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의 한인 플로리스트, 김희애 선생님
며칠 후, 둘째 딸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이 있다. 한 학교에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두 있다 보니 지금까지 따로 입학식이나 졸업식을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도 특별한 행사가 없었다. 그저 고등학교의 마지막 시험을 치른 후 학교 앞에서 물총싸움을 하며 놀거나 물감풍선을 던지며 노는 게 다였다. 그런데 이번엔 웬일로 초등학교 졸업식을 한다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졸업식 꽃다발이었다. 나는 바로 베아투스 꽃집 사장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졸업식 꽃다발 주문하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어머, 벌써 졸업이에요? 그럼요, 당연히 되죠!"
이탈리아 말을 아직 잘하지 못해 꽃가게에 가도 내가 원하는 꽃다발을 주문조차 하지 못하는 나에게 이렇게 메시지로 편하게 꽃다발을 주문할 수 있는 곳이 밀라노에 있다는 사실이 무척 감사했다. 아이의 생애 첫 졸업식을 아름다운 꽃과 함께 마음껏 축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동안 아기가 태어났다고 축하 꽃다발주문하신 손님,
누군가 돌아가셨다고 근조 꽃을 주문하신 손님, 생일축하 꽃을 주문한 손님,
일을 그만둔다고 주문한 꽃까지. 주문이 한꺼번에 들어온 적이 있었어요.
그날, 이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의 시작과 끝 그리고 즐겁거나 기쁠 때
또는 슬플 때까지. 평생을 함께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제가 하는 일이 굉장히 의미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더 큰 사명감이 절 휘감았던 것 같아요."
단순히 꽃을 파는 가게가 꽃집이라고 생각했는데, 김희애 플로리스트의 말을 들으니, 인간의 희로애락과 함께 하는 곳이 바로, 꽃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도시 밀라노에서 한인 꽃집을 운영하며 경험했을 희로애락, 그리고 이 일에 대한 꿈과 비전을 조금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선량 : 지금까지 밀라노에서 플로리스트로 활동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벤트는 무엇인가요?
희애 : 작년에 어떤 미국 업체에서 연락이 왔었어요. 함께 웨딩을 하고 싶다고요.
포르또피노(Portofino)라는 곳이 있는데요. 제노바 쪽에 있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예요. 유명인이나 부자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유명하죠. 그곳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저와 함께 하고 싶다는 거예요.
아름다운 도시에서 직접 웨딩 꽃장식을 하는데 정말 너무 좋더라고요.
그런데 그 업체에서 또 연락이 왔어요. 9월에 토스카나 호텔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함께 하고 싶다고요. 참 감사한 일이죠.
선량 : 가게에서 꽃다발이나 꽃바구니를 만들어서 파는 것뿐만 아니라 이런 웨딩 꽃장식까지 모두 하시는 거군요? 그 규모가 작진 않을 것 같네요. 작업 시간도 꽤 걸리겠는데요?
희애 : 네. 맞아요. 특히 웨딩 꽃장식은 생화를 사용해야 해서 작업을 오랫동안 할 수가 없어요. 인력을 대거 투입해서 짧은 시간 안에 원하는 장식을 완성해야 하죠.
토스카나뿐만 아니라 시르미오네라는 지역에서 한번 더 있는데요, 거긴 제가 지금까지 했던 작업에 비해 규모가 훨씬 더 커서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선량 : 그래서 거절하셨나요?
희애 : 아니요, 결국 하기로 했어요. 한번 도전해 보고 싶더라고요. 일은 힘들지만, 그렇게 큰 이벤트를 하고 나면 제 경험치가 많이 올라가더라고요.
지금까지 작은 결혼식 준비는 저와 남편 둘이서 했었는데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필요한 인력도 늘어나고 있어요.
선량 : 세그라테(Segrate)라는 지역의 작은 꽃가게로 시작하셨는데 지금은 큰 웨딩의 꽃장식뿐만 아니라 대기업과 파트너로도 일을 하시니, 일의 규모가 커지면서 사업 범위도 넓어지고 있군요. 한국에서는 이럴 경우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던데..... "베아투스 프랜차이즈 사업" 어떠세요?
희애 : 저도 그 생각을 하긴 했었어요. 피렌체에서 연락이 자주 오거든요. 그래서 피렌체 분점을 하나 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선량 : 만약에 지역마다 베아투스 프랜차이즈 꽃집이 생긴다면 그건 정말 큰 사업이 될 것 같네요.
희애 : 그렇죠. 그런데 일의 영역이 넓어지는 만큼 저도 성장해야 하는데 저는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아서 고민이 됩니다.
