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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춤 에테르 13화

by 모정연 Mar 19. 2025

퇴근한 희재가 회사 앞 카페로 달려갔다. 공찬이 서울로 돌아와 회사 앞 카페에서 기다린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카페까지 가까운 거리를 뛰어오느라 숨이 턱끝까지 찰 지경이었다.

 

“누가 말도 없이 서울 오래?”

“잘 지냈어 희재야?”

“너 왜 이렇게 탔어? 백설기가 완전히 흑설기가 됐네?”

 

공찬은 영하 십도의 날씨인데도 얇은 모직 코트 차림이었다. 공찬도 도착한지 얼마 안 됐는지 뺨과 코가 새빨갰다. 빨개진 피부에도 까맣게 그을려 탄 것은 숨길 수 없었다.

 

“나랑 추자랑 어련히 알아서 마중 나갈 텐데 뭐하러 말도 안 하고 혼자 왔어?”

혼자 공항에서 돌아온 게 마음 쓰여 희재가 미간에 잔뜩 힘을 줬다.



“내가 뭐 외국 갔다 온 것도 아니고. 그래도 올라오자마자 너희 보려고.”

“추자한테도 연락했어?”

“오늘 야근한다고 바쁘대서. 일단 여기로 왔지.”

“걔 요새 너무 야근해. 지난주에는 응급실 가서 수액까지 맞았어. 그나저나 잘 지냈어? 살은 좀 빠진 거 같은데? 아버님이 잔소리 많이 하셨어? 취업도 안 하고 방에서 뭐하냐고? 그럴 땐 나 바꿔달라니까! 아버님 아들이 지금 스티브잡스가 되기 일보직전입니다! 내가 말씀드리면 되는데!”



희재는 공찬의 얼굴 이모저모를 뜯어보느라 여념 없었다. 와중에 목도리를 둘둘 푸느라 긴 머리칼과 정전기가 나며 탁탁 소리를 냈다. 공찬이 웃으며 머리카락 들러붙어 정신 없는 목도리 정리를 도와줬다.



“음료는 내가 먼저 시켜놨는데, 시간 늦었으니까 커피 말고 차로 마셔.”

 

공찬은 흥분한 희재 달래기에는 도가 튼 사람처럼 굴었다. 머그잔을 건네자 그제야 티백을 만지작대며 희재가 가라앉았다.

 

“희재야 핸드폰 줘봐.”

 

카페까지 뛰어오느라 소지품들이 정신없이 뒤섞인 가방 안으로 희재가 손을 불쑥 넣었다. 부산한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건네자, 공찬이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희재도 묘하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상공찬, 왜, 뭐하는데.”

 

희재 핸드폰으로 뭔가를 만지작대던 공찬이 이내 다시 건넸다. 사실은 핸드폰을 꺼내라고 할 때부터 이상하게 목구멍에서 심장이 뛰는 기분이었다. 희재의 심장은 가끔씩 본인에게 일어날 거국적인 이벤트를 목전에 앞두고 활어가 되곤 했는데, 꼭 아주 오래 전 음악방송에서 텐빌스의 데뷔 리얼리티를 보던 그날 밤 같은 기분이었다.



어두운 우드톤 테이블 위, 희재의 핸드폰 환한 액정이 낯선 UI로 빛났다.

 

“우리 어플 첫 베타테스터는 너여야지.”

 

그제야 두 손으로 희재가 입을 틀어막았다.



한 달만에 제주도에서 돌아온 공찬이 드디어 일을 냈나보다.



<춤춤 에테르>

아직 정식으로 출시되지 않은 어느 어플리케이션 하나가 희재 핸드폰 안에서 반짝였다.

춤춤과 에테르가 한곳에 드디어 묶였다. 희재와 공찬이 언제나 먼 허상의 이야기처럼 하던 것들이 결집됐다.

 

에테르는 음을 전하는 매개 물질로 공기가 있듯 전자파를 전하는 매개 물질로 진공의 우주 공간에 가득차있다고 생각되었던 가상의 물질입니다.

 

‘춤춤 에테르’는 이곳에서 우정을 전달하는 가상의 전파 물질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첫 화면에는 우주 여행을 연상시키는 천체 사진들과 춤춤 에테르를 만든 청년의 인사말이 롤링됐다.

  

지금은 베타테스터 기간으로 3주 동안 단 한 명의 친구를 임의로 만날 수 있어요.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춤춤 에테르를 만나러, 첫 번째 비행을 떠나볼까요?

