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희재가 이 어플에 대해 공찬과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철저히 차연오를 사용자로 염두하고 아이디어를 냈다.
반드시 익명성이 보장되어야해! (아이돌인 연오는 신원 노출이 어려우니까!)
서로의 신원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지 않으면서도 우정이 유지될 수 있는 메신저 기능이었으면 좋겠어!(어느 대학 다니냐고 하면 고등학교도 검정고시로 딴 연오가 뭐라고 해?)
무분별하게 사생활을 캐묻지 않았으면 해!(오늘 뭐했냐고 물었을 때 음악방송 사전녹화 뛰고 왔다고 말하면 아이돌인 게 너무 티나잖아?)
서로가 다른 별나라에 사는 사람들이어도 우정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어. 공허하고 외로운 어느 밤에 내 마음을 부담없이 툭 털어놓고 갈 수 있어야해. 서로를 노출하지 않고도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있는 낭만적인 어플이었으면 좋겠어. 희재의 말을 잠자코 듣던 공찬이 질문했었다.
-차연오한테 그런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어?
그 물음에 정곡을 찔려놓고도 희재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공찬에게는 이 마음을 얼마든지 관통당해도 상관없었다.
-내가 차연오한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데 나는 그럴 수 없으니까.
-팬사인회 같은 곳 가보면 어때? 그런데 가면 차연오랑 직접 이야기도 할 수 있잖아.
그러면 희재는 아주 단호하게 고갤 저었다.
-차연오한테 내 존재를 알리기 싫어. 그렇게 단발성으로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것도 싫어. 의미 없어.
-왜 의미가 없어? 네가 이만큼이나 좋아한다고 얘기하고 올 수 있잖아. 알려줄 수 있고.
-내가 뭔가가 되고 싶은 게 아냐. 팬한테도 각자 다 철학이 있거든. 이게 내 애정의 철학이시다.
-만약에 차연오랑 친구하게 될 진짜 기회가 생기면?
공학 꿈나무 공찬이 실없는 걸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물었다. 이럴 때면 희재는 공학자 역시 뜬금없는 상상력을 아무 때나 발휘해야하는 면에서 소설가와 비슷한 궤를 달린다는 걸 실감했다.
-공찬아 내가 어떻게 차연오랑 친구가 돼. 이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친구를 해. 친구라는 건 안 좋아할 때나 가능한 거야. 그러니까 연예인이랑 팬은 죽었다 깨어나도! 어? 죽어도! 친구가 될 수 없는 거란다. 팬이랑 친구한다는 연예인 봤냐? 연예인이랑 친구한다는 팬을 봤냐고!
사랑이 섞이면 우정이 오염돼. 그래서 차연오한테 내 우정은 혼탁하게 오염된 상태라고.
희재는 연오에게 가장 특별하고 눈에 띄는 하나의 사랑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고 했다. 차연오가 하루 안부를 나눌 진짜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춤춤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연오처럼 외롭고 친구 사귀기 힘든 환경의 누군가에게 이 작은 어플이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희재는 언제나 시작되지도 못한 프로젝트를 그릴 때 꿈과 희망에 가슴이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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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재는 효원전자 서울 본부에서 일했다. 희재가 속한 인사팀을 비롯한 대부분의 스탭 조직은 강남의 효원타워에서 근무했다. 한국에서 전자와 생명과학 분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기업이었으니 서울에도 상징적인 근무지가 필요했다. 알앤디 센터는 모두 경기도 본사에 위치하지만 희재는 이곳 서울 효원타워에서 일했다. S대학교 컴퓨터공학과를 나온 대다수 동기들은 경기도의 효원 알앤디 센터에서 일하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희재는 동기들과 다르게 전공을 포기하고 인사팀으로 취업했다. 전공 성적을 말아먹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동기들은 희재 취업 소식에 아쉬움과 동정심으로 물든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알앤디 센터와 서울 효원센터의 신입 초봉 차이가 얼마인지는 포털에 검색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고액 연봉자의 길을 포기한 희재를 안쓰러워했다.
“시작할까요?”
보기만 해도 콧대 아픈 뿔태 안경 쓴 재영이 팀원들을 돌아봤다.
신규 교육 프로그램 개설로 요즘 팀은 정신이 없었다. 아침부터 더블샷으로 내린 커피 든 텀블러를 들고 8번 회의실에서 팀원 모두가 모였다.
최근 5년차 주니어들의 퇴사가 급증했다. 연봉 테이블 높기로 유명한 게임 업계로 줄줄 이탈 중인 것이었다. 눈 뜨고 방관할 수 없는 상황에 회사에서는 해당 직급을 대상으로 어떻게 애사심을 고취시키고 우리 그룹에서의 커리어맵을 그려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사팀 내에서도 교육팀 소속인 희재네 팀 미션이었다. 이 미션으로 교육팀에 조직이 새로 생겨 희재를 비롯한 모두가 한팀이 됐다.
