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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포걷달 Sep 04. 2024

FW #41, 기억 편- 가리봉동(26.03km)

누적거리: 2268.01km, 누적시간: 460시간 17분

표지사진: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 디지털로 21길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태어난 곳, 내가 가장행복했던 곳, 내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 그곳에 꼭 한 번은 가 보고 싶은, 오늘 나는 그 기억을 찾아 걷고 생각하고 씁니다.



기억 편- 그 첫 번째 이야기, ‘내가 태어난 곳’

어쩌면, 나의 마지막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막연하게 어렸을 때부터 궁금했으나 차마 묻지 못했던 장소가 있었다. 내가 태어난 곳, 꼭 가보고 싶었던 곳, 그러나 가지 못했던 곳.


가리봉동


살아본 적은 없었다. 그저 내가 태어난 동네였다는 것만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면서, 나는 왜 하필 전혀 연고도 없고 살아본 적 없는 ‘가리봉동’에서 태어났을까 궁금해했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엄마에게 물어보진 않았다. 물어볼 수 없었다.


엄마와 나는, 나이 차이가 ‘열아홉 살’이 난다. 그러니까, 최소한 고등학교 3학년 또는 막 졸업하고서 나를 낳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엄마의 주민등록번호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아래 삼촌들의 나이를 봐도, 엄마의 실제 나이는 한두 살 정도밖에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엄마가 젊다는 생각을 못했다. 그러다 성인이 된 후 생각해 보니, ‘아! 엄마가 나를 너무 일찍 낳으셨는데? 엄마가 나를 사고 쳐서 났나 보다’라고 막연하게 추측을 하게 되었다. 우리 집에는 엄마 아빠의 결혼식 사진이 없다.


내가 가리봉동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은 아주 어려을 때부터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늘 “너의 본적(本籍)은 어디니?”, “네가 사는 집은 어디니?”가 묻는 말의 다였고, 태어난 곳을 묻는 이는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부모님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동네가 60~70년대 수많은 여공(女工)들이 일했던 구로공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구로공단에서 일을 하게 된 건가? 거기서 아빠를 만나서 나를 낳았나 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사실을 물어보기가 뻘쭘해졌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이 막연하게 창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가리봉동은 구로동과 가산동 사이에 조그맣게 위치해 있다. 오늘은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 영등포를 지나 신도림, 그리고 옛 구로공단(현 구로디지털단지)을 갈 예정이며, 전체 왕복 거리는 약 23km 정도이다.

가리봉동은 구로동과 인접하는 경계의 작은 봉우리가 이어졌다는 데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옛 가리봉동의 대부분이 금천구 가산동으로 떨어져 나가 남은 작은 구역이 지금의 가리봉동이다
계획: 마포 > 여의도 > 영등포동 > 신도림 > 구로디지털단지 > 가리봉동 > 구로를 지나 귀가하는 코스이다. 전체 편도는 11km이며, 왕복 시 약 23km의 거리이다.



여의도, 찬란한 봄

진짜 ‘봄’이다. 4월의 마지막 주간이니, 날씨는 정말 좋았다. 하늘은 어쩜 이렇게 파스텔톤일까? 확실히 추운 겨울보다는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마포대로에 지나다니는 차들이 한적하다. 건너편에 길을 막았던 흔적을 보니 마라톤 대회가 있었나 보다. 강변북로에도 차들이 별로 없다. 다들 시외로 놀러 간 건지, 아니면 주일이라 교회를 갔을까? 마포대교에서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여유작작하고 찬란한 봄이다.

마포대교 북단 마포대로. 건너편 여의도 가는 방면으로 경찰관들이 한동안 막아 놓았던 바리게이트를 해제하고 있다
강변북로에는 지나가는 차들이 많지 않다. 이렇게 한가로울수가!
여의도의 모든 풍경이 파스텔톤의 하늘과 어우러져 봄을 만끽하고 있다
한강 위 보트 한대가 힘차게 봄을 질주한다


여의도를 지나는데 한 무리의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 몰려온다. 마라톤 경주를 마치고 돌아가는 모양새다. 원래 일요일의 여의도 일상은 매우 조용한 편이지만 오늘은 왁자지껄해서 좋다. 여의도를 지나 서울교를 건넌다. 서울교의 사자 동상이 봄을 깨우듯 힘차다.

