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거리: 2376.48km, 누적시간: 480시간 40분
표지사진: 서울시 강남구 일원1동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태어난 곳, 내가 가장행복했던 곳, 내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 그곳에 꼭 한 번은 가 보고 싶은, 오늘 나는 그 기억을 찾아 걷고 생각하고 씁니다.
동구 밖으로 논밭이 펼쳐져있고 방앗간에는 새벽부터 쌀딩기를 태우는 냄새가 지천으로 흐른다. 겨울이면 썰매를 끌고, 잔칫날에는 닭모가지를 직접 비틀어 잡던 곳. 나는 1980년대 서울 강남의 깡촌을 걷는다.
일원동
오늘의 걷기 목적지는 일원동이다. 유년 시절의 대부분과 그리고 성인이 된 후 독립할 때까지, 근 18년을 살아왔던 나의 고향. 옛날에는 일원동이라는 이름보다 ‘대청(大淸)마을‘로 많이 불렸다. 지금도 대청마을은 곳곳에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데, 지하철 3호선 ’ 대청역‘이 그렇다.
대청(大淸)마을은 서울시 강남구 일원동에 있는 자연 마을이다. 마을로 조성되기 전 일원2동 주민센터 위치에 99칸 한옥이 있었다고 한다. 탄천을 건너면서 잠실 일대를 바라보면 99칸 한옥의 대청마루가 보인다고 하여 일대를 대청마을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983년까지의 대청마을은 대부분 논농사를 지어 살았던 서울 강남의 깡촌에 불과했다. 딱히 대중교통이 없어서 버스를 타려면 대치동 ‘은마아파트’까지 걸어가거나, 아니면 천호동이나 마장동으로 갈 수 있었던 버스는 일원동 ‘중산고등학교’ 자리에 가야 탈 수 있었다. 봄이면 광수산 끝자락에(현 서울삼성병원 일대)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었고, 산속의 반공호를 돌며 놀다가 땅벌에 얼굴이 진탕 물려 된장 바르던 일, 참외는 물론 그게 무어이 맛있다고 ‘가지’까지 서리하면서 놀던 곳으로 내게는 아련한 꿈이다.
1년 전 걷기를 시작하면서 내가 밟았던 서울 시내 동네가 200여 곳이 넘지 않았을까 싶다. 일단 25개의 자치구는 전부 돌았고, 총 424개의 행정동을 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그 절반 정도의 장소는 가본 듯하다. 오늘도 일원동을 목적지로 걷지만 결국 수서동, 개포동, 도곡동, 대치동까지 두루두루 걸쳐서 이동할 생각이다. 우선,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수서역으로 간다. 그곳엔 내가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녔던 ‘서울왕북초등학교‘가 있다. 40년 만의 방문이다.
마포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수서역에 내렸다. 막힘없이 빠르게 와도 1시간이 넘는 거리이다. 6월이 시작되는 일요일 아침은 벌써부터 태양빛이 머리 정수리에 불침을 꽂는다. 수서역 입구로 나오자 햇살에 눈이 자동으로 찡그려졌다. 예부터 이 동네는 조용조용했는데, 오늘도 그렇다. 지나다니는 사람보다도 산새들이 먼저 마중 나와 있다.
수서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왼편으로 자곡동과 세곡동, 그리고 저 앞으로 대모산이 펼쳐져 있다. 현재는 ‘광평로’라 불리는 6차선 도로는, 어렸을 때 겨우 버스 한 두대가 겹치며 지나갈 정도로 작은 농로(農路)였었다. 우리는 방과 후 고학년 선배들을 따라 일렬로 서서 집에 돌아가곤 했었는데, 길가의 코스모스 꽃잎에 꿀벌이 살랑거리면 실내화 두 개로 겹쳐 잡던 일이 생각난다. 꼬리에서 자그마한 독침을 뽑아내기만 하면, 그렇게 재미있는 장난감도 없었다.
내 기억에 왕북초등학교 옆으로는 커다란 창고 건물이 있었고, 그리고 어떤 커다란 대문 틈으로 들여다보면 그 안에 보자기가 살포시 문지방 아래로 삐져나온 집 한 채가 있었다. 밤 12시만 되면 그 보자기가 스르륵 빠져나와 온 동네를 휘젓고 날아다닌다고 해서 엄청 무서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도 친구들과 한 두 차례 그 보자기를 본 적은 있지만, 밤 중에 날아다니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오늘은 그 보자기 귀신을 볼 수 있을까?
