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거리: 2268.01km, 누적시간: 460시간 17분
표지사진: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 디지털로 21길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태어난 곳, 내가 가장행복했던 곳, 내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 그곳에 꼭 한 번은 가 보고 싶은, 오늘 나는 그 기억을 찾아 걷고 생각하고 씁니다.
어쩌면, 나의 마지막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막연하게 어렸을 때부터 궁금했으나 차마 묻지 못했던 장소가 있었다. 내가 태어난 곳, 꼭 가보고 싶었던 곳, 그러나 가지 못했던 곳.
가리봉동
살아본 적은 없었다. 그저 내가 태어난 동네였다는 것만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면서, 나는 왜 하필 전혀 연고도 없고 살아본 적 없는 ‘가리봉동’에서 태어났을까 궁금해했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엄마에게 물어보진 않았다. 물어볼 수 없었다.
엄마와 나는, 나이 차이가 ‘열아홉 살’이 난다. 그러니까, 최소한 고등학교 3학년 또는 막 졸업하고서 나를 낳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엄마의 주민등록번호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아래 삼촌들의 나이를 봐도, 엄마의 실제 나이는 한두 살 정도밖에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엄마가 젊다는 생각을 못했다. 그러다 성인이 된 후 생각해 보니, ‘아! 엄마가 나를 너무 일찍 낳으셨는데? 엄마가 나를 사고 쳐서 났나 보다’라고 막연하게 추측을 하게 되었다. 우리 집에는 엄마 아빠의 결혼식 사진이 없다.
내가 가리봉동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은 아주 어려을 때부터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늘 “너의 본적(本籍)은 어디니?”, “네가 사는 집은 어디니?”가 묻는 말의 다였고, 태어난 곳을 묻는 이는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부모님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동네가 60~70년대 수많은 여공(女工)들이 일했던 구로공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구로공단에서 일을 하게 된 건가? 거기서 아빠를 만나서 나를 낳았나 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사실을 물어보기가 뻘쭘해졌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이 막연하게 창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가리봉동은 구로동과 가산동 사이에 조그맣게 위치해 있다. 오늘은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 영등포를 지나 신도림, 그리고 옛 구로공단(현 구로디지털단지)을 갈 예정이며, 전체 왕복 거리는 약 23km 정도이다.
진짜 ‘봄’이다. 4월의 마지막 주간이니, 날씨는 정말 좋았다. 하늘은 어쩜 이렇게 파스텔톤일까? 확실히 추운 겨울보다는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마포대로에 지나다니는 차들이 한적하다. 건너편에 길을 막았던 흔적을 보니 마라톤 대회가 있었나 보다. 강변북로에도 차들이 별로 없다. 다들 시외로 놀러 간 건지, 아니면 주일이라 교회를 갔을까? 마포대교에서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여유작작하고 찬란한 봄이다.
여의도를 지나는데 한 무리의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 몰려온다. 마라톤 경주를 마치고 돌아가는 모양새다. 원래 일요일의 여의도 일상은 매우 조용한 편이지만 오늘은 왁자지껄해서 좋다. 여의도를 지나 서울교를 건넌다. 서울교의 사자 동상이 봄을 깨우듯 힘차다.
서울교를 건너 영등포역에 도착했다. 영등포가 주는 막연한 느낌은 낡거나 오래됨이다. 그 둘을 안고 익숙해지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다. 지난 1년여간 이곳을 여러 차례 지나가면서 구석구석 눈에 담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영등포의 낡은 키치(kitsch)는 여전히 익숙지 않다. 최근 도시 재개발과 현대화가 진행되면서 더 깨끗하고 세련되게 변화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래된 정취를 잃지 않고 있다.
오늘은 경인로 큰길이 아닌, 한 블록 정도 뒷골목으로 빠졌다. 일요일은 대부분 문 닫은 공업사들뿐이고, 골목에는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 없이 적막했다. 그래도 봄이 왔다고 그 낡음마저 황색 빛깔이 부드럽게 느껴진다. 길 사진을 찍는다. 녹슨 문도 찍고, 세워져 있는 리어카도 찍었다. 담벼락 붉은 벽돌에는 세월이 그대로 묻어있다. 이 공간을 전혀 모르는 이들을 위해, 나는 탐험가가 된다.
신도림역, 도림교를 건너다 잠시 멈추었다. 계속 큰길로 갈지 아니면, 도림교 아래를 보니 도림천이 자꾸 아른거린다. 걸어보지 않은 길이다. ‘그래, 날도 좋은데. 항상 내 가슴이 원하는 대로 걸었으니까’ 그대로 도림천으로 내려갔다.
도림천은 안양천의 제1지류로써, 관악산에서 발원하여 관악구, 동작구, 영등포구와 구로를 거쳐 안양천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도림천의 물이 맑지는 않았다. 그리고 약간의 하수구 냄새가 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도림천으로 도심 여기저기의 하수구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큰 메기 한 마리가 물속을 휘저어 다닌다. 푸른 빛깔은 약간 오래된 이끼숲 같다.
도림천변 위로 도림천로 고가가 기다랗게 복개하고 있다. 그것이 도림천변에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비를 피할 수도 있게 한다. 이 동네 사람이 아닌 이상, 도림천변을 걸을 일은 없을게다. 그동안 걸었던 홍제천이나 불광천, 양재천에 비하면 도림천은 긴 터널을 지나는 느낌이다.