일단은 리더들에게 돌릴 의견지를 만들어야했다. 오늘은 그 의견지 구성을 두고 연 첫 회의였다.
<리더들에게 묻는다 : 팀원들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커리어 비전에 대한 의견 수립>
모나미 펜으로 회의 아젠다에 밑줄을 벅벅 긋던 희재가 입을 다물었다. 팀원들의 이탈을 팀장에게 묻는다고 진정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아이돌들이 왜 연차가 차면 동태가 되어가는지를 기획사 대표에게 묻는 꼴 아닐까. 원하는 답을 얻고 싶으면 이탈하는 이들에게 물어야한다. 회사란 언제나 쉬운 답을 가장 어려운 길로 빙빙 돌아가는 집단 같았다. 답을 제시해주지 못하는 사람에게 답을 제시받지 못해 떠나는 사람들의 이유를 답을 제시하지 못한 이들에게 물으며 답을 찾았다고 자위할 꼴이라니.
“희재님도 의견 있으면 말해줘요.”
재영이 자료지를 넘기며 물었다.
“정말 아무 생각이나 다 좋아요. 오늘은 브레인스토밍이기도 하고. 우리 희재님은 항상 기발하잖아.”
재영이 굳이 희재를 지목했다.
“저는 솔직히.”
“오 좋아요. 솔직히?” 재영이 눈을 빛냈다.
“좀 더 효율적으로 즉답을 알려면 나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게 맞는 거 같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더 실효성 있는 답을 위해서라면요. 리더들에게 묻는 게 아니라.”
재영의 미간이 잠시 요동친다. 이내 얼른 사람 좋고 능력 좋고 포용력 있는 부팀장 태도를 갖추고 싶어 이성을 꽉 붙드는 필사의 안간힘이 보였다. 희재는 오늘도 직감했다. 정말 회사와는 안 맞는다고. 정해진 답을 말하라는 질문에 언제나 정답 아닌 진솔한 진심을 내뱉었다. 저 때문에 아찔해진 표정을 얼른 수습한 재영 같은 사람이 회사 승진엔 적격인 인재였다.
“하하. 우리 희재님은 언제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던져준다니까. 우리 오분만 쉬었다 할까요?”
늘 이런 식이었다. 환기하고 돌아오면 마지막에 던졌던 희재 아이디어는 없던 척, 십분전의 상황으로 돌아가 회의가 이어졌다. 카페인을 더 마셔야겠다고 다짐한 희재는 텀블러를 들고 커피머신으로 갔다. 회사가 언제 진짜 정답을 듣고 싶어했던가. 오늘은 질질 시간 끌어 좋을 것 없는, 아주 중요한 거사를 치르는 날이었다.
춤춤 에테르에서 대화할 친구를 처음으로 만나는 날. 야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희재는 쉬는 시간에 또 다시 더블샷 아메리카노를 원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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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찬이 만든 베타테스트 버전 춤춤은 간단명료했다. 어플의 조잡함도 자본에서 나오는 법이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희재는 핸드폰을 붙들고 춤춤에 접속했다. 가입자는 우선 익명의 친구와 대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춤춤 성향 테스트’를 진행한다.
요즘 유행하는 MBTI나 성격유형검사와 비슷하지만 그 문항이 나 자신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를 맺을 때의 나>에 대해 조명한다. 또한 내 결과가 무엇인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공찬이 설계한 알고리즘에 의해 ‘친구’로 적합한 유형끼리만 매칭이 된다고 했다. 나는 어떤 친구를 사귀고 싶은지, 친구에게 어떤 친구가 되어주고 싶은지, 내가 우정에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섬세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희재는 오늘 낮 회의보다 더 심사숙고해 답을 골랐다. 생각해보면 친구는 고르고 선택해 사귀는 게 아니라 정신을 차려보면 친구가 되어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친구와 가장 진솔하게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에 희재는 새벽 시간대를 선택했다. 희재와 같이 새벽 시간대를 고른 사람들 중에서 대화 친구가 매칭된다.
매칭이 끝나면 두 사람은 티키타카로 대화할 수 있다. 한 명이 메시지를 보내면 다른 사람이 답장을 보낼 수 있다. 즉 내가 보낸 메시지에 친구에게서 답이 도착하지 않으면 다시 보낼 수 없다. 친구와 대화는 1일 1회 단 5분간만 가능하다. 매칭된 친구와는 베타테스트 3주 기간 동안 대화할 수 있다. 대화 도중 서로의 개인정보에 대해 물을 수 없다. ‘신고하기’ 버튼을 통해 친구를 신고할 수 있고 또 차단도 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서로가 철저한 익명성과 그림자로만 존재하고 본인을 드러내지 않아도 괜찮았다.
또한 처음 춤춤 성향 테스트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밝히고 싶다’ 문항에 ‘매우 그렇다’로 답을 한 친구들끼리만 매칭할 것이므로, 본인이 누구인지 밝히기 싫은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과만 매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