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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의식 Sep 23. 2023

무탈

남는 시간이 생겼어, 잘 살고 있는 걸까.  

밤이 일찍 찾아오기 시작했다. 

운영하는 가게의 영업시간을 한 시간 줄였다. 

7시에 닫던걸, 6시에 닫는다. 1시간으로 저녁 시간에 훨씬 여유가 생겼다.  

별일 없이 평화로운 일상이 열리는 순간, 

불안이 시작된다. 

습관적 감정. 

늘 걱정이나 차례로 할 일, 해야 할 일을 몇 가지씩 두고 산다. 

찾아봐도 특별히 걱정할 만한 일이 없는 시기에 불현듯 돌입해버렸다. 

준비 없이 무척이나 평화로운 시기. 

대부분의 일들이 잘 되어가고, 

특별히 급하게 해야 하는 일도 없고, 

걱정해야 할 일도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그때, 문득 요동치는 마음.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넉넉한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야 할 것만 같다. 

'나중'을 위해 지금을 헌신하고 싶은 욕망이 자꾸 몰아친다. 

뭘 해야 할까. 

일종의 죄책감이 들기도 하다. 

죄책감. 

또 하나의 습관적 감정. 

이렇게 가만있어도 될까. 

이 여유를, 이 평화를 즐겨도 될까. 

곧 닥쳐올 일을 모르고 나는 웃고 있는 게 아닐까. 

흥얼거리며 길을 걷다 돌부리에 걸려 수치스러워지는 것처럼. 

앞으로 올 불행의 가짓수를 미리 헤아려본다. 

바쁠 때마다,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마다, 물리적인 시간이 없을 때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글을 써야지, 책을 실컷 읽어야지, 여유롭게 산책을 해야지, 처음 가본 길을 걸어 봐야지, 제주도 이곳저곳을 내 발로 누벼야지, 뒹굴뒹굴해야지, 갈망만 있고, 갈망을 채울 여유는 좀처럼 나지 않는다. 

 

너무 오랜만이여서일까, 물리적인 시간이 나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어영부영 미뤘던 손가락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50분.

한의원 침대에 누워 멍을 때리며 이리저리로 떠가는 생각을 바라보다 깜박 잠이 들기도 하는 그 시간이 몹시 좋았다. 침은 너무너무 아팠지만, 그 침대에 누우면 아 좋은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불안했다. 

저녁을 먹고 남는 시간을 유튜브를 보고 넷플릭스도 보고 

뭘 해야 할지 고민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런 시간을 이삼일 보냈다. 

 

'하는 수 없이' 책을 읽었다. 

사두기만 하고, 

쌓아 두기만 한, 

끝을 내지 못하고 읽다 만 책들이 끝내보자.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유익한 일이었다. 

그게 참 다행인 일이었다. 

유익하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하나 이상 가지고 있어서. 

(더 많다면 좋겠다!) 

 

책에는 불안을 씻어 보낼 줄 새로운 물살이 흐른다. 

 

불안한 걸 잠재워보자고 가장 최근에 산 하루키의 새로운 소설책을 읽었지만, 당최 읽히지가 않았다. 아까워 책을 덮었다. 하루키의 소설이 읽고 싶은 어느 날을 위해 이 새로운 이야기를 남겨 둬야지. 다른 책의 남겨둔 부분을 읽다가 아, 이런 때가 찾아오면 읽으려고 그전에 그리 읽히지가 않았나 보군, 싶었다. 지금의 상황에 적절한 책이어야 읽어도 흡수가 된다. 현재와 별 상관없는 내용을 읽다 보면 억지로 텍스트를 눈으로 따라가는 행위에 그치고 말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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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나>라는 책의 6장, 거기에 해리엇 아르노의 소설 <인형 만드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있다. 

주인공 거티의 딜레마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이고, 나의 지금을 잘 닦인 거울처럼 비춘다.

 

거티는 살아가고 싶은 인생의 꿈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살고 싶은 모습을 거티처럼 알고 있는 것부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거티는 농장을 마련해 가족과 살며 완성하고 싶은 커다란 조각품을 마음에 품고 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렇게 선명한 이미지를 가진 거티이지만, 그럼에도 어머니가 말하는 대로, 사회에서 교육된 대로, 이웃의 시선에 따라, 거티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의무를 따라 산다. 책의 워딩을 따르면, 거티는 "자기 내면의 소명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어떤 조언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도덕성은 종종 비겁함을 감추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_200p.

 

"그러나 그때에도 그녀에게서 희망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다만 자신의 지혜와 진실성과 신성을 부정하는

겁쟁이가 되는 '순간'이 있을 뿐이다." 

 

"거티는 올바른 삶을 살고자 언제나 열심히 노력한다. 

이것이 그녀 이야기의 '역설'이다. 

그녀가 열심히 노력하면 할수록 그녀의 삶은 더 나빠진다. 

핵심은 자신의 본성과 맞서 싸워 영웅이 되려 하지 말고,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믿음으로써

자기 존재의 고귀함을 주장하라는 것이다." 

 

"대개 우리는 극적인 불행 때문에 좌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덕을 가장한 자기 배반적인 행동을 계속하면서 진짜가 아닌 삶이 쌓여 가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무언가 해내는 것 없이 지나가는 하루가 두려워

그저 육체를 혹사시키는 노동,

가짜 노동, 

지나친 도덕성, 강박적인 규칙, 완벽주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습관적 행위들. 

 

습관적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아닌, 진짜 나에게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평화로울 땐 평화를 즐기고

폭풍우 속에 있을 땐 그걸 견뎌낼 힘을 내고 

닥쳐온 어떤 일이든 (그게 평화로운 일이든 시련이든) 

충만하게 겸허하게 경험하고 받아들여 살아나가는 것, 그런 힘이 있는 사람이길. 

 

틀림없는 행복의 결말은, 

자기가 어느 쪽으로 가야 행복할지 감지하는 것, 

그리고 그리로 향하는 자신의 여행을 신뢰하는 것, 

그때 자연스레 찾아온다는걸, 되새기게 해줘 감사한 페이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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