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의 한국인 현악기 명장, 박지환 현악기 제작자
1년 전, 교회학교 아동부에서 밀라노 근교 산으로 '밤 따기'행사를 하러 갔다. 둘째 딸아이가 아동부 학생이었기에 우리 가족도 밤 따기 행사에 참여했다. 교회에 다닌 지 1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아이들과 친한 아이들의 부모님 또는 같은 구역(비슷한 지역의 사람들끼리 모이는 소모임) 사람들만 알 뿐이었다.
그곳에서 아동부 학부모님들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누구 아빠 000입니다. 42살입니다."
"저희 남편과 나이가 같네요."
"저희 집은 어디예요."
"엄청 멀군요. 밀라노에 사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저희는 이제 2년 차예요."
이런 일반적인 대화들을 나누었다. 하지만 만 나이로 바뀌면서 내 나이가 몇 인 지도 모르는 사람이 되었고, 몇 년생인지 들었어도 그게 몇 살이라는 건지 셈이 되지 않기 시작했다. 게다가 한번 들은 사람 이름은 절대 기억나지 않는다. 즉, 서로 모여 인사를 하고 자기소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후에 다시 만나면 이름도, 나이도 다 까먹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독 기억에 남는 가족이 있었다.
"저희 집은 베로나예요."
베로나는 오페라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도시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으로 유명한 곳이자 매년 여름에 열리는 오페라 축제로도 유명하다. 로마 시대에 지어진 거대한 석조 원형경기장(Arena di Verona)에서 연주되는 오페라는 과히 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멋진 도시에 사는 것은 좋아 보였지만, 한인이 별로 없는 도시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궁금했다. 오페라의 도시이니, 성악을 하시는 걸까? 하지만 그의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나무를 만지는 사람입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그의 삶이 궁금했지만, 자세한 건 물어보지 못했다. 베로나에서 밀라노에 오려면 2시간이 족히 걸리기에 평일에 만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사님, 저희 밀라노로 이사 왔어요. 저희 집에 한번 놀러 오세요."
베로나에 살던 가족이 첫째 아이의 학업을 위해 밀라노로 이사를 왔다고 했다. 안 그래도 오랫동안 궁금했던 가족이었기에 초대에 냉큼 응하며 말을 덧붙였다.
"혹시, 그날 인터뷰 좀 해도 될까요? 너무 궁금해서요."
"아, 네. 알겠습니다."
나는 그저 "나무를 만지는 사람"인 줄 알고 인터뷰 요청을 드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마어마한 분이었다. 바로 2016년, 34살의 나이에 폴란드에서 열린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제작 콩쿨>에서 바이올린으로 1위와 2위에 석권한 "박지환" 님이었던 것이다!!!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콩쿨>은 폴란드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35년에 창설되었으며, 지금도 바이올리니스트의 등용문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올린 제작 콩쿨에서 가장 권위 있는 콩쿨이라고 할 수 있는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제작 콩쿠르>은 그보다 20년 늦은 1957년에 창설되었고,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귄위있는 제작콩쿨이다.
이런 콩쿨에서 1위와 2위를 동시에 석권했다니.... 클래식 음악은커녕 바이올린의 V자도 모르지만, 이분의 삶과 사랑, 가족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다.
댁으로 직접 초대를 받은 날은 토요일 점심이었다. 마침 며칠 뒤가 추석연휴라서 중국마트에서 산 "대보름빵"을 사서 들고 갔다. 제작자 님의 댁에 들어서니, 어디선가 맡아본 그리운 음식냄새가 났다.
"어머, 족발이네요?"
"네. 제가 족발을 좋아해서 직접 만들었어요."
"세상에나, 족발을 집에서 직접 만드셨다고요? 냄새가 제대로네요!!"
그때 박지환 제작자님께서 뒤뜰에서 따온 깻잎을 한 손 가득 들고 들어왔다.
"세상에나 깻잎까지.... 이거 정말 제대로인데요?"
밀라노에서 맛보기 힘든 한국인의 식탁을 마주한 순간, 인터뷰에 대한 부담감은 저 멀리 사라지고, 오직 한국인의 정이 가득 차올랐다. 또래 친구들을 만난 아이들은 지하실로 내려가 깔깔 거리며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제작콩쿨에서 1위를 한 명장님과의 일대일 인터뷰가 아니라 그저 옆집 친구처럼 포근한 분위기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선량 : 사실 바이올린을 만든다는 것만 들었어요. 정확하게 어떻게, 무슨 일을 하시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지환: 제 직업은 "현악기 제작가"입니다. 현악기라고 하면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이렇게 있는데요, 저는 그중에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만들고 있어요.
선량 : 지하실에 있는 공방에서 직접 만드시는 건가요?
