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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Jun 11. 2020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가진 의외의 슬픔

우리가 책으로 할 수 있는 일들

얼마 전 대학 동기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나의 첫 직장인 A출판사는 전공 교수의 추천으로 들어간 곳인데, 사실은 내 앞에 여러 명이 거절을 한 뒤에 내 차례가 된 것이라고 했다. 그중에 내 측근들도 있어서 그 사실을 십수 년 만에 알게 된 거다. “너도?” “너도?” 하던 끝에 한 친구가 “결국은 거기 유진이가 간 거야.”라는 말에 다 같이 한참을 웃었다.


어느 날 면접을 보라는 교수의 말에, 별 고민 없이 줄래줄래 갔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나는 출판사에 들어갈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실은 ‘편집자’라는 직업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몇 친구들을 거쳐 나에게 오게 된 기회를 우연히 잡은 날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책을 만들며 살고 있다. 만약 그날 다른 친구들처럼 그 기회를 패스했다면, 나는 지금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있을까?


나는 베스트셀러도 한 번 못내 본 편집자이다. 책을 만드는 여러 프로세스 중에 내가 잘하는 것 한둘 덕분에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는데, 감각과 열정이 대단한 동료 편집자들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많다. 겸손도 아니고, 열등감도 아닌 그냥 사실이다. 그렇게 잘난 편집자는 되지 못했지만, 나는 책을 만드는 게 재밌고 좋다. 그런데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가진 의외의 슬픔이 하나 있다. 나도 그것 때문에 지독하게 힘들었던 적이 있다.


출판계에 떠도는 말 중에 ‘책을 가장 읽지 않는 사람이 편집자들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들은 정말 책을 읽지 않을까? 그럴 리는 없다. 자신이 만들고 있는 책과 유사한 책들, 경쟁도서, 참고도서, 베스트셀러들을 매일매일 본다. 뿐인가. 아직 책이 되지 않은 원고 속에서 아침부터 밤중까지 파묻혀 산다. 아마 하루에 글을 가장 자세히 정독하는 직업이 편집자들이 아닐까. 서점에 주기적으로 가서 책을 들춰보고, 온라인 서점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해외 서점까지 섭렵하는 그들이, 왜 책을 읽지 않는다는 오명을 쓰게 된 것일까? 아마 이런 앞문장이 빠진 것 같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는(못하는) 사람이 편집자이다.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충분히 즐겨 읽으면서 책도 잘 만드는 편집자도 있다. 내 주변에도 있는데, 참 존경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런데 편집자들 중에는 책읽기의 개인적(?) 기쁨을 거의 잃어버린 이들이 많다. 팔리는 책을 만드느라 한때 자신이 책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산다. 그들은 서점에 가도 지금 만들고 있는 책을 더 잘 만들기 위한 책에만 눈길을 준다.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책이나 새로 나온 책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출판 동향이나 트렌드에 능숙하고 어떤 책을 평가할 때도 세상 날카롭지만, 한 권에 감동하는 건 할 줄 모른다.


처음부터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러려고 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서서히 ‘읽는 사람’에서 ‘만드는 사람’으로 변한다. 읽는 기쁨보다 읽는 괴로움에 더 익숙해진다. 더러는 책이 지겹다고 하는 이도 있고, 책이 읽는 것이었냐는 묻는 이도 있다.


나도 오랫동안 이렇게 살았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지 못했다. 어떤 책을 좋아했는지도 잊어버렸다. 한창 책 만드는 일에 빠져 있을 때는 그것 때문에 불행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나의 책읽기가 간절하게 그리웠다. 그렇다고 그것이 곧장 찾아진 건 아니었다. 이미 만드는 책에 적응이 되어 있어, 좋아하는 책을 다시 찾아 읽어도 통 재미가 없었다. 이번에는 읽는 책도, 만드는 책도 다 시시하고 재미없는 권태기가 몇년간 지속됐다.


내가 다시 책읽기의 즐거움을 찾은 것은 사람들과 같이 읽고서부터이다. 직장 동료들과 점심시간에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나눴던 첫모임을 시작으로 지인들과 하는 작은 모임들 덕분에 나는 점점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는 나, 끌리는 대로 책을 고르는 나, 한 문장에 머무르는 나, 다음 책을 고민하는 나, 서점에 가도 멀미가 나지 않는 나…. 그런 나를 사람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찾게 되었다.


나는 ‘어떤 일을 좋아해서 시작해도 그것이 밥벌이가 되면 마음이 달라진다.’는 말을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는다. 밥벌이가 되어도 끝까지 좋아하는 게 진짜 좋아하는 거니까. 밥벌이가 되어 설사 그것이 지겹고 힘들어도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걸 아니까.

문득 나를 위해(?) A출판사를 거부해준 동기들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면접을 보러 간 20대의 나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그거 참 탁월한 선택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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