LG그룹본사와 파크원 빌딩. 평일이 아닌 여의도는 대체로 한가롭다
여의도 공원에서 한 무리의 마라토너들이 길을 건너온다
서울교 사자상. 가만히 보면 이빨이 날카롭지 않다. 이빨을 갈아 먹으면 서울대를 간다는 낭설때문에 성할날이 없다고 한다.



영등포, 낡음과 익숙함 사이

서울교를 건너 영등포역에 도착했다. 영등포가 주는 막연한 느낌은 낡거나 오래됨이다. 그 둘을 안고 익숙해지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다. 지난 1년여간 이곳을 여러 차례 지나가면서 구석구석 눈에 담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영등포의 낡은 키치(kitsch)는 여전히 익숙지 않다. 최근 도시 재개발과 현대화가 진행되면서 더 깨끗하고 세련되게 변화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래된 정취를 잃지 않고 있다.


오늘은 경인로 큰길이 아닌, 한 블록 정도 뒷골목으로 빠졌다. 일요일은 대부분 문 닫은 공업사들뿐이고, 골목에는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 없이 적막했다. 그래도 봄이 왔다고 그 낡음마저 황색 빛깔이 부드럽게 느껴진다. 길 사진을 찍는다. 녹슨 문도 찍고, 세워져 있는 리어카도 찍었다. 담벼락 붉은 벽돌에는 세월이 그대로 묻어있다. 이 공간을 전혀 모르는 이들을 위해, 나는 탐험가가 된다.

〒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 컷트 4천원. 만원이면 두 번을 깍고도 남는다
이것이 ‘항암가발’인가? 감히 암 환자의 아픔을 논할수는 없지만, 가발이 매우 화려하다
영등포 경인로에도 움직이는 차들이 많지 않다.
큰 도로에서 벗어나 영등포 뒷골목으로 빠진다. 골목 사진을 자주 찍는 편이다. 낡음과 오래됨, 흔적과 세월, 그리고 모든 삶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 문래동 경인로88길 | 공장 한 구석에 나란히 서 있는 리어카는, 어제까지 누군가의 삶이자 동반자였다
붉은 벽돌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너를 보니 아련하다
녹슨 창틀은 공장을 보호한다. 공장은 그 덕에 오래도록 잘 살았다고 고백한다
담을 쓰다듬어 위로하듯이 걸었다. 나의 위로에 고맙다고 말한다
〒 문래동 사거리 | 창공을 휩쓸어가는 기다란 꼬리 구름이 봄을 쏜살같이 달린다
저 낡고 늙은 고목에도 여러송이 들국화가 봄으로 치장하고 있다
구로 ‘도림교’를 건너면 또다시 현대 건물이 하늘을 압도한다



도림천을 걷다 구로

신도림역, 도림교를 건너다 잠시 멈추었다. 계속 큰길로 갈지 아니면, 도림교 아래를 보니 도림천이 자꾸 아른거린다. 걸어보지 않은 길이다. ‘그래, 날도 좋은데. 항상 내 가슴이 원하는 대로 걸었으니까’ 그대로 도림천으로 내려갔다.

도림천은 안양천의 제1지류로써, 관악산에서 발원하여 관악구, 동작구, 영등포구와 구로를 거쳐 안양천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신도림역에서 바라 본 도림천

도림천의 물이 맑지는 않았다. 그리고 약간의 하수구 냄새가 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도림천으로 도심 여기저기의 하수구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큰 메기 한 마리가 물속을 휘저어 다닌다. 푸른 빛깔은 약간 오래된 이끼숲 같다.

진녹색의 묽은 하천에 큰 메기 두 마리가 유영하고 있다. 영화 ‘괴물’이 생각난다. 이런 하천에도 메기가? 돌연변이가 아닐까?


도림천변 위로 도림천로 고가가 기다랗게 복개하고 있다. 그것이 도림천변에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비를 피할 수도 있게 한다. 이 동네 사람이 아닌 이상, 도림천변을 걸을 일은 없을게다. 그동안 걸었던 홍제천이나 불광천, 양재천에 비하면 도림천은 긴 터널을 지나는 느낌이다.


