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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춤 에테르 20화

by 모정연

그 느린 상대가 어찌나 기지를 발휘해 빨리 보낸 건지 10초도 안 되어 도착했다.



지금까지 받아본 메시지 중 가장 빠른 속도였다.



익명의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 선한 마음에서 춤춤에 가입했다는 걸까? 희재가 답장을 보내기도 전 오늘의 5분이 모두 끝났다. 어김없이 대화가 끝날 즈음엔 공찬이 전화를 걸어왔다.



"희재야 궁금해서 바로 전화한 건데."

“응 공찬아. 오늘도 되게 재밌게 잘 얘기했어.”



희재는 춤춤 상대와의 시시콜콜한 대화 내용을 공찬에게 전하지 않았다. 아무리 개발자라도 새친구들의 대화 내용 알권리는 없다고 선 그었다. 다만 베타테스터로서 느끼는 사용 후기는 소상히 말해줬다. 잔잔하게 일어나는 버그라던가 시스템의 불안정성 같은 것들. 정식 서비스를 출시하게 될 때 창립자가 반드시 알아야하는 이 세계에 좀 더 필요한 다정함이나 낭만 같은 것들만 조언했다.



“공찬아. 나 쓰잘데기 없는 거 하나만 물어봐도 돼? 너는 누가 나를 괴롭히면 어떻게 해주고 싶어?”

춤춤의 상대와 대화하고 난 뒤 잔존하는 울렁임을 공찬에게 무심코 툭 던져봤다.



“회사에서 누가 너 괴롭혀? 누구야. 누가 고희재 괴롭혀.”

“아니 그냥… 가정을 한 번 해보자는 거지. 그냥 만약에 말야 만약에….”

“음. 엄청 맛있는 거 먹으러 같이 가야지. 스트레스 날려버리게. 나 맛집 알아봐?”



공찬 다운 다정한 말이었다. 가장 정석에 가까운 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로직의 언어는 아니란 말이지. 싱겁게 공찬과의 통화를 끝내고 다시 춤춤 에테르에 접속했다.



전화를 끊고 침대에 누운 희재는 환한 액정을 다시금 바라봤다.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미워해주겠다는 건 차연오의 전매특허 발언이었다. 연오의 팬들은 연오와 장난치는 티키타카의 일환으로 언제나 '오늘도 뫄뫄가 나 괴롭혔어' 라고 말하곤 했다. 그럼 차연오는 얼마나 성심성의껏 팬들을 괴롭혔다는 불특정 다수를 같이 미워해줬던가.



아주 특이하고 해괴한 발상은 아니지만 또 아주 보편의 감성도 아니라고 믿어왔다.



컨디션이 안 좋거나 작은 부상을 당했어도 결코 무대를 빠지는 일 없이 언제나 최선 다하는 성실함과 그 못잖게 무대 아래서는 의연하게 다정한 모습을 좋아했다. 다정에 뿌리를 둔 말들은 또 얼마나 사랑했었나. 춤춤 에테르를 덮고 나서도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차연오에 대한 회상이었다.



“내가 정말 미쳤나보다. 아무나 보고 막 쟤 생각이나 하고.”



침대 옆 벽 끄트머리에 작게 붙인 연오 포스터를 쳐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모서리가 세월과 햇빛에 하얗게 바랬다.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같이 미워해주고, 결말이 무서워서 엔딩은 못 보는 사람이 세상에 여럿인 줄 알았으면 차연오를 세상 유일무이 존재처럼 좀 덜 좋아할 수 있을 뻔했다. 오로지 그 애만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생각해 사랑과 애정이 유난스럽도록 마음의 멀미를 일으켰었다.



뭘 봐 짜식아.

희재는 눈 맞추며 웃음 짓고있는 포스터를 피해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



불판 위에서 고기 익는 소리가 꼭 빗소리 같은 저녁이었다.



“그 옷 예쁘다.”

“줄까?”

“어휴, 내가 그런 걸 어디에 입고 다녀.”



곱창집에 퍼가 복슬복슬한 옷을 입고 온 추자를 보며 희재가 눈을 밝혔다.



무채색만 입고 다니는 희재와 형형색색 옷 입는 추자는 스타일도 완벽히 달랐다. 추자는 어렸을 때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 때는 반이 달랐지만 우정은 계속됐다. 희재가 프로스타스를 좋아하면서 영감 받아 노트에 소설을 쓰기를 시작했다면 추자는 프로스타스를 좋아하면서 그들의 무대, 화보 의상 룩북을 만들었다. 무대의상들을 정리하기도 했고 해외에서 유명하다는 화보들을 매거진에서 직접 오리고 잘라 스케치북에 붙여두면서 프로스타스의 컨셉북을 홀로 제작했었다.



그 결과 스물의 추자는 의상학과에 진학했고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까지 만들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국내에서 가장 큰 의류회사에서 인턴으로 시작해 정직원으로 전환돼 스물넷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최근 추자 회사는 자사 의류 브랜드들을 B2C로 유통하는 플랫폼까지 개발했다. 추자는 그 플랫폼 개발직군에 공찬을 취업시키려는 갸륵한 계획까지 꾸몄다.



“잠깐만. 김추자. 근데 너 손가락에 반지 어디 갔어?”



덤덤하게 퍼자켓 벗는 추자를 보다 희재가 눈을 번뜩였다.



“아 어 뺐어. 헤어졌어.”

휑한 약지손가락을 아무렇지 않게 쓸어내며 추자가 말했다.



“야 너 괜찮어?”

“당연하지. 헤어진 게 뭐 대수라고.”



때맞춰 사장님이 두 사람의 단골 메뉴를 식탁에 올려놨다.



“그래! 야 잘 됐다, 그럼 오늘 김추자의 스무 번째 이별을 기념해보자. 닭발 더 시킬까?”

