빌스를 보고 온지 두시간도 안 된 따끈따끈한 감상 후기는 멈출 줄 몰랐다. 추자도 저토록 흥분한 희재를 말리는 법은 몰랐다. 공찬이 방에서 뜨거운 코코아 세 잔을 타와 나눠 마시는 것으로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공찬은 언제나 좋은 관객이었다. 희재가 핸드폰으로 찍어온 텐빌스 동영상을 보여줘도 고분고분 봐줬고, 심지어 저 멤버는 누구냐며 이름도 물어봐줬고(그 멤버는 막내였는데, 희재는 그 막내가 어제 보고 온 예능 프로그램에서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또 침 튀어가며 열변을 토했다.) 방금 부른 노래는 텐빌스의 타이틀 곡이냐고도 물어봐줬다.(그럼 희재는 이 데뷔곡의 뮤직비디오 2절 벌스 군무가 기가 막히다면서 자연스럽게 유튜브를 켜고 뮤비를 틀었다.)
“네가 이러니까 고희재가 자꾸 신나는 거야. 하여간 되게 열심히 들어줘요.”
드디어 희재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둘둘 만 목도리를 풀어 평상 위에 올려두는 추자가 말했다. 희재도 주희찬에게 입덕하고 와서 흥분한 상태였지만 희재처럼 얼마나 마음 속 사랑이 크고 위대한지 열변 토하는 성격은 못됐다. 공찬이 웃으면서 다 먹은 세 사람의 코코아 머그잔을 평상 귀퉁이로 밀었다.
“근데 진짜네.” 공찬의 감탄사에 추자가 눈썹을 올려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진짜로 작은 기획사에서 데뷔한 그룹이고, 같은 그룹인데 너희 둘이 좋아하는 멤버가 안 겹쳐.”
그게 무슨 쉰소리냐고 추자가 다시금 눈으로 물었다.
“희재가 저번에 그랬거든. 절대로 대형기획사 아이돌이면 안 되고, 너랑은 같은 그룹을 좋아해도 절대로 최애 멤버는 안 겹친다고.” 그 말에 추자가 파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고희재나 나나 너무 완벽한 건 좀 별로거든. 어딘가 좀 부족하고 모자란 구석을 노력과 열정으로 채우려고 하는 친구들을 좋아해.”
“뭐야 그 마음은?”
“머글이 어떻게 오타쿠의 깊은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알려고 하면 다치세요.”
추자는 하품하며 엄청나게 뜨거운 거나 시켜 먹자고 했다. 공찬이 학교 앞 새로 오픈한 중국집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평상에서 마지막으로 돌아본 저 아래 세상은 어제 내린 눈으로 덮여 새하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