 

너무 놀라면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



“어머 공찬아, 너 진짜 오랜만이다! 제주도 내려갔다더니 이제 온 거야?”



희재와 공찬이 분식집으로 들어오자 이모가 두 팔 벌리고 반겼다. 희재분식. 이모네 분식집이지만 간판엔 희재 이름이 박혔다. 공찬이 제주도에서 사왔다며 온갖 잼들이 든 봉지를 건네자 이모는 장갑을 벗으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홉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라 분식집에 손님은 없었다. 희재가 출입문 바로 옆이자 주방과 마주보는 자리에 가방을 내려놨다. 익숙하게 싱크대로 들어가 손을 씻었다. 공찬은 잘 지내셨냐는 인사와 함께 이모가 너무 보고싶었다는 립서비스까지 능숙했다. 이모는 수제 잼은 처음 받아본다며 공찬의 선물에 잔뜩 들떴다. 꽤 불어버린 떡볶이를 접시에 담는 희재가 어묵 육수도 조금 더 부으려는 찰나 유리문이 열리며 추자가 들어왔다.



“추자야! 우리 공찬이 얼굴 탄 것 좀 봐! 뽀얀 백설기가 무슨 흑설기가 됐어!”

“이모도 꼭 희재랑 똑같이 말씀하시네요.”



공찬이 웃음으로 이모의 농담을 받았다.



이모의 말에 희재는 들어오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이모, 여기 공찬이네 분식으로 간판 갈아야하는 거 아니에요? 추자는 피곤한 얼굴로 의자에 기절하듯 앉았다.



“이모 저 너무 배고픈데, 우동 먹고 싶어요.”



명치를 쓰는 추자의 말에 그제야 이모는 잼들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정신없이 부엌으로 돌아갔다. 식탁에 앉아있어도 뻥 뚫린 주방이 훤히 보였다.



장갑을 낀 이모는 자연스럽게 부엌에서 얼쩡대는 희재를 밖으로 밀어냈다. 희재가 흘린 떡볶이 소스부터 차분히 닦은 이모는 우동을 끓일 냄비에 빠르게 물을 받았다. 모든 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희재도 조용히 친구들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희재가 퍼온 떡볶이는 추자가 제일 먼저 먹었다. 이 시간까지 저녁도 못 먹고 일한 게 분명한 추자 앞쪽으로 희재가 떡볶이 그릇을 좀 더 밀어줬다. 추자는 먹으면서도 내내 핸드폰으로 업무 연락들을 쳐냈다.



“추자 없으면 회사 안 돌아 가나봐. 좀 먹고 해.” 공찬이 걱정스레 말했지만 추자는 포크를 내려놓고 이내 양손으로 핸드폰을 잡았다.

“직장인의 삶이란. 이렇게 빡세다.”



이모는 금방 추자에게 뜨끈한 우동 한 그릇을 내왔다.



“감사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쑥갓 많이도 넣어주셨네.” 여전히 왼손엔 핸드폰을 들고 오른손에 젓가락 든 추자가 빠르게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니네도 뭐 좀 더 줄까? 공찬이는 저녁 안 먹어도 돼?” 이모가 옆에 서서 물었다. 공찬은 얼른 일어나 뒷 테이블에서 의자를 끌고와 이모가 앉을 수 있게 자리를 만들었다.

“그냥 앉아서 같이 얘기해요. 저랑 희재는 배 안 고파요.”

“공찬아, 부모님이 잔소리는 안 하셨어? 취업해라 뭐해라 그런 말씀.”

“와 이모! 이모가 방금 그렇게 말하는 게 성공찬한테 엄청난 잔소리였어! 취준생 나이인 사람한테 그런 말은 법적으로 금지해야돼.”



희재가 방어하며 이모와 공찬 사이에 손을 휘저었다.



“이모 그리고 얘 제주도에서 놀다 온 거 아니야. 얘는 한다면 하는 놈이야. 한 방 있는 놈이야.”



의미심장한 희재 말에 추자까지 고개를 힐끗 들었다. 여전히 왼손에 든 핸드폰 액정은 불이 날 지경으로 번쩍였다.



“내려가서 아버지 서점 일 도와드린다는 거 아니었니?”

“그냥 뭐, 좀 했어요.” 공찬이 쑥스러운지 얼버무렸다. 그 귓불 끝이 붉어지는 것에 희재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모 내가 말했지. 사람은 제목대로 된다고. 성공찬은 진짜 성공할 거야.”

