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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춤 에테르 19화

by 모정연

지금은 텐빌스가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혔고 희재 역시도 직장인으로 사원증을 목에 걸고 사는 게 현실이 됐다. 티비를 틀어도 텐빌스는 없다. 더 이상 글 쓰려고 앉아도 나오는 영감의 원천이 증발했단 뜻이었다.



최근 희재 팀의 화두인 5년차 주니어 이탈 방지 프로젝트를 위하여, 리더급들에게 돌릴 설문조사 질문지를 세팅하는 중이었다. 정해진 답을 도출하기 위해 더 적절한 질문을 끼워 맞추는 일에 현타를 느꼈다. 새로 마련한 기계식 키보드를 두드리던 태훈이 고갤 빼꼼 파티션 밖으로 뺐다.



“요새 희재님은 퇴근하면 뭐해요?”

사무실에 어쩌다보니 둘만 남아 야근 중이었다.



“그냥 이것 저것 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와 뭐하시는데요. 저도 좀 알려줘요. 희재님은 퇴근하고 진짜 바쁠 것 같더라. 유튜브 찍어요 설마?”

저렇게 사람 보는 안목이 어두워서 어떻게 인사팀에서 일할까. 희재 인생에 가장 안 어울리는 부업을 매칭하는 실력에 말문이 막혔다.



“도서관에 갑니다.”

태훈이 ‘도서관’ 단어에 몸서리를 쳤다.



“와 나 대학교 졸업하고 한 번도 안 가봤는데!”

“사내 도서관이 퇴근하고 가면 조용하고 좋거든요.”

“우리 회사 도서관 늦게까지 해요?”

“아홉시까지 합니다 보통. 대신 늦게 열어요. 점심시간에 열어서요.”

“진짜 자주 가나봐. 나는 관심 가져본 적도 없어요.” 이렇게나 사는 세계가 달랐다.

“무슨 책 빌려봐요?”



끊임없는 질문의 원천. 사회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직원에게도 손 내미는 자세는 태훈에게 배워야 할 삶의 동력이었다. 매일 밤 공찬이 만든 어플을 들고 앉으면, 익명의 상대에게 질문하는 걸 버릇처럼 해야했다. 아마 태훈은 춤춤 에테르라는 어플의 개발 배경 역시 이해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친구를 어떻게 사이버 세계에서 사귀느냐고. 그럴 필요가 무엇이냐고. 우리 주변에 고개만 들면 있는 게 말동무이자 친구인데 그 어두컴컴한 가상 세계에서 무얼 믿고 친구를 사귀느냐고 코웃음 치겠지. 희재는 어금니 사이 말캉한 살을 꾸욱 깨물었다.



“희재님 딴 생각 했죠.”

“아! 죄송합니다. 오늘치 집중력은 다 떨어졌나봐요. 저는 들어가 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이 다 돼가서. 오늘은 꼭 빌려야할 책이 있어서요.”



에코백에 반쯤 쓰다 남은 핸드크림까지 물건들을 쓸어 넣은 희재가 일어났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대도 꼭 허리를 팔십도까지 숙여 인사했다.



"다음에는 도서관 같이 가요! 나도 우리 회사 도서관 소개 좀 시켜줘요! 진짜 궁금하다!"

인생의 모든 것에 물음표의 자세로 대하는 태훈이 손 흔들며 인사했다. 희재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융통성을 발휘해 네 라고 대답했다가 약속이 명치에 얹힐 것 같아서였다. 지하 도서관까지 뛰어 도착했다. 사서 없이 무인기계로 운영되는 시스템. 그래서 특히나 조용했다. 카펫이 모든 발걸음을 먹어치우는 고요함. 희재는 책 한권을 잽싸게 빌려 사원증을 태깅하고 지하철 통로로 나왔다.



그날 밤 12시 34분이 되기 전까지 이상하게 마음이 고요했다. 사람 없는 지하철에 앉아 집에 오면서도 내내 익명의 그 친구만을 생각했다.



새벽의 정점을 향해가는 1234. 연오를 간절히 기다리던 시간이기도 했던 이 시간에 타인과 연결되는 게 얼마 만인가. 침대에 의식 치르는 사람처럼 앉았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상대가 먼저 인사했다. 이제 희재 차례였다.



-안녕하세요.

-어제 제가 너무 일방적으로 늦은 시간으로 잡은 건가 싶었어요.



상대의 답은 오늘도 느렸다. 매일 대화에 5분 시간제한이 있는 이유는, 시간이 무한하면 대화가 산으로 가거나 지루해질 수 있어서였다.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 만나 애가 닳아야 우정을 증식시킬 수 있다는 아이디어도 희재가 냈었다.



-아니에요! 저 12시 34분 좋아해요!! 오늘 하루는 별일 없으셨어요?



이제 희재는 ‘1234’라이브 방송에서 연오가 했던 말들을 그대로 재연했다. 그 가수에 그 팬이었다. 연오는 언제나 방송을 켜면 한참 댓글을 읽다가, ‘오늘 하루는 어땠어? 별일 없었어?’ 물었었다. 상대의 안부가 궁금해질 때면 이런 인사를 건넸겠구나. 이제야 연오의 마음을 또 이해했다.



-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좋은 하루 보내셨어요?