선량 : 원래 성장 속도는 눈에 띄지 않죠. 매일 보는 내 아이가 자라고 있는 건지, 어떤 건지 모르다가 과거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컸는지 확연히 느끼는 것처럼 말이죠. 특히 자기 자신은 더 모르는 것 같아요. 오히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이 내 성장을 더 잘 알게 되죠.
마찬가지로 선생님은 여전히 그대로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주의 사람들은 베아투스의 성장을 확연히 느끼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경험은 정말 무시할 수가 없잖아요.
베아투스가 생긴 지 이제 3년이 좀 지났는데 벌써 이런 대규모의 이벤트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큰 성장의 증거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선생님께서 열심히 노력하셨기 때문이겠죠.
희애 : 사실 제 손가락의 지문이 모두 없어졌어요.
선량 : 네? 지문이 없어졌다고요?
희애 : 네. ㅎㅎㅎ. 얼마 전에 저희가 10년짜리 장기 체류허가증을 받았거든요. 체류허가증 만들 때 손가락 지문을 디지털로 입력하잖아요. 그런데 지문 인식이 안 되는 거예요. 양손 다 인식이 안 돼서 정말 못할 뻔했어요. 다행히도 피오리스타(Fiorista, 플로리스트)라고 말했더니, 해주더라고요.
선량 : 지문이 모두 사라지도록 꽃을 만지셨군요.... 이렇게 힘든 일인데, 아무리 돈을 버는 내 일이라고 해도 그 일을 즐길 수 없다면 할 수 없는 일 같아요. 저도 글 쓰는 일이 너무 즐거워서 시작했지만, 작가가 된 후엔 오히려 글을 쓰기 싫어질 때가 많았거든요.
선생님은 어떠신가요?
희애 : 사실, 일요일과 월요일이 쉬는 날인데요, 온전히 쉰 날이 거의 없어요. 근데 이 일이 전 정말 재밌어요. 몸은 진짜 힘든데 재밌어요. 전 제 일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어요. 정말 정말 열심히 쉬지 않고 그렸죠.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그려도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꽃을 만지는 일은 그런 게 없어요. 그림은 2D로 하는 작업이라면, 꽃은 3D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꽃마다 색이 다 다르고, 그런 꽃을 이용해 형상을 만든다는 게 너무 즐거워요.
"이건 예술이야, 넌 지금 예술을 하고 있어!"
제 꽃을 본 누군가가 이렇게 말해준 적이 있었는데, 기분이 정말 날아갈 것 같았어요.
선량 : 그 기분, 알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예술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잘 알지도 못하고요. 하지만 제가 글쓰기 강의를 한 후에 사람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거나 "글을 써보고 싶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정말 좋더라고요. 그걸 "공헌감"이라고 하죠.
공헌감이란 심리학자 아들러가 중요시 한 개념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선생님은 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있으니, 그 공헌감이 굉장히 크게 느껴지실 것 같아요. 공헌감을 크게 느낄수록 행복하다고 하니, 선생님은 정말 행복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정말 궁금한 게 있어요.
꽃집 이름이 베아투스(Beatus)인데요, 그 뜻이 뭔가요? 언뜻 보기엔 뷰티풀과 어원이 비슷해 보이기도 하거든요. 베아투스는 이탈리아어인가요?
희애 : 베아투스는 라틴어예요. 라틴어로 "복, 행복"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요.
저희가 밀라노에 꽃가게를 하기로 결심한 후 성경의 "복 있는 사람"을 묵상하다가 떠올렸어요.
물질의 복을 뛰어넘는 차원의 복의 의미를 생각했고요, 꽃집에 온 사람들을 축복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선량 : 어머, 그런 심오한 뜻이 있었군요. 꽃집 이름과 선생님의 일에 대한 마음이 정말 일치하는 것 같아요.
이쯤 되니, "그냥 돈을 벌기 위해서 꽃집을 하는 것이 아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떠세요? 사업의 방향성이나 가치관은 무엇일까요?
희애 : 제가 처음 꽃집에서 일했을 때 "싼 금액의 꽃을 너무 예쁘게 만들지 말라"는 업계의 말이 있었어요. 싼 금액의 꽃을 너무 예쁘게 만들면 비싼 꽃을 사지 않고 싼 금액의 꽃을 살 수 있다고 했지요.
저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돈이 없는 사람은 예쁜 걸 즐길 수 없다는 말인가?"
저는 싼 금액의 꽃을 팔아도 예쁘게 만들어서 팔고 싶었지요. 그게 바로 제가 꽃집을 하면서 실천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사실 일은 배로 힘들어요. 비싼 꽃다발 하나 만드는 거랑 저렴한 꽃다발 하나 만드는 거랑, 들어가는 노력과 시간은 비슷하거든요. 그래도 이게 맞다고 생각해서 계속 그렇게 운영하고 있지요.
