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ke Crazy | 나는 걷고 생각하고 씁니다- Vol.2
어느새 더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폭염은 한낱 신기루였나 보다. 그래도 장장 34일을 괴롭히더니, 갈 때는 또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가을, 단풍이 가장 이쁠 오늘, 나는 오대산으로 떠난다.
아침 7시 전에 을지로 회사 앞에서 버스가 출발한다 하여 새벽 5시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마포 집에서 회사까지는 멀지 않지만 조금 더 일찍 도착하려고 6시 전부터 집을 나섰다. 바람이 차고 하늘은 흐렸다. 비가 언제 그칠까 싶어 우산 대신 우비만 챙겼다.
회사에 도착했다. 15분쯤 기다리니 버스가 도착했다. 새벽 6시 50분. 예약한 버스는 한눈에 봐도 새것처럼 보였다. 운전석에는 여러 방향의 카메라 화면을 비추는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무심코 뒤에서 지켜보다가 ‘저 정도면 운전하기 꽤 편하겠네’라는 생각이 들었고, 문득 ‘퇴직 후 관광버스 기사로 일하면 돈을 좀 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너무 뜬금없는 주제라 금방 접고, 출발하는 버스 의자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피곤이 풀리지 않아 금세 잠들고 말았다.
버스가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숲길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출발해 3시간쯤 걸린 것 같다. 오는 동안 비가 멈출 줄 알았는데, 안개비는 여전히 흩날리고 있었다. 단풍 여행철이라 그런지 도로에는 차량이 끊이지 않았다. 동료들과 가방을 챙겨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어디선가 낯설지만 강렬한 피톤치드 향이 콧속 깊이 밀려들었다. “와!”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코가 뻥 뚫리는 듯한 청량함이 온몸을 감싸고돈다.
20년 전, 지금의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오대산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겨울이었고, 전나무숲길에 하얀 눈이 가득 쌓여 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눈을 감으니 바람이 스르르 몸을 감싸며 그 시절 추억 속으로 스며든다. 반팔 차림에 추위를 느껴 우비를 꺼내 입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빗방울들이 후드득 소리를 냈다.
전나무숲길은 짧았다. 그러나 여운은 길다. 1km 남짓 거리에서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맑은 공기를 마시고 좋았다. 옆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질세라, 자기가 혼자 전나무의 숨을 모두 받아먹겠다고 가슴을 휘휘 젓는다. 안개비보다 더 얕은 비를 맞으면서 걷는 것도, 그 못지않은 꿈결이다. 그렇게 걸어 저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월정사 앞마당으로 들어간다.
비가 후두두둑 떨어지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하늘만 보고 ‘이 정도 비면 맞고 걸어갈만하지’ 했었다. 하지만 난관은 발아래에 있었다. 선재길의 총 거리는 9km, 어려운 길은 아니었지만 온 땅이 비로 인해 진창이었다. 물을 머금은 땅과 다시 그것을 내뱉는 질척 길에서 내 발은 이리 미끄러지고 저리 미끄러져 춤을 추었다. 월정사를 나와 내내 걷는 선재길이 아름다운 만큼, 아쉬움을 안고 걸었다. 하늘 좀 쳐다봤으면 싶었는데 계속 땅의 상태를 살피며 걸어야 했고, 단풍이 너무 아름다운데 하늘마저 파랬다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선재길은 총 다섯 개의 테마길로 구성되어 있다.