수서역에서 나와 광평로 뒷 길을 따라 걸었다. 왕북초등학교 가는 길에 먼저 도착한 곳은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묘역’이었다. 주변으로 돌담이 길게 늘어서 있고, 빨간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무래도, 보자기 귀신은 여기 같은데?
굳게 닫힌 빨간 대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눈이 노망 났는지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집중해서 눈을 부라려봐도 보자기는 찾을 수 없었다. 주변 CCTV가 어슬렁대는 나를 따라다녔다. 눈치가 보여 더 이상 살펴보기가 불편해졌다. 오늘 보자기 색깔이라도 확인하고 가려했건만, 그 기억이 환상이었는지 헷갈린다. 40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그것을 환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귀신은 아니더라도, 실제 보자기를 걸쳐 놓은 뭐라도 있겠지’ 싶었다. 이제는 보자기 귀신과 담소라도 나눌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 그때는 보였던 보자기를 지금은 볼 수 없으니 어쩌면 나는 동심의 눈을 잃은 어른이 되었나 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강남창고’가 보였다. 지어진지 벌써 50년도 훨씬 지났을 텐데, 그 창고는 자기 본업을 감추고도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뒤편으로 왕북초등학교가 얼굴을 삐죽 내밀고 있다. 먼 기억에 있었던 1층짜리 단층 건물은 사라지고, 복층에 다수의 건물로 둘러 쌓여있는 학교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너무도 달라진 모습에 도저히 옛 기억을 짜 맞추기는 어려웠다. 당시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반이 하나뿐이라 친구들끼리 6년을 함께 했었는데, 이제는 기억에만 존재하는 학교가 되어버렸다.
일원동 대청마을에 도착했다. 25년 전, 본가로부터 독립한 이후 거의 첫 방문이다. 지금은 부모님도 전부 시골로 내려가셨고, 따로 인사드릴 마땅한 곳이 없다. 여기 강남 깡촌이 신규 주택단지가 된 지도 벌써 40년이 지났고, 이제는 이 근방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 마을이 되었다. 집과 집 사이는 담장 하나로 서로에게 기대어 있다. 주택 앞 길가는 주차 공간이 크지 않다 보니 대문을 헐어 마당 안으로 차를 들여놓기도 하였다. 그리고 집 안과 밖, 그 경계의 선에 꽃을 심어 자연스럽게 자연과 어우러진 집들이 되었다.
어렸을 때 살던 집으로 가 봤다. 집은 그대로인데, 그 주변으로 많이 복잡해져 있었다. 어쩜, 카페도 생기고.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어 숨으로 내쉬어본다. 집의 담장벽을 쓰다듬듯이 손을 자라라라락 대면서 걸었다. 벽돌의 울퉁불퉁한 느낌이 옛날과 똑같다. 그 손가락 사이로 어린 시절 웃음소리가 간질거리며 끊이질 않는다. 나는 여기서 10원짜리 빈병을 팔기도 했고, 리어카를 끌어 동네 꼬맹이들 버스도 태워주곤 했었다. 서로 경찰과 도둑이 되어 온 동네방네 뛰어놀던 시절. 한나절을 담벼락 구석에 숨어 도둑이 되었던 시간. 한참을 찾지 못하는 동생들을 향해 멍멍 개소리를 짖어 내 위치를 노출시켰어도, 나를 한참을 못 찾을 때에는 그 희열감이 하늘을 찌르기도 했었다. 그 담과 집 사이로, 이미 흩어져 사라진 추억을 향해 나는 사진을 찍어 가슴에 담았다.
남아있는 친구들이 있을까? 옛 친구들을 우연히 마주칠 수 있을까? 기억을 살려 친구들이 살았던 집들을 찾아갔다. 하지만 어떤 집은 이미 리모델링을 하여 다세대 건물이 되어 있었고, 또 어떤 건물은 너무 낡아 아직도 저기 살까 싶어 체념을 한다.
우진탕이라고 동네 목욕탕 자리를 지나간다. 동네에 목욕탕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나는 또 그 건너편의 슈퍼마켓에서 우진탕이 사라진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당시 우진탕은 1층이 여탕이었는데, 건물 뒤편으로 해서 환풍기로 여탕을 몰래 엿볼 수 있었다. 결국 친구들을 잔뜩 모아 다시 가던 날, 여기 슈퍼마켓 주인에게 걸려 한참을 혼났던 기억들이 새록새록하다. 환풍기로 새어 나오는 그 뜨거운 김 사이로 눈을 초롱 대던 그 꼬맹이 시절이 너무나도 그립다.