그 안에서도 분명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약 3km를 걸어 ‘구로디지털단지역’ 근처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이곳은 개인적으로 익숙하다. 협력사 몇 곳이 ‘구로디지털단지’ 내 위치하고 있어, 나름 자주 온 편이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나 많이 왔으면서도 ‘가리봉동’에는 한 번도 가보질 못했다. 바로 코 앞인데 말이다.
구로디지털단지도 국가산업지구라, 주말/주일에는 한적한 편이다. 호기심에, 일요일에 어느 식당이 문을 열었을까 유심히 보면서 걸었다. 이마트 구로점을 지나 디지털로를 따라 드디어 ‘가리봉동’으로 들어섰다. 겨우 1km 남짓이다. 이렇게 가까운 곳을 50년 만에 찾아왔다. 기분이 설레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영등포역 뒷골목 마냥 익숙지 않은 낡음으로 바뀌었다.
사전에 가리봉동 지도를 미리 보고는 왔지만,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데에도 시간은 한참이 흘렀다. 대부분 평지는 별로 없고 골목마다 비탈길이다. 도로는 협소하면서도 언젠가의 재개발을 기다리는 듯,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낡은 집들을 서로 이어주고 있었다. 집집마다 외벽은 한국적이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졌다. 집 밖과 안이 구분이 안 갈 정도로 가리봉동은 낡음의 삶 속에서 지난날의 엄마와 나의 가난한 탄생을 투영하는 듯했다. ’여기 어딘가 내가 태어난 산부인과가 있었을 텐데‘ 하면서 두리번거렸지만, 50년이 흐른 지금 그 흔적을 찾기는 무리였다. 일단, 사람들이 복잡거릴만 한 ‘가리봉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리봉시장으로 내려가기 전, 골목 입구에 안내판이 보였다. 순간 멈칫했다. 거기에는 연도순으로 가리봉동 내 공단의 역사와 한 무리의 여공들 사진이 있었다.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저 막연하게, ‘엄마가 저곳에 있을까?’ 당치도 않은 상상을 하며, 그 시절 그들 사진 속으로 내 눈을 들이밀었다. 나는 한참을 뭉클한 기분으로, ‘화려한 봄’을 잊은 채 서 있었다.
가리봉시장에 들어섰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 복작대었다면 좋았을 텐데, 시장은 크지 않았고 곳곳에 중국어 간판이 보였다. 시장을 금방 빠져나와 조금 큰 도로로 나서니, 여긴 ‘연변’이었다.
생각을 못했다. 영화에서나 보았을법한 도시와 거리, 한글 간판보다 더 많은 듯한 한자. 젊은 사람들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다수가 중년의 남자나 간혹 여자, 그리고 생김새도 마땅한 한국사람이라기보다는 조선족 특유의 차림새. 거리 맵을 켜 보니, 거리 이름 자체가 ‘가리봉 연변 거리’이다. 예전 한국영화 ‘범죄도시’의 배경이 된 곳이란다. 사실 깊게 생각을 못했는데, 갑자기 이질감이 물살을 타고 내 안에 들어온다.
거리의 풍경이 생각보다는 ‘범죄도시’에서 보았던 험악한 느낌은 없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대신에 여느 식당마다 중국어로 시끌벅적한 대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기도 했다. 단체로 앉아 수다를 떠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군데군데 해진 한국어 간판과 중국어 간판, 그리 크지 않은 동네에서 느낄 수 있는 ‘서울이 아닌 듯한 이질감’이 내가 태어난 동네라는 감정을 더욱 멀게 만들고 있었다. 여기서 엄마의 과거를 찾고, 나의 탄생 사실을 대입시키기는 예상과 달리 매우 어려웠다. 내가 살아온 경험이 없는 곳인 데다, 생활하는 다수가 연변이나 중국, 조선족 사람들이다 보니, 이미 가리봉동은 과거의 내가 태어난 곳과는 정서가 멀어진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나중에는 가리봉동 자체가 재개발이 되면서, 다른 동네에 편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잘 왔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억에도 없는 탄생의 기억을 안고 찾아온 나의 토지는 이질감을 넘어 생경함을 주었다. 언젠가 사라질 ‘몰디브’처럼, 언젠가는 없어질 것 같은 ‘가리봉동’에서 모히또 한잔을 해야 할까? 돌아오는 내내 서울이 아닌 서울에서 하루를 보내고 온 듯했다.
자기가 태어난 곳을 점찍듯 이정표를 남기고 올 일은 평생 없을 수도 있다. 미친듯이 걷다 보니 생각하게 되었고, 또 다녀오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몰디브라고 생각하니, 아득하다. 소멸하는 메모리를 마지막에라도 남긴 듯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또 구로동을 샅샅이 걸었다. 더 복잡한 ‘구로시장’엘 들어간다. 여기도 한자 간판이 곳곳이다. 다시 도림천을 넘어 영등포역 뒷길보다 두 블록 더 떨어진 뒷길로 돌아간다. 1년 동안 서울 시내를 온전히 돌았어도, 한치의 발끝만 옮기면 신세계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의도와 마포대교는 여전히 찬란한 봄으로 가득했다.
- 끝
<Mapogundal’s Photo, 끝나지 않은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