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tlionheart Jun 02. 2023

<빗소리가 불러온 기억>


나의 모닝루틴은 쌓여있는 아침 설거지를 외면하고, 풀메이크업을 하고서, 삼프로티브이를 들으며 9시까지 프랜차이즈 카페에 출근도장을 찍는 것이다. 내가 지정석처럼 쓰고 있는 자리는 일자 테이블 위쪽으로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열 시쯤 되면 해가 쨍하게 들어와서 블라인드를 창틀까지 내려줘야 한다.

장이 열리면 내가 갖고 있는 종목들의 빨간 숫자와 파란 숫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지켜보며, 외국인 매수와 차트 등락을 체크한다. 그리고 교재 주문, 학교 서류 이메일 등 자잘한 업무를 처리하고 나서, 두세 권 돌려가며 읽고 있는 책들을 펼쳐본다.


오늘은 집에서 나올 때 9월 하순의 가을바람이 선선하니 기분이 좋았다. 이 계절 특유의 그야말로 하늘색인 하늘이 멀고도 높아 보였다.

루틴에 따라 지정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밖이 어두워지더니 후드득후드득 비가 쏟아진다. 나는 유리창을 흘러내리는 빗방울들을 홀린 듯이 바라본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릴 때마다  “땅 땅 땅 땅” 가볍고 맑은 소리를 낸다. 양철북 두드리는 소리다! 그러고는 부딪힌 순서대로 물방울들이 창을 타고 내려온다. 아직 따뜻한 에티오피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나는 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 근데 나는 양철북 소리를 실제로 들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났다. 내가 기억하는 소리는 고등학생 때 봤던 19금 영화 <양철북>에서 소년이 북을 치며 행진을 하는 장면이었다. 그때는 참 난해한 영화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보면 배우들의 심리를 잘 알 것만 같다. 소년의 북 치는 장면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이 나는 이유를 나름 분석해 본다. 참고로 나는 원인과 결과 분석이 취미이다.

그것은 아마도 엄마 몰래 성인영화 비디오를 돌려 본 십 대 소녀의 긴장감과 불편한 감정이 북소리와 함께 기억 저편에 묻혀버렸기 때문일 거라 추측해 본다.

이전 01화 <비 오는 날의 선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