그 안에서도 분명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약 3km를 걸어 ‘구로디지털단지역’ 근처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이곳은 개인적으로 익숙하다. 협력사 몇 곳이 ‘구로디지털단지’ 내 위치하고 있어, 나름 자주 온 편이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나 많이 왔으면서도 ‘가리봉동’에는 한 번도 가보질 못했다. 바로 코 앞인데 말이다.

도림천로 고가 밑으로는 보행길이, 옆으로는 자전거길이 형성되어 있다
지하철2호선 고가철길과 도림천로 고가도로가 나란히 도림천을 복개하고 있다
장기를 두는 노인들, 훈수를 두는 친구들, 구경하는 사람들
도심의 하수구가 군데군데 도림천으로 흐른다. 정화 시설은 갖추어져 있겠지만, 냄새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신도림역에서 출발하여 도림천을 따라 구로디지털단지역까지 걸어왔다



가리봉동, 50년 만의 해후

구로디지털단지도 국가산업지구라, 주말/주일에는 한적한 편이다. 호기심에, 일요일에 어느 식당이 문을 열었을까 유심히 보면서 걸었다. 이마트 구로점을 지나 디지털로를 따라 드디어 ‘가리봉동’으로 들어섰다. 겨우 1km 남짓이다. 이렇게 가까운 곳을 50년 만에 찾아왔다. 기분이 설레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영등포역 뒷골목 마냥 익숙지 않은 낡음으로 바뀌었다.

구로디지털단지 내, 대표적 건물 ‘대륭 포스트타워’. 이 지역은 ‘대륭’이 꽉 잡고 있는데 대륭 포스트타워 8차까지 분양되었다
다지털로를 따라 현대식 빌딩들이 정갈하게 지어져 있다
‘가리봉 교회’ 안내판이 가리봉동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사전에 가리봉동 지도를 미리 보고는 왔지만,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데에도 시간은 한참이 흘렀다. 대부분 평지는 별로 없고 골목마다 비탈길이다. 도로는 협소하면서도 언젠가의 재개발을 기다리는 듯,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낡은 집들을 서로 이어주고 있었다. 집집마다 외벽은 한국적이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졌다. 집 밖과 안이 구분이 안 갈 정도로 가리봉동은 낡음의 삶 속에서 지난날의 엄마와 나의 가난한 탄생을 투영하는 듯했다. ’여기 어딘가 내가 태어난 산부인과가 있었을 텐데‘ 하면서 두리번거렸지만, 50년이 흐른 지금 그 흔적을 찾기는 무리였다. 일단, 사람들이 복잡거릴만 한 ‘가리봉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서울시 구로구 구로3동을 지나 가리봉동으로 들어왔다. 집들과 계단이 오래된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정비된 중앙도로도 있지만, 대부분 좁은 골목들로 길이 이어졌다. 70~80년대에 지어진 집들과 현대의 빌라들이 우후죽순 뒤섞여 있다
도로 이름은 ‘디지털로’이지만, 실제 생활터전은 매우 아날로그틱하다
위 건물은 옛 가리봉동을 기리기 위한, 연출 건물이다
비탈 도로가 평평하지 않고 오르는 길마저 울퉁불퉁하다. 여기 어딘가에서 내가 태어나지 않았을까? 기억에도 없는 기억을 더듬으며 가리봉동 골목을 샅샅이 뒤졌다
주택 배란다가 아주 옛스럽다. 때로는 우리나라 건축 양식 같지 않은 건물들도 많이 보인다. 건물의 안과 밖은 서로의 낡음을 다르지 않게 공유하고 있었다


가리봉시장으로 내려가기 전, 골목 입구에 안내판이 보였다. 순간 멈칫했다. 거기에는 연도순으로 가리봉동 내 공단의 역사와 한 무리의 여공들 사진이 있었다.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저 막연하게, ‘엄마가 저곳에 있을까?’ 당치도 않은 상상을 하며, 그 시절 그들 사진 속으로 내 눈을 들이밀었다. 나는 한참을 뭉클한 기분으로, ‘화려한 봄’을 잊은 채 서 있었다.