“나 스무 번째 이별이야? 나도 안 세는 걸 고희재 혼자 왜 세고 있대.”

“내 연애는 카운트할 게 없으니까 네 연애사를 대신 세고 있지. 추자. 슬퍼?”

“그럴 리가.”



추자는 언제나 아이돌 그룹에서 <사복을 가장 센스있게 잘 입는> 멤버를 좋아했다. 희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상의 나래를 자극하는 눈빛>을 가진 멤버를 좋아했으니, 같은 그룹을 좋아해도 좋아하는 멤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추자야. 이별을 여러 번 하면 좀 덤덤해져?”

“난 원래 좀 감흥이 없잖아.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내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

“오, 추자야, 나 그런 걸 써볼까. 너무 수백 번 붙었다 깨졌다 해서 아무 감흥 없는 커플 얘기.”

“그래. 써봐. 너 요새 뭐 쓰긴 해?”



불판 위 노릇하게 구워지는 고기를 두고 추자는 익숙하게 소주병 뚜껑을 열었다.



“근데 문제는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기분이 뭔질 모르겠어. 내가 경험이 없어서 더 그래.”

“네 글을 위해서 그럼 연애를 해봐. 유명한 가수들도 헤어지고 나면 기깔나는 멜로디 뽑아내잖아. 너도 네 글을 위해서 이별을 경험해보는 거지.”

“난 사랑 얘기만 쓰고 싶어. 그래서 사랑을 모르고 싶어. 내가 가진 환상을 깨기 싫어.”



뭔 닭뼉다구 같은 소리냐. 추자가 중얼대며 우물우물 닭발을 집어들었다.



모니터나 텔레비전 안에서는 잘도 빠지는 사랑이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았다. 마늘을 먹지도 않으면서 추자 먹으라고 구워주면서 말했다. 추자는 노릇해진 마늘을 잘도 집어먹었다.



“뭐 쓰고는 있어? 차연오 사라져서 뮤즈 땔감이 사라졌다며.”



사랑 이야기만 쓰고 싶은 희재는 좋아하는 대상이 있을 때만 미친 듯이 글감이 폭발했다. 글이 막힌 건 차연오가 사라지고, 더 정확히는 좋아하는 대상이 사라지고 나서였다.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가 마음속의 사랑과만 비례했다.



“그래서 말인데. 나도 이상한 말인 거 아는데, 춤춤에서 내가 만난 사람…. 그 사람이랑 얘기하면 할수록 차연오가 생각나.”

“야, 그 이름은 좀 작게 말해라.”

누가 들을까 겁난단 듯이 추자가 주변을 살폈다.



“나 사실은 아직도 차연오를 아직도 좋아하나? 그래서 머리가 좀 아직도 띨띨하게 돌아가나? 어떻게 엄한 사람이랑 얘기하면서 그 사람이 차연오 닮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들지? 일종의 상사병인가? 아이돌 해체 후유증 뭐 그런 건가?”



추자는 대답 대신 희재 잔에 제로콜라를 채웠다. 두 사람이 작게 한숨 쉬고 잔을 맞부딪혔다. 알콜과 탄산이 부딪히며 맑은 탁음을 낸다.



“팬들이 지긋지긋하셨다는 분인데 뭘 보고싶어해. 됐어. 다른 놈 알아봐. 그 토깽이 있는 그룹. 우리 공항에서 저번에 본 애들. 위치드인가 걔네 어때.”

“고욱현 라이브 방송에서 주희찬이 술김에 말을 막 뱉은 걸 수도 있어. 순간 욱해서. 주희찬 원래 과장이 좀 심하잖아. 차연오가 팬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했다기 보다는 차연오가 연예계 생활을 힘들어했다는 게 취해서 말이 좀 세게 나왔던 거 아닐까?”

“너 지금 차연오 쉴드 치냐?”



민망한 얼굴로 희재가 젓가락을 입 안에 넣었다. 그러다가도 이내 억울한 얼굴로 목에 핏대를 세웠다.



“생각해보니까 나 차연오에 대해서 진짜 아는 게 없다? 하나도 없어! 부모님이 뭐하는 분들인지, 고등학교는 왜 굳이 자퇴했는지, 지금은 왜 그렇게 잠적한 건지. 약쟁이가 만든 그룹이라 약쟁이일 거라는 소문이 억울하지는 않은지. 주희찬 말대로 정말 팬들이 지긋지긋했는지, 그렇게 지긋지긋해했다는 새끼가 팬한텐 왜 그렇게 잘해준 건지, 아이돌 생활 내내 환멸만 났는지, 그렇게 환멸났다는 놈이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내색 하나 안 하고 다정하기만 할 수가 있냐? 이거 청룡에서 남우주연상 감 아니냐? 차라리 확 배우를 하지 그래? 아니 내 말은, 하여튼 내가 걔가 연기를 한 건지 진심은 뭐였는지 하나도 아는 게 없다니까? 이렇게 좋아했는데! 그렇게 쌔빠지게 내가 좋아했는데!”



추자는 익숙하게 부르스터 불을 껐다. 노릇하게 익은 곱창들을 뒤집었다.



“근데 고희재. 너 그건 어떻게 할 거야. 네가 운영하던 그 차연오 팬페이지.”

“일단 올해도 갱신은 해야지. 서버 운영비가 비싼 것도 아닌데.”



희재가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를 한 점 집었다.



사랑의 시작이 벼락 맞는 순간의 전류를 닮았다면

끝난 사랑을 수습하는 건 치우고 돌아서면 다시 더러워져있는 방구석 꼴을 닮았다.



뭐가 이렇게 정리를 해도해도 안 끝나냐.

투덜대는 목소리가 점점 기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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