1. 산림철길(2km)
나무 데크의 평탄한 구간, 삼림욕 즐기기 좋은 길
2. 조선사고길(2.7km)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략을 보관하던 오대산 사고와 관련된 역사적인 구간
3. 거제수나무길(1.5km)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거제수나무가 주를 이루며, 잎과 수피를 활용해 편지를 썼던 전통의 길
4. 화전민길(1.9km)
일제강점기 때 오대산에 정착했던 화전민들의 흔적을 따라 걷는 구간으로, 출렁다리 등 다양한 구조물
5. 왕의 길(1.5km)
세조가 상원사 계곡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피부병을 치유했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명명된 길
그 길의 시작을 알리는 입간판이 서 있었고, 우리는 그 길의 특징을 곁눈질하여 다음 길의 상태를 예상하며 걸었다. 한참을 걷는데도 오전이면 그친다던 비는, 오히려 더 많은 안개비를 흩뿌렸다. 오대산 곳곳의 물줄기가 한데 뭉쳐 폭포로 내려오는 계곡은 마치 가을 단풍을 등목 하듯 시원하게 거침이 없었다. 붉은 단풍의 길을 열어 진짜 가을잔치에 잘 왔다고, 그렇게 환영할 수가 없다.
테마 길 하나하나 걷는 길마다 좋은 길도 있고 어려운 길도 있었다. 특히 좁고 발밑이 진탕인 길은, 맞은편에서 오는 등산객과 조우할 때마다 서로 양보하느라 걷는 데에 지체가 많이 되었다. 게다가 누군가 사진을 찍으면 덩달아 나도 멈추어 사진을 찍었다. 사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았다.
내내 걷는 길마다, 이 길을 언젠가는 맑은 날 다시 와야지, 꼭 와야지 하면서 걸었다. 그만큼 너무나 좋은 길, 지금도 진창만 아니면 사방이 아름다워 눈에 모든 걸 담고 싶은 욕심으로 가득한 길이었다. 붉은 초록잎이 낮 비에 젖어 더욱 찬란했고, 걷는 내내 계곡물소리는 합주곡처럼 리듬을 태워 대지를 출렁였다. 오대산을 자주 오지는 못 하겠지만 젊은 날 아내와의 추억과 지금 경험만으로도 살가운 기억이 될 것만 같다.
분명 어렵지 않은 길이라 생각하면서도, 비 오는 날은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라고 적는다.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비 오는 날은 가지 말라고) 알리고 싶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걷는 사람들마다 느끼는 마음은 다를 테니 섣불리 말하긴 어렵다. 비가 오면 이런 느낌이 있고, 맑은 날엔 또 다른 감상이 있을 테니, 직접 오셔서 한 번쯤 걸어보시길 권하고 싶다. 안개비로 우수에 젖은 단풍도 햇살 단풍 못지않다. 이쁘구나.
마지막 테마길이 ‘왕의 길’이라 하여 다소 편할 줄 알았는데, 완전히 오산이었다. 오대산도 아닌 오산이라니. 마지막 코스에서 계곡물이 제법 불어나 건너기 만만치 않았다. 통나무와 돌덩이를 아슬아슬하게 밟으며 조심스레 건너는데,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동료가 내민 손을 붙잡고 겨우 건넜다. 왕도 이런 길을 걸었을까 싶었다. 아마 힘 좋은 신하 서너 명이 왕을 안고 건넜겠지.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삐끗해 왕을 계곡에 빠뜨렸다면? 그런 상상을 해 본다. 그 신하는 과연 죽음을 면했을까? 거의 다 온 길에서 혼자 키득거리며 쓸데없는 망상을 해본다.
길이 좋아지는 걸 보니, 선재길의 끝에 다다른 듯하다. 신발은 물론 옷 밑단까지 진흙투성이가 되었고, 웃옷은 땀에 젖은 건지 비에 젖은 건지 모를 정도로 축축했다. 원래는 도착 지점인 ‘상원사’를 한 바퀴 둘러볼 생각이었지만,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버스를 기다리며 내가 걸어온 길을 시작으로 거꾸로 내려가는 등산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잣말을 한다. ‘잘 다녀오시오. ‘왕의 길’만 잘 건너가시면, 오히려 화전민의 길이나 민초들이 걷는 길은 평안할 겁니다 ‘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다. 그래도 산은 온통 단풍으로 화려하다. 오대산에 올 이유, 좋았다.
- 끝
안녕하세요? 마포걷달입니다. 새로운 ‘나는 걷고 생각하고 씁니다’의 2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연재는 아니지만, 틈틈이 걷기를 통해 얻은 삶의 감성을 글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