1960~70년대 여공들의 사진을 한참동안 뚤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들속에서 왠지 젊고 이쁜 엄마의 모습을 찾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래, 그것은 설렘이 아닌 두려움이다
저 앞에 현대식 건물 앞 까지가 가리봉동의 끝이다. 저 아래 가리봉 시장으로 내려간다



연변도시가 된, 가리봉동

가리봉시장에 들어섰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 복작대었다면 좋았을 텐데, 시장은 크지 않았고 곳곳에 중국어 간판이 보였다. 시장을 금방 빠져나와 조금 큰 도로로 나서니, 여긴 ‘연변’이었다.

가리봉 시장 입구. 처마가 특이하다. 절대 한국스럽지 않다
일요일이어서인지,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이 얼마 없이 한적하다


생각을 못했다. 영화에서나 보았을법한 도시와 거리, 한글 간판보다 더 많은 듯한 한자. 젊은 사람들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다수가 중년의 남자나 간혹 여자, 그리고 생김새도 마땅한 한국사람이라기보다는 조선족 특유의 차림새. 거리 맵을 켜 보니, 거리 이름 자체가 ‘가리봉 연변 거리’이다. 예전 한국영화 ‘범죄도시’의 배경이 된 곳이란다. 사실 깊게 생각을 못했는데, 갑자기 이질감이 물살을 타고 내 안에 들어온다.

온 거리가 한자 간판 투성이다. 게다가 학생이나 젊은 사람들이 안보인다
한글로 씌어진 간판마자도 ‘연변’스럽다


거리의 풍경이 생각보다는 ‘범죄도시’에서 보았던 험악한 느낌은 없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대신에 여느 식당마다 중국어로 시끌벅적한 대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기도 했다. 단체로 앉아 수다를 떠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은 우리가 잘 알지만, 연변냉면이라… 궁금은 하다


군데군데 해진 한국어 간판과 중국어 간판, 그리 크지 않은 동네에서 느낄 수 있는 ‘서울이 아닌 듯한 이질감’이 내가 태어난 동네라는 감정을 더욱 멀게 만들고 있었다. 여기서 엄마의 과거를 찾고, 나의 탄생 사실을 대입시키기는 예상과 달리 매우 어려웠다. 내가 살아온 경험이 없는 곳인 데다, 생활하는 다수가 연변이나 중국, 조선족 사람들이다 보니, 이미 가리봉동은 과거의 내가 태어난 곳과는 정서가 멀어진 장소가 되어버렸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간판. 여인숙도 그렇고 전파사도 오랜만이다
골목 한쪽 ‘자금성무도장’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에서의 고단한 삶을 주말에라도 그들끼리 해소하는 듯 하다



인생에 없을, 점 하나를 찍고 오다

그래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나중에는 가리봉동 자체가 재개발이 되면서, 다른 동네에 편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잘 왔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억에도 없는 탄생의 기억을 안고 찾아온 나의 토지는 이질감을 넘어 생경함을 주었다. 언젠가 사라질 ‘몰디브’처럼, 언젠가는 없어질 것 같은 ‘가리봉동’에서 모히또 한잔을 해야 할까? 돌아오는 내내 서울이 아닌 서울에서 하루를 보내고 온 듯했다.


자기가 태어난 곳을 점찍듯 이정표를 남기고 올 일은 평생 없을 수도 있다. 미친듯이 걷다 보니 생각하게 되었고, 또 다녀오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몰디브라고 생각하니, 아득하다. 소멸하는 메모리를 마지막에라도 남긴 듯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또 구로동을 샅샅이 걸었다. 더 복잡한 ‘구로시장’엘 들어간다. 여기도 한자 간판이 곳곳이다. 다시 도림천을 넘어 영등포역 뒷길보다 두 블록 더 떨어진 뒷길로 돌아간다. 1년 동안 서울 시내를 온전히 돌았어도, 한치의 발끝만 옮기면 신세계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의도와 마포대교는 여전히 찬란한 봄으로 가득했다.


- 끝

마포 > 여의도 > 도림천 > 구로디지털단지 > 가리봉동 > 구로동 > 영등포 > 여의도 > 마포로 이어지는 총 26.03km, 31,926걸음


<Mapogundal’s Photo, 끝나지 않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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