지환: 네. 메인 작업실이 크레모나에 있어요. 한국인 동료 제작자 친구와 함께 그 작업실을 사용하고 있고요, 손님들은 주로 거기로 오시고 악기 시연도 거기서 주로 하죠. 요즘에는 작업을 주로 집에서 하고 있습니다.
선량: 이 일은 어떻게 시작하신 건가요?
지환: 저희 아버지가 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을 연주하셨어요. 더분에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럽게 클래식 음악을 접할 수 있었죠. 사실은 학창 시절에 제가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아버지 따라서 트럼펫을 전공해 볼까 하는 마음에 잠깐 배웠었어요. 그걸로 대학 입시시험을 한번 쳤는데요, 떨어진 거예요. 그래서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 고민하던 차에 아버지가 군대를 먼저 갔다 오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를 해주셨어요. 다녀와서 하고 싶은 걸 해보라고 하셨죠.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입영신청을 해서 그해 여름 스무 살에 군대를 갔죠.
제가 간 곳이 용인에 있는 경찰 교향악단이라고 있어요. 군악대라고 할 수 있는데요, 거기에 오케스트라도 있었어요. 주로 전공한 친구들이 오는 곳이었어요. 오디션을 봐서 통과를 하면 군대 대신 대체복무를 할 수 있었죠. 거기서 현악기 하는 친구들을 많이 알게 되었어요. 그러다 우연찮게 후임이 "악기를 만드는 일도 있다더라."라고 알려주었어요. 거기서 제가 관심이 생겨서 제대휴가 때 서초동에 있는 악기 사거리에 가서 쫘~악 한번 돌았어요. 그때 내가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결심을 했죠.
선량: 스무 살에 간 군대가 인생을 바꾸어 놓았군요.
지환: 네.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 학교를 알아보았어요. 갈 수 있는 학교가 유럽 쪽에 영국, 독일, 이탈리아 학교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탈리아 학교가 학비도 가장 저렴하고, 크레모나라는 지역이 바이올린의 본고장이기도 해서 이탈리아 유학을 결정했죠.
제가 어렸을 적부터 손으로 만드는 것을 워낙 좋아했어요. 관심도 많았고요. 하지만 손으로 하는 일이나 기술을 직업으로 삼고 싶진 않았죠. 클래식 음악도 좋아했지만, 음악은 제가 잘하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바이올린 만드는 일은 제가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을 한 번에 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죠.
선량: 부모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나요?
지환: 부모님은 크게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저희 부모님은 한국에서 뭘 꼭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없으셨어요. 저희 형이랑 누나는 미국에서 태어났는데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민을 가셔서 그쪽에서 정착해서 살고 있고요. 저희가 해외에 나가 사는 것에 대해 딱히 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죠.
선량: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탈리아에 오셔서 공부를 시작하셨을 텐대요. 이탈리아어도 모르셨을 것 같은데요.
지환: 한국에서 어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하긴 했는데 아주 기초적인 수준이었요. 그런데 제가 다닌 학교가 직업고등학교 같은 학교라서 일반교양과목들이 다 있었어요. 이태리어, 영어, 수학. 그런 과목들을 함께 배워야 했죠. 그 학교가 총 5년 과정이었는데요, 3학년으로 편입할 수도 있고, 1학년으로 시작할 수도 있었어요. 저는 한국나이로 23살 때 유학을 왔는데요, 유학온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어린 나이였어요. 그래서 1학년으로 시작을 했죠. 그때 만난 작업실 동료들과 반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5년을 모두 다녔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과목도 배우고, 언어도 배울 수 있었죠. 그리고 직업학교다 보니까 공부에 대한 압박이 덜했고요, 이탈리아 말을 잘 못해도 크게 상관이 없었어요. 학생 중에는 70대 할아버지도 계셨어요. 여러 나라의 여러 연령층의 사람들이 모인 학교라서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는 거의 없었어요.
선량: 한국 분들도 많이 계셨나요?
지환: 네. 한국사람이 꽤 많았어요. 동양 사람들 중에는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들이 많았는데요, 전체 학생의 30프로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선량: 관심조차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운명처럼 알게 되셨고, 이렇게 먼 나라까지 유학을 와서 지금까지 그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게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께 놀라운 일인 것 같아요. 사실 대부분의 한국 부모님들은 내 아이가 초, 중, 고 잘 다니면서 공부하고, 누구나 알아주는 좋은 대학에 가고, 누구나 알아주는 회사에 취직하면 "자식 잘 키웠다"라고 하거든요. 일반적인 길에서 조금 벗어난 길을 가려고 하는 자식에 대해서는 "유벌 나다"는 시선을 갖기도 합니다. 그런데 박지환 제작자님의 부모님은 아들의 선택을 믿어주고, 존중해 주고, 지지해 주신 것 같아요. 저도 두 아이의 부모로서 본받고 싶은 모습입니다.