상대의 대답은 느렸고 틀렸다. 차연오가 전에 그랬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어떻게 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있을 수가 있어. 우리 이렇게 라이브로 만나고 있잖아. 이것도 아무 일이 아니야?’ 차연오에겐 보잘 것 없는 하루를 특별한 하루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아무 일도 없긴요! 저랑 지금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데요? 24시간 만에 친구랑 정해진 시간에 만났는데? 이거 되게 엄청 별일인 건데?



희재가 또 연오처럼 말했다. 새친구를 사귀는 순간 연오에게 배운 기지를 발휘할 줄은 몰랐다. 라이브 방송 중 느리게 달리는 댓글에 반응 갈구하는 아이돌 된 심정이었다.



-덕분에

-덕분에?

-덕분에 별일 있는 하루 되고 있어요. 중간에 실수로 자꾸 엔터를 쳐서 답장이 보내져요.



상대가 최대한 느리게 고심해 보내는 내용이니 진중해 보였다. 게다가 어플에 적응하려는 노력까지 가상했다.



-저도 되게 따분한 하루였는데 덕분에 재밌어지고 있어요. 누가 괴롭힌 사람은 없었죠?



무심결에 타이핑해서 보내놓고도 희재는 어이가 없었다. 저것도 언제나 연오 말버릇이었다. ‘오늘 괴롭힌 사람은 없었지? 괴롭힌 사람 있으면 말해줘. 나도 같이 미워해줄게.’ 새친구 사귀는데에 차연오에게서 배운 걸 써먹을 줄이야. 인생이 이렇게 돌고 돈다.



-전 없었는데 혹시 있으시면

상대는 아무래도 이번에도 타이핑 도중 엔터를 누른 듯했다. 춤춤에 적응 중인 게 귀여웠다.



-있으면요?

-저한테 말해주시면 저도 같이 미워해 드릴게요.



도착한 대답에 희재는 누웠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게 흔한 맥락의 말인가? 꼭 연오처럼 말하는 문장에 심호흡을 목뒤로 삼켰다. 차연오가 그리워 생판 남에게서도 그의 흔적을 찾는 중인가 희재는 혼란했다. 와중에도 시간이 흘러가니 두 손을 키패드 위에 올리고 답장을 쳤다.



-저는 도서관 가서 책 빌려왔어요. 우리 만나는 12시 34분 되기 전에 시간 기다리면서 밤에 읽으려고요.

혼란함에 희재는 애써 대화 주제를 바꿨다.



-무슨 책인지 물어봐도 돼요?

-<노인과 바다>에요. 혹시 읽어보셨어요?

-엄청 옛날에 읽었던 거 같아요.

-하긴 되게 유명한 책이라 안 읽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저는 좋아하는 책이라 다른 출판사 번역본으로도 읽어보고 싶어서 집에 없는 걸로 빌려왔어요.

-책 읽는 거 되게 좋아하시는구나.

-취미 중에 하나에요. 이 책은 결말이 진국이에요. 한 번 다시 읽어보세요! 추천할게요!

-결말이 좋아요?

-기억 안 나세요?

-끝까지 안 읽었던 것 같아요.

-왜요?

-책을 끝까지 못 봐요.



상대의 대답에 희재는 또 한 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연오형은 영화 보다가도 딱 결말 직전 되면 나가버리는 거 아세요? 책도 끝까지 절대 안 읽어요!’ 막내가 귀여운 일름보를 자처하며 연오를 폭로한 게 기억났다. 모든 멤버가 입 모아 연오는 <마지막>을 싫어한다고 팬들에게 일렀다. 어떤 두려움에 마지막을 피할까. 그런 연오가 궁금해질 때면 대책 없이 애정이 차올랐었다. 그냥 나는 못 보겠어. 마지막이 싫어. 창피해서 귓불 붉어진 채 연오가 중얼댔었다.



-왜 끝까지 못 보세요?



연오에게선 듣지 못한 답을 연오와 비슷한 사람에게서는 들을 수 있을까 싶어 물음표를 던졌다.



-끝나는 순간이 아쉬울 거 같아서요. 좀 이상하죠.

-그럴 수도 있죠. 하나도 안 이상해요. 이 책은 완벽하게 해피엔딩이에요.

-결말이 행복하게 끝나요?

-이제 읽으실 수 있겠어요?

-읽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 대화가 45초밖에 안 남았다는 알림이 어김없이 왔다. 어제보다 5분이 더 신속하게 지나간 느낌이었다. 희재는 손톱 끝을 탁탁 소리 나도록 깨물었다.



-와 오늘은 어제보다 시간이 더 빨리 갔어요!

-제가 너무 느리죠. 아직 어려워서



상대는 의외로 자기 객관화가 꽤 잘 되는지 본인이 느리다는 건 알았다.



-아니에요! 제가 타자가 너무 빨라서 부담스럽지는 않으시죠?

-제가 더 빨리 보내는 노력을 해볼게요.



상대가 무려 노력을 해보겠다고 하니 희재가 더 미안해졌다.



-저 오늘 시간 끝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거만 얘기해드릴게요! 저희 춤춤에서 엔딩이요! 그것도 미리 스포해드릴게요! 저희 둘이 절친 되고 끝나는 해피엔딩일 거예요.



혹시나 책과 영화의 엔딩처럼 춤춤에서의 마지막까지 도달하는 걸 두려워할까 행복한 결말을 호언장담 해주고 싶었다. 연오에게 주고 싶던 결말에 대한 확신을 여기서야 무기명의 상대에게 던진다.



-저도 그렇게 해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하지만 상대에게서는 기대하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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