“제목 아니고 이름.”



추자의 정정에도 희재는 뻔뻔했다.



“왜 뭔데. 공찬이 제주도 내려가서 무슨 일 하고 온 건데. 이모도 좀 알면 안 돼?” 이모의 물음에도 희재는 그런 게 있다며 일어나 떡볶이를 더 퍼왔다.



“서울에는 영영 온 거야?”

이모 질문에 공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주 와. 배고플 때마다 와. 너희 다. 추자랑 희재 취업하고 너희 다 영 뜸해져서 이모 서운해 요즘.”

“넵. 더 자주 오겠습니다. 근데 이모 오늘 우동 국물이 진짜 끝내준다.”



면은 다 골라 먹은 추자가 숟가락으로 국물을 집중 공략했다.



“잘됐다. 아까 점심에 먹으려고 장아찌 챙겨온 거 있는데, 공찬이 너 그거 좀 가져가. 혼자 서울 왔다고 또 아무거나 사먹고 그러지 말고. 배달 음식이 몸에 얼마나 안 좋은지 알지?”



이모가 드디어 잔소리를 시작했다. 공찬이 따라 일어서 괜찮다고 말리는데도 끄떡없었다. 이모는 냉장고를 열어 장아찌 담아줄 새 반찬통을 찾기 시작했다. 숟가락을 입에 문 추자는 핸드폰으로 오는 연락들에 답하는 중이었다. 이모는 하얀색의 빳빳한 쇼핑봉투에 반찬통들을 담기 시작했다.



“추자랑 희재는 엄마 밥 먹고 사는 애들인데 공찬이는 서울에서 혼자 있잖아. 반찬 떨어지면 언제든 오구. 맨날 비리비리한 거 밖에서 사 먹고 돌아다니지 말고. 이제 진짜 취직해야지 공찬이두.”



“이모 성공찬은 회사에 속하기엔 아까운 놈이라니깐!”

희재의 칼같은 방어와 동시에 밤에도 회사에서 가만 두질 않는 인재 추자가 일어섰다.



계산을 한사코 안 받는 이모인지라 추자는 취업해서 돈을 번 이후부터는 올 때마다 빈손으로 안 왔다. 이번에는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카운터 안에 쑥 넣었다.



“손이 트셨더라고요. 잘 때마다 바르고 주무시면 좋을 거래요.”

“추자야 너 진짜 뭐 사들고 오면 내가 못 오게 한댔지.”

“이모 저 이제 돈도 잘 버는데. 고희재는 이런 거 세세하게 못 챙기니까 제가 대신 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거기나 갈까? 희재가 문 옆에서 큼지막한 열쇠를 가져와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렸다. 열쇠에 달린 커다란 열쇠고리는 텐빌스 정규 1집 발매 즈음 나온 공식 응원봉 키링 굿즈였다. 다음에 올 땐 키링 하나 사와야겠다, 추자는 가방을 잠그며 중얼댔다.

 

세 사람은 오랜만에 희재분식 건물 옥상으로 올라왔다.



“여기도 셋이 온 거 엄청 오랜만이네.”

“오래 있기엔 좀 춥겠다. 날이 아직 추워서.”



건물 주인은 세입자들에게 옥상을 자유롭게 쓰라고 허락했다. 다행히 5층짜리 야트막한 건물에서 옥상을 쓰는 세입자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오래전부터 이 옥상은 희재만의 동굴 같은 장소가 됐다. 추자와 친해지고 나서는 추자와 둘이 자주 왔고 대학에 가서 공찬과 친해지고 나서는 방학 때 셋이서 함께 오기도 했다. 학교 다니는 시절엔 공찬의 옥탑방 평상 위에, 방학하면 이 분식집 옥상에서 모이는 게 대학 시절 하나의 법칙이었다. 추자는 팩소주를 공찬은 캔맥주를 희재는 늘 제로콜라를 마셨다.



“공찬아 얼른 추자 핸드폰에도 그거 깔아줘. 우리 어플.”



업무 연락이 잦아든 추자 핸드폰을 가리키며 희재가 샐쭉 웃었다. 공찬이 멋쩍은 얼굴로 추자 핸드폰을 가져갔다. 추자는 드디어 일을 낸 거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굳이 따뜻한 분식집을 두고 차디찬 옥상 평상에 앉아 그 언젠가처럼 이야기들이 오갔다.



춤춤 에테르.

그것이 추자의 핸드폰 안에서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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