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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늙은 경단녀의 구직 일기

by hotlionheart


어느 늙은 경단녀의 구직일기 1


요즘은 초등학교 외부 강사 공고가 나는 시즌이다. 오늘까지 마감인, 드물게도 총 학생 수가 천 명이 넘으면서, 집에서도 30분 이내 거리에 있는 학교의 외부강사 모집 공고를 어제서야 발견하게 되었다. 모집단인 총 학생수가 많으면 상대적으로 방과후 수업을 신청하는 학생 수가 많아져서 그만큼 강사 수입도 늘어나게 된다.


내년이면 방과후 강사 3년 차가 되지만, 서류 작업은 아직도 미숙하다. 이력서 외에도 운영 제안서, 연간 운영 계획서 등의 서류들을 저학년반과 고학년반으로 나누어 학교마다의 포맷에 맞추어 분기별로 작성을 해야 한다. 독수리 타법은 벗어났지만 아직도 타자 칠 때 오타가 자꾸 나서 답답할 때가 있다.

새벽 두 시 넘어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대학교 홈페이지에 오랜만에 접속해서 비번 찾기를 하고, 최종 학력 증명서까지 뽑고 나니 긴장이 풀렸다. 경력 증명서도 다 인쇄해서 필요한 모든 서류들을 집게로 집고, 누런 봉투에 넣어 봉인을 했다.


보통 이메일로 접수를 받는데, 이 학교는 특이하게도 직접 서류 봉투를 들고 학교 교무실에 와서 제출하라고 공고문에쓰여 있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니 '담당자가 각 강사들의 서류를 인쇄하고 묶는 과정이 귀찮아서.'라고 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니면 구직하는 아쉬운 사람이 좀 더 수고스러우라는, 그러고도 일하고 싶으면 직접 오라는 갑질의 다른 모습일까?


세 시간쯤 잤으려나.. 비가 오니 몸은 축축 늘어지지만, 오전 중에 접수시키고 신경을 끄고 싶어서 부지런을 떨며 머리를 감고, 귀찮았지만 예의상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빗속을 운전하는데, 앞차의 바퀴가 도로의 빗물을 가르며 쌩 하고 지나가니 빗물이 내차로 튀어 오른다. 튀어 오른 빗물 때문에 내차의 와이퍼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부지런히 닦아내도 시야가 잘 확보가 안된다. 와이퍼 속도를 한 단계 올리니, 와이퍼가 촐싹맞게 좌우로 빠르게 왔다 갔다 한다. 그게 더 신경이 쓰여서 다시 와이퍼 속도를 원래대로 낮췄다.

잠을 충분히 못 자서 집중력도 떨어지고, 초행길이라서 고속도로에서 나와 그 학교가 있는 행정구역으로 들어가는 길이 복잡하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한기가 느껴져서 내 방 보일러와 온풍기를 틀어놓았다. 두꺼운 옷을 집에서 입고 있으면 답답하기 때문에, 사계절 집에서 입고 있는 얇디얇은 여름 원피스 잠옷을 서랍에서 꺼내 갈아입고, 그 위에 역시 얇은 면으로 된 긴팔 로브를 걸쳤다.

전기 포트의 끓는 물을 찻잔에 부어 얼마 전에 선물로 받은 French earl grey 티를 우렸다. 찻잔을 들고서 암막커튼 사이 좁은 창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따라 어둑어둑한 내 방으로 들어왔다. 라탄 테이블 위에 찻잔을 놓고, 몽골 캐시미어 담요를 접어 푹신하게 만들어 놓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잠시 지난 2년 간의 강사생활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오늘 서류를 낸 그 학교는 새로 지어진 대단지 아파트 앞에 위치해 있었고, 학교도 지어진지 얼마 안돼 보였다. 아마도 아파트 지을 때 학교도 같이 지어졌으리라.


나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을 편견 없이 보고 대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학교 강사 일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점은 부모의 경제력과 학력이 아이들의 학습능력과 인성, 예절에도 영향을 크게 미친다는 것이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그 부모의 그 자식'인 것이다.

그래서 올해는 지원서를 무작정 넣지 않고, 모집 공고가 나면 그 학교로 배정되는 지역이 어떤 곳인가를 먼저 검색하여, 그 지역이 어느 정도 평균적인 범주에 들어온다고 판단이 되면 지원서를 넣고 있다.

이런 얍삽한 짖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몸으로 겪어보고 마음에 상체기가 겹겹이 쌓이게 되면, ‘내가 나를 보호해 줘야지. 아무도 나를 편들어 주지는 않는다.’라는 응집된 생각만 남게 된다.


때로 편견은 상대가 아군인지 적군이지 수초 안에 판단하여 나를 방어하는 방법으로 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인지편향(cognitive bias)'으로 밝혀지더라도, 하나의 보호막 역할을 해주었을 것이기 때문에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늙은 경단녀의 구직일기 2


연말부터 시작해서 새해인 요즘도 계속 이력서와 운영 제안서 작업을 하고 있다.