수많은 세월만큼 동네 골목도 그 낡음이 대답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발을 뗄 때마다 ‘나는 여기에 다시 언제 오게 될까?’ 하며, 마치 되돌아올 수 없는 걸음마냥 발자국 도장을 찍었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이미 대형교회가 되어 있었고, 내가 다닌 고등학교도 첨단의 옷으로 갈아입고서는 나를 누군가 하며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는 듯했다. 굳이 내가 너의 학생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1990년 고등학교 여름방학 이후에 일원동을 떠나 잠시 전주로 내려갔었으니까.
특히 아파트와 도로로 분리되어 있던 중학교는, 이미 재건축된 아파트와 한 몸이 되어 어디가 경계인지도 모르게 길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니 벌써 햇살은 기울어 오후로 내려간다. 이제 슬슬 일원동을 넘어 개포동으로 가야 할 때이다. 예전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 “개포동은 개도 포기했던 동네였다”라고 말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개포동 주공 아파트들이 거의 대부분 재건축이 완료되어 엄청난 부촌을 이루었다. 가는 길 내내 입이 떠억 벌어진다. 예부터 개포 주공 1단지부터 4단지까지는 저층이고, 5단지부터 7단지는 고층, 8단지와 9단지는 공무원 아파트라고 했었는데. 이제는 어디가 저층이고 고층이고가 따로 없다. 오히려 고층에 속했던 7단지는 재건축을 앞두고 가장 낡은 모습으로 가장 높은 지대에 서 있다.
일원동에 살면서도 근처 개포동은 뚜렷한 추억이 많지 않다. 그저 오락실 때문에 개포 주공 4단지까지 와서 놀던 기억은 있지만, 그것도 잠시. 일원동에도 오락실이 우후죽순 생기면서부터는 발길을 딱 끊었었다. 개포동 가는 길 근처에 사시는 직장 상무님께 연락을 드려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셨다. 오래전에 개포 주공 아파트를 하나 사서 간직하고 계시더니, 이제는 레벨이 확 틀려진 부촌 어르신이 되어 버리셨다.
오후 세시가 가까워오면서 슬슬 몸에 피로가 쌓이기 시작했다. 마포집까지 걸어서 돌아가기에는 다소 무리일 듯싶었다. 개포 1단지부터 9단지까지 다 들러본 후에, 개포고등학교와 양재천을 건너 타워팰리스 그리고 대치동 은마아파트로 빠졌다. 온 김에 추억을 담아 은마아파트 단지도 한 바퀴 돌았다. 역시 낡음의 역사와 재건축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대단하고, 투자가 아닌 전세나 월세로 사는 사람들도 대단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주차도 어렵고 건물이 여기저기 부식되었어도, 자녀들 교육이라면 맹모의 삼천지교는 그들의 발가락에도 못 미치는 대단한 열정을 가진 분들이다.
은마아파트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청실아파트.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이, 우리나라 거의 최초의 세븐일레븐 편의점이 있던 자리가 은마아파트 건너편의 미도아파트 상가였었다. 1990년도인가, 미도아파트에 사는 친구를 따라 세븐일레븐에서 슬러쉬라는 것을 처음 사먹고 감탄했었던 추억이 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볼 수 있는 동네를 언제 다시 오겠냐 싶어, 꾹꾹 눌러 담아 계속 걸었다.
은마아파트를 나와 삼성로를 따라 선릉까지 걸었다. 이제 시간은 오후 4시가 훌쩍 넘어간다. 선릉에서 다시 논현동까지 가는 길에 잠시 더위를 식힐 겸,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렀다. 땀냄새가 슬그머니 올라오는 것에 나 스스로가 불편해졌다. 더위만 뺄 목적으로 아이스크림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금세 가게를 나왔다.
오전 해는 아직도 퇴근을 안 하고 쨍쨍하다. 분명 오늘은 작년 6월보다 더한 초여름이다. 강남에도 삐걱거리는 보도블록이 한 둘이 아니다. 시큰해진 발목도 쉬게 해야 하고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언제 올까 한참을 기다린다.
- 끝
오늘 나의 이야기는 ‘1년간 걷기 프로젝트’의 마지막 동네가 되었습니다. 기억편 세 곳인 내가 태어난 곳, 내가 가장 행복했던 곳, 나의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 세 편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나는 그리움을 행복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가능하다면 그리운 것들을 찾고 만져보는 일입니다. 그리움을 그리움으로만 남기지 말아야겠습니다.
<Mapogundal’s Photo, 끝나지 않은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