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거리: 2335.07km, 누적시간: 473시간 0분
표지사진: 서울시 강동구 상일동, ‘고덕 가는 길’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태어난 곳, 내가 가장행복했던 곳, 내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 그곳에 꼭 한 번은 가 보고 싶은, 오늘 나는 그 기억을 찾아 걷고 생각하고 씁니다.
눈을 감으면 누구나 아련해지는 시절이 있다. 내게는 1984년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부터 5학년 봄까지의 그 시간들이 유독 꿈같은 시절이었다. 40년이 훌쩍 지난 오늘, 나는 걸어서 그곳으로 간다.
고덕동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 분명 6월보다 좋은 5월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녹색이 화려한 계절, 창문을 열면 푸르른 나무들이 찬란한 몸매를 뽐낸다. 사실, 며칠 전부터 마음이 설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던 동네였을텐데, 벌써 40년이 지난 곳을 지금에서야 나는 찾아간다. 오늘 그 설렘이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24년 5월 19일, 오늘 나는 ‘고덕동’엘 간다.
어렸을 때, 참 가난하게 살았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그들의 인생이 건강했을지라도, 가난 때문에 아픈 기억도 많았을 거라 생각한다. 난 그 가난을 뒤로하고 도망쳐 나온 첫 번째 아들이었고,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불효이기를 바랐다. 그러한 부모님 인생에도 딱 한번 ‘우리 집’이 있었을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이 내가 초등학교 3학년 12월에서 5학년 5월까지의 일이었고, 꼭 우리 집이어서가 아니더라도 그 동네에서 뛰어놀고 공부하던 시절이 내내 꿈같았다.
1984년 서울 강동구 고덕동은 ‘고덕주공아파트’를 중심으로 대단지의 아파트 건축이 이루어졌다. 주공 1단지부터 9단지까지 총 1만 세대가 넘었으니, 고덕 주공은 잠실이나 둔촌 주공에 못지않았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현재 상일동역 8번 출구와 맞붙어 있는 고덕주공 3단지였다. 지금은 ‘명일공원’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는 뒷동산은 겨울이면 비닐포대로 눈썰매 타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었고, 평소에는 매일 같이 ‘오징어가이상’ 게임으로 밤이 오는 줄도 모르고 놀았었다.
그 시절의 1년 반을 생각하면, 독특한 기억들이 너무나 많다. 토지 개발이 한창 진행되고 도로가 생기는 시절이라 산을 파헤친 지역이 많았고, 온 동네방네 뛰어다니면서 산속의 수정을 캐어서 맛보고 놀던 기억도 생생하다. 왜 그렇게 흙에서 막 퍼낸 수정돌을 맛봤는지. 시큼한 맛이 나는지에 따라 서로 좋은 돌이네 아니네 하면서 논쟁을 하였고, 수정돌을 물속에 집어넣으면 자란다고 해서 어항 속에 채워놓고 매일 같이 얼마나 컸는지 확인하고 그랬었다.
또 하나 기억에 많이 남는 것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꼭 중앙차선을 밟으며 걸어왔던 일이다. 인도를 내버려 두고 차도내의 중앙차선으로 걷다가, 그 노랑선을 벗어나면 지옥불이라고 애들하고 낄낄거리며 걸어왔던 일. 그리고 어떤 전단지 돌리는 아저씨가 그가 돌려야 할 전단지를 수북이 주면서, 이거 2단지하고 3단지 다 돌리면 1천 원을 주겠다고 하여 애들하고 낑낑거리며 다 돌리고 났더니 겨우 500원으로 흥정하고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던 일. 당시 우리 아파트는 5층짜리라 한참을 걸어 명일동 삼익아파트까지 걸어가서 엘리베이터 타고 놀던 일 등등.