두 군데는 서류 심사에서조차 탈락했다. 다른 두 곳은 면접 분위기도 좋았고 곧 연락을 준다고 했었는데, 최종 연락이 안 왔다. 나머지 한 곳은 최종 합격했지만 내가 고사를 했다. 면접에서 떨어진 곳에서는 나보다 훨씬 젊은 경쟁자들이 와 있었다. 보통 두 배수나 세 배수로 면접자를 뽑기 때문이다.


길지 않은 경력이지만 첫 해에 원어민 영어 수업을 영국인 강사와 한 팀으로 가르치게 되었기에, 재작년과 작년에는 쉽게 한 번에 일자리를 더 구할 수 있었다. 경력은 더 쌓였는데 이번에는 일자리를 구하는 게 쉽지가 않다. 자신만만했던 내 모습은 사라지고, 속상함과 조금 하락한 자존감만이 남게 되었다.

내가 찾은 이유는 내 주민등록상의 나이가 더 많아졌다는 것뿐이다. 내 외모는 사람들이 내 실제 나이보다 한 열 살 정도 어리게 본다. 피부과에 들인 돈이 있으니 내가 봐도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외관상 나이와 달리 작년 가을부터 급격한 체력저하를 느끼고 있다. 저녁을 먹고 식탁을 치우고 나면, 어느새 침대에 누워 스르륵 잠이 들었다가 열 한시쯤에 다시 깬다.

보통 10시에 예약해 놓는 영어회화 앱의 비싼 수업을 놓치고는 허탈해 하기 일수다.


1월에도 간간이 나오는 구인공고를 보면서 취업 전략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어떤 학교들은 강사를 못 구해서 이차, 삼차 공고까지 내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곳은 수업을 듣는 학생수가 적다거나 그 이외에 일 하는데 까다로울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에게는 별 다른 선택권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오늘 오후 4시까지 접수 마감인 어느 학교의 삼차 공고를 뒤늦게 발견하고서, 부랴부랴 서류 작업을 했다. 그런데, 공고문에 접수 이메일 주소가 없는 거다. 다시 공고문을 찬찬히 읽어 보니 교무실로 직접 접수하라고 되어 있다. 헉! 마감까지 한 시간 남았는데.. 일단 필요한 각종 서류들을 인쇄하고, 클립으로 분류해서 누런 서류봉투에 넣으면서 계속 갈등을 했다. '가지 말까?' 네비에는 28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고 나오는데, 집에서 나선 시간이 3시 20분이었다.


운전에 집중하기 위해 일부러 음악도 틀지 않고, 노란 신호등에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학교 주차장에 도착하여 3시 50분에 교무실 문을 열고 서류 바구니에 봉투를 떨굴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숨 가빴던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해 피아노 곡을 틀고, 한결 여유 있는 마음으로 운전을 했다.

그래.. 짱짱한 직장 다니던 남자들도 퇴사하는 나이인데, 경단녀가 전공도 아닌 과목을 가르치는 건 대단한 거다.

’되면 되는대로, 안되면 안되는 대로 마음 편히 먹자.‘라고 생각을 정리했다.


오늘도 역시 10시 영어 회화 수업을 놓치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어느 늙은 경단녀의 구직일기 3


오늘 면접을 연속해서 두 군데를 봤다.

첫 번째 학교에서는 긴장도 안 했었는데, 교감 선생님으로 보이는 면접관이 "자기 소개해 보라"는 말에 내 소개를 하다가 갑자기 목소리가 떨렸다. 떨리는 내 목소리에 내가 놀라게 되어 더 떨려서 말하는데 숨이 찼다. 다행히 숨이 끊어지기 바로 직전에 문장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면접 분위기는 언제나 그렇듯이 호의적이고 긍정적이었다.

면접관의 이러저러한 질문에 대답을 하다 보니, '자기소개서'에는 쓰지 않았던 내용들도 말하게 되었다. '언니가 뉴욕에 살아서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어학원도 다니게 됐었다'라고 하자, 면접관은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희미하게' 반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내 눈에 뜨일 수밖에 없었다.


면접을 마치자마자 십오 분 거리의 두 번째 학교로 급하게 이동을 했다.


이 학교의 교감 선생님인지 유일한 남성 면접관이 교재에 대해서 태클을 걸어온다. 양 옆의 학부모 면접관들은 교재를 펴보면서 어떤 식으로 운영할 거라는 내 설명에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가운데 앉은 남성 면접관은 대놓고 표정이 안 좋다. 못마땅하다는 듯한 "쩝"하는 소리도 들은 것 같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면접 많이 봤지만 이런 면접관 태도는 처음 봤다.


원래 두 곳 다 내일 발표인데,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첫 번째 학교의 합격 통지 문자를 받았다.

아 다행이다.. 이력서 기타 서류 작업 또 안 해도 되니..


이번에는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었다. 여섯 번째 학교에서 된 거니까.

오히려 학교 강사를 처음 시작했던 재작년과 작년이 운이 참 좋았다고 볼 수 있다. 처음 이력서 낸 곳이 다 되었으니까.


잘 붙어 있어야겠다. 이 일도 앞으로 길어야 2년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애는 다 키워놨는데, 사회에서 날 필요로 하는 곳이 없다는 건 정말 “인생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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