선량 : 사업하는 사람들이 보기엔 "사업 수완이 없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게 꽃을 주문해서 받아본 사람들이 만족하게 되고, 결국 재구매로 이어지니, 이것이 가장 좋은 마케팅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서 궁금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꽃을 만지시는데요, 가장 좋아하는 꽃은 무엇인가요?
희애 : 저는 들꽃을 좋아해요. 정원에 피어 있을 것 같은 그런 꽃을 좋아합니다.
선량 : 어머, 의외인데요? 화려하고 큰 꽃이 아니라 작고 이름 없는 들꽃을 좋아하시는군요.
희애 : 네. 그래서 제가 직접 꽃을 키워보고 싶기도 해요. 한쪽엔 꽃을 키우고, 한쪽엔 작은 스몰 웨딩홀을 운영하는 거죠. 내가 직접 키운 꽃으로 장식을 하고요. 제 꿈 중에 하나예요.
선량 : 불가능해 보이진 않는데요? 밀라노 근교에 폐건물이 많잖아요. 언젠가는 그런 곳에 꽃을 키우며 스몰 웨딩홀을 운영하시는 선생님을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되는데요? 그때 한번 더 인터뷰 요청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거의 마지막 질문인데요,
"밀라노에 사는 사람들" 매거진의 공통 질문입니다. 밀라노에서 사는 건 어떠신가요?
희애 : 전 여기가 너무 좋아요. 한국에서 꽃집을 할 때는 쉬는 시간이 없었어요. 계속 문을 열어두어야 했죠. 밥을 먹다가도 손님이 오면 달려 나가야 했어요. 한국에서는 손님 뺏길까 봐 서로 경쟁하는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여기는 그런 게 없어요. 점심시간 때 모든 가게가 문을 닫으니까요. 그때 내가 쉬고 싶은 만큼 쉬고 다시 나와서 일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그래서 다시 한국에 들어가서 살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선량 : 저도 처음에 여기 왔을 때 그게 적응이 안 됐어요. 점심시간 12시부터 2시까지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 거예요. 심지어 식당은 점심시간 이후, 3시부터 저녁 7시 사이엔 문을 안 열고요. 이 나라 왜 이러나 싶었죠.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이런 문화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일을 하는 이유가 결국엔 삶을 영유하기 위함인데, 쉬지도 않고 일을 하다간 살이 피폐해지기 십상이잖아요.
과연 우리나라엔 이런 문화가 들어설 자리가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회사엔 점심시간이 있지만, 자영업자들에게 점심시간이란 그림의 떡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정말 마지막 질문인데요,
딸 리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실까요?
희애 : 음...... 지금을 즐기라고 말하고 싶어요.
선량 : "카르페 디엠" 인가요?
희애 : 네. 맞아요. 사실 걱정은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한 염려잖아요.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시간을 버리지 말고, 지금 행복한 삶을 누리라고 말하고 싶어요.
선량 : 제가 요즘 읽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책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미래를 위한 계획과 걱정에만 몰두하거나
과거에 대한 그리움에 빠지는 대신
현재만이 유일하게 실재하는 것이고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은 단 한 번뿐이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쇼펜하우어의 인생수업, 114 ~117 p]
제가 보기엔 딸 리아도, 희애 선생님도 현재를 최선을 다해 누리며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 밀라노에 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렇게 베아투스 꽃집을 시작하지도 못했겠죠.
미래의 막연한 걱정 대신 현재에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손가락의 지문이 모두 사라지더라도 즐겁고 행복하게 이 일을 하고 계시니,
베아투스 Beatus라는 말의 뜻처럼 정말 복 있는 사람, 축복하는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베아투스와 김희애 플로리스트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습니다.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김희애 플로리스트를 인터뷰하며 녹음한 내용을 받아 적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것이구나......."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 갑자기 플로리스트가 되었을 때 아무런 미련 없이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 밀라노에서 지문이 모두 사라지도록 꽃을 만지는 그녀가 여전히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오늘 하루를 후회 없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심엔 분명 가족이 있을 것이다.
그녀의 꿈과 비전을 묵묵히 지지해 주고, 함께 동행해 준 남편.
그리고 바쁜 엄마 옆에서 투정 한번 부리지 않고 예쁘게 성장하고 있는 딸 리아.
이들이 함께 만들어갈 베아투스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밀라노에 사는 사람들 매거진은 다양한 이유로 한국을 떠나 밀라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이번 세 번째 인터뷰이인 김희애 플로리스트는 밀라노 동쪽 세그라테(Segrate) 지역에서 Beatus Flower라는 한인꽃집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https://www.instagram.com/beatus.flower_milan?igsh=MWkweG8ybTFjeWY2e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