공부도 꽤나 잘했었다. 4학년 여름 기말고사 끝나고였나? 선생님이 기말고사 10개 이내로만 틀린애들 한 명씩 불러 내어 애들 앞에서 칭찬해 주었는데, 나도 그때 9개밖에 틀리지 않아 칭찬을 받고 우쭐대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난번 시험은 몇 개 틀렸었지?”라는 선생님 질문에, ”21개요! “라고 대답했더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었다. 그때 내가 좋아하던 여자애가 7개를 틀렸는데, 그 애 앞에서 떳떳하게 설 수 있어서 좋았던 감정이 지금도 남아있다. 인기도 많았었다. 애들하고 학교나 집 근처 놀이터에서 테니스공으로 ‘짬뽕’하고 놀면 항상 나는 인기쟁이로 잘 모셔가고는 했었던 것 같다. 그 기분으로 애들 즐겁게 해 주고, 공부도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는데 말이다.
고덕동은 그렇게 나를 인생 최고의 상류층으로 하나하나 만들어 내던 동네였었다. 그런데, 갑자기 5학년 한창 나무가 푸르른 봄에 말이다. 어린이날이 지나고 얼마 안 있다가 갑작스레 우리는 전에 살던 동네로 다시 이사를 가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그 찬란한 5월이 너무 행복했었는데, 전학가는 6월은 너무나 참혹했다. 캄캄해서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반지하 주택으로 이사를 가면서, 나는 이후 초등학교 내내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지게 되었다. ‘왜? 왜 우리 집을 놔두고, 남의 집 그것도 반지하로 이사를 가야 하는 건데?’ 나는 정말, 정말 이해가 안 되었었다. 그렇게 공부도 잘했었고, 애들한테 인기도 많았었고. 지금도 그 마지막 5월, 여자 짝꿍이 가는 날까지 짜장면을 사주겠다고 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찬란했던 고덕의 봄이 아직도, 나는 꿈만 같다.
마포집에서 나와 ‘한강공원 마포나들목’으로 빠졌다. 오늘 코스는 한강고수부지를 통해 천호대교까지 걸은 다음, 천호동으로 넘어가서 고덕동으로 갈 계획이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또는 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다. 모든 사람들이 오월을 기다려 봄을 만끽하고 있다. 저마다 한강에 나온 목적은 다르지만, 행복해 보이는 것을 숨길수는 없었다.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공기도 깨끗하다.
작년 6월부터 걸었으니 이제 곧 1년이 된다. 그 1년 동안 운동화를 세 번이나 갈아 신었다. 처음에 신었던 나이키 신발은 4년 전에 사서 작년에 처음 신었었는데, 굉장히 좋은 신발이라 아주 오랫동안 많은 걸음을 걸었던 것 같다. 신발 밑창이 다 떨어질 때까지 애착을 가지고 신다가 지난 1월에 기존에 원래 신었던 신발로 갈아 신고, 다시 지난달에 다른 새 신으로 또 한 번 갈아 신었다. 운동화를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켤레를 신은 적도 없었다. 전부 나의 기록이고 영광이다.
한강공원 북단으로 해서 천호대교까지 걸어 본 적은 없었다. 대개는 반포대교에서 잠수교를 타고 강남으로 넘어간 적은 많았고, 지난번 성수동을 갈 때 뚝섬까지가 처음이었다. 잠실을 거쳐 남한산성을 갈 때에도 그때에는 한남대교 남단으로 해서 잠실대교까지가 내가 맛보았던 한강대교의 마지막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것까지는 좋은데, 또 오랫동안 걷다 보니 더워지기 시작했다. 아침 최저기온은 16도였지만, 오후 최고 기온은 무려 27도로써 온도차가 10도가 넘었다. 한강대교를 지나 동작대교, 그리고 반포대교로 걷는다. 가는 길에 양귀비과에 속하는 ‘금영화’가 한창이다. 보통은 8월에 핀다고 하는데, 이 녀석은 조금 일찍 세상엘 나왔다.
한남대교를 지나 동호대교를 지난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조금 낙후되어 있고, 이를 통해서 뛰는 사람과 걷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랫동안 걷다 보니 한강 내에서도 제각각 코스가 있고 유턴 지역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보통 반포대교에서 한강대교로 왔다 갔다 하거나, 마포대교에서 성산대교를 왔다 갔다 한다. 그 외 지역은 조금 어둡거나 길이 협소하다. 그리고 성수대교와 영동대교를 지나면 다시 뚝섬지역으로 활발해진다. 각각의 동네마다 한강으로 나오는 나들목과 공원 위치에 따라 운동하는 코스가 대개 정해져 있는 듯하다.
중랑천과 한강의 합류지점에 ‘용비쉼터’라고 휴게소가 있다. 이곳은 자전거 라이더들의 휴게 필수 지점이다. 북쪽, 동쪽, 서쪽에서 오는 모든 라이더들의 합류지점이면서 자전거를 배치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이 매우 넓은 편이다. 중랑천의 하얀 물줄기가 힘차게 한강으로 빠진다. 중랑천교를 넘어서 다시 천천히 성수대교를 향해 걸었다. 가는 길에 나무 그늘이 없어서 땀이 쉬이 흘렀다. 성수대교 북단으로는 ‘서울숲’과 이어지는데, 맘 같아서는 서울숲에도 들러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직 고덕동까지는 반도 오질 못했다. 성수대교를 지나 영동대교까지 오는데, 약 15km를 걸었다. 이제 시간은 오후 12시를 넘어가고 태양은 머리 위에서 절정으로 가고 있다. 5월의 한낮도 여름 못지않다.
성수대교, 영동대교를 지나 뚝섬 유원지에 도착했다. 나무 그늘 아래 사람들이 나들이를 나와 여기저기 즐겁다. 어린애들을 보니, 우리 딸아이도 생각이 난다. 이제는 저렇게 데리고 나와서 놀 수 있는 시절은 지났으니, 세월 참 빠르기도 하고 야속하다는 표현을 이때 쓰는 건가 싶다.
이전에는 뚝섬 유원지까지 걸어서 와 본 적은 있으나, 여길 지나서 천호대교까지 걷는 것은 처음이다. 뚝섬유원지는 전체 길이가 11km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공원이 시작되나 싶었는데, 한참을 걸어도 그 끝이 보이질 않았다. 공원 내 인공폭포를 시작으로 암벽등반, 수영장, 각종 체육시설 그리고 뚝섬을 대표하는 전시관인 ‘뚝섬자벌레’를 지나 장미정원까지 걸었다. 장미정원을 지나니 마지막으로 보이는 윈드서핑장은 이국적인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와! 서울에 이런 곳이 있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었다. 검게 그을린 탄탄한 몸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마치 마실 나오듯 자연스럽게 즐기는 모습은 완전히 새로운 문화적 충격이었다.
서핑장을 한 바퀴 휘돌고, 나는 다시 잠실대교, 잠실철교, 올림픽대교를 지나 천호대교까지 걸었다. 오후 2시가 가까워 오면서 태양의 열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체감 온도는 30도를 넘어서고 그늘도 없는 다리 위에서 땀이 뚝뚝 떨어진다. ‘이제, 이 다리만 건너면 드디어 강동구이구나.’ 가깝다는 착각만큼 힘이 나는 건 없다. 나는 마포대교부터 14개의 한강 다리를 품고 강동구로 간다.
천호대교를 건너 천호동으로 넘어왔다. 낡은 집들이 먼저 반긴다. 오랜만이네. 천호동에 언제 왔을까? 누군가의 부친상으로 강동성모병원에 온 적이 있었고, 그리고는 기억에 없다. 고덕동까지 겨우 4km 남짓 남았는데 천호동은 낯설다. 하긴 그 어린 시절에 나의 세력권은 고덕동 전부를 훑는다 해도 평생이 걸릴 일이고, 천호동까지 넘어오는 일은 절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예까지 오면서 한 끼를 먹지 못했다. 아침도 굶고, 오후 2시가 넘어간다. 살을 빼려고 걷는 것은 아니니까, 뭐든 먹어서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천호역을 지나 바로 옆 성내동으로 잠시 건너간다. 골목마다 곱창과 주꾸미집이 참 많네. 혼자서 먹을 집을 찾다가 마치 쌀국수의 고수를 만난 듯, ‘강호쌀국수’ 식당으로 들어간다. 여주인 혼자서 아담하게 운영하는데, 강호와는 거리가 멀었다. 간판을 자세히 보니 ‘강동쌀국수’이네. 강동구에서 파는 쌀국수 ‘강동쌀국수’를 난 왜 ‘강호’로 읽었을까? 피식 웃고는 잘 먹었습니다, 곱게 인사를 하고 나온다.
강동역을 지나, 길동 사거리를 건넌다. 길동생태공원까지 걸어가는 중에 화훼단지를 지난다. 진보라 꽃을 한 움큼 콧 속에 담고 노래를 흥얼거린다. 점점 고덕에 가까워지니 옛 생각이 물밀듯이 가슴으로 밀려든다. 지도에도 없는 멋진 카페를 지난다. 카페 앞에 놓여 있는 여럿 조각상들이 장난감으로 내게 다가온다. 나는 이미 1984년 초등 4학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드디어 40년 만에 고덕동엘 왔다. 고덕동에 한영고등학교가 있었는 줄은 몰랐다. 강동고등학교도 있다. 몰랐다. 아니, 고등학교뿐만이 아니라 지금 걸어가는 모든 길은 내가 걷던 흙길이 아니다. 아파트는 이제 모두 엘리베이터를 소유하고 있다. 5층짜리는 어딜 봐도 없다. 그렇겠지. 차라리 눈을 감고 머리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길을 걷는다. 경계가 없는 산속이 정겹다. ‘그래! 이 산이었지. 친구들과 뛰어다니며 수정돌을 캐던 곳 말이다’ 모든 공기가 그리움을 넘어 1984년 그때의 내음으로 내 발걸음을 인도한다. 이제 가야 할 곳은 내 그리운 초등학교, ‘서울고일초등학교’다.
아주 새것 같은 학교를 본다. 내가 엄청나게 행복했던 학교다. 1984년 그때에도 신축이어서 학교는 새것이었는데, 2024년 지금 학교도 너무나 밝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 교정을 걷는다. 두리번거리며 아주 희미한 기억을 계속 모아서 한 움큼을 만든다. 그리고 지금 내가 바라보는 모든 곳에 조각을 맞춘다. 운동장, 놀이터, 철봉. ‘그래! 모습은 달라졌어도 그 위치에 그대로 있구나.’ 기다려준 듯, 나는 그들을 만나고 어루만진다.
그런 생각을 늘 해 온 것 같다. ‘내가 만일 그때, 이사를 가지 않고 여기 고덕동엘 계속 살았다면. 나는 어쩌면 공부도 더 잘하고, 더 행복한 성인으로 자라지 않았을까?’ 택도 없을 테지만, 이미 과거가 아닌 이상 나는 얼마든지 그런 꿈을 꿀 수 있다. 그래서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그때 그 고덕의 1년 반을, 내 생애 최고로 행복했던 날이라고 치부하나 보다. 그래서 좋다. 그렇게 꿈꿀 수 있어서 참 좋다.
마지막 걸음으로 내가 살았던 고덕 주공 3단지 아파트를 방문했다. 우리 집 302동 아파트,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던 놀이터, 뒷산의 언덕배기가 다 사라졌지만 그곳엔 1984년 어린 내가, 그대로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서로 조우하고, 마주 보고 인사를 했다. 나보고 다 컸다고 말하는 녀석에게, 너는 여전히 그대로구나 깔깔거리고 나는 다시 마포로 돌아간다.
오늘, 1984년 하루가 참 행복했다.
- 끝
<Mapogundal’s Photo, 끝나지 않은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