이번엔 제작콩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사실 저는 이분야에선 문외한이에요. 그래서 바이올린연주 콩쿨은 알지만, 바이올린 제작콩쿨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제작자님께서 콩쿨에서 1위를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너무나도 당연히 "바이올린연주 콩쿨에서 1위를 하신 분이시구나!"하고 생각을 한 거였어요. 그런데 바이올린 연주는 전혀 못하신다는 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지환: 네. 콩쿨에서 1등은 한 번 해봤고요, 좀 이슈가 되었던 것은 폴란드에 비에니아프스키라는 굉장히 유명한 작곡가가 있어요. 그 작곡가 이름을 딴 연주 콩쿨이 100년이 넘었는데요, 메이저 연주 콩쿨 중에서도 세계 탑 3안에 드는 굉장히 큰 콩쿨이에요. 제작 콩쿨은 바이올린 분야만 있는데요, 5년마다 열리고 있죠. 2016년에 거기에 제가 바이올린 2개를 냈는데 1등과 2등을 했죠.
선량: 세상에나.... 1등, 2등을 했다고요? 그게 가능한가요? 너무 대단하신 분이셨군요.
지환: 유럽에서는 메이저 콩쿨이 몇 개 있어요. 이탈리아 크레모나, 독일 그리고 폴란드 비에니아프스키 콩쿨이 있죠. 사실 이 3개 대회에서는 상을 모두 탔습니다. 크레모나에서는 은메달과 동메달을 땄고, 독일에서는 은메달과 4등을 했죠.
각 콩쿨마다 특별상이 있어요. "베스트 워크맨쉽"은 제작점수가 가장 높은 상이 있고요, "베스트 사운드 상"은 소리점수가 가장 높은 상이예요. 저는 이 세 콩쿨에서 베스트 워크맨쉽 상을 수상했습니다.
선량:정말 어마어마한 분과 제가 겸상을 하고 있었네요? 세상에나....
생소한 분야의 일을 배우면서 학교를 다니셨잖아요. 학교를 다니면서 "이 일이 천직이다"라는 생각을 하셨을까요?
지환: 그때는 이 일이 나와 잘 맞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뭔가 만드는 걸 워낙 좋아했으니까요. 하지만 사실 바이올린 소리를 좋아하진 않았어요. 제 귀에는 바이올린 소리가 날카롭게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악기를 만들면서 점점 좋아하게 되었죠. 바이올린을 만드는 일이 조금은 감각적인 부분을 요구하거든요. 그런 감각을 익히고, 연구를 하다 보니까 더 흥미를 느끼게 되었죠.
선량: 악기를 만드실 때 '나만의 철학'같은 게 있으실까요? 이런 부분은 꼭 고려한다거나 악기에 이런 부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거나....
지환: 클래식 음악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조금 남다른 거, 새로운 거라고 생각을 대부분 하죠.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남들과 다른 게 아니라 수백 년 전부터 물려 내려오던 것을 내가 설득하고 공감시켜야 하는 것이구나!'
그래서 사람들이 뭐가 예쁘다고 하는 건지, 뭐가 듣기 좋다고 하는 건지 알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전에는 "나는 특별한 뭔가를 만들어 볼 거야!' 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아, 이게 아니구나.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게 뭔지를 알아야겠구나!" 하고 깨달은 거죠.
클래식 음악도 똑같더라고요. 바로크 시대 음악을 한다면 바로크 시대 음악 다운게 뭔지 알고, 그 안에서 본인만의 개성을 드러내야 사람들이 공감을 하는 거지, 바로크 시대 음악을 한다면서 낭만파 음악색을 가지고 연주하면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 거죠. 그런 것이 악기에도 통용되는 걸 깨달았어요.
그게 제 악기제작의 터닝포인트였던 것 같아요.
이탈리아 크레모나는 작은 도시지만, 최고의 명품 현악기를 제작하는 도시로 유명해요. 이 작은 도시가 어떻게 현악기의 본고장으로 성장했는지를 보면, 16세기에 아마티라는 가문을 필두로 후대에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넬리>라는 두 천재 제작자가 이 도시에서, 이 업계가 수백 년 동안 이어가도록 만들었죠. 그 사람들의 악기가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고, 가장 높은 시세를 유지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그 악기로 그 시대의 음악을 연주하면서 그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계속 대를 물려 오면서 선생님들을 통해 "이게 좋은 소리야." "이런 색깔로 연주를 해야 해"라고 가르치는 것이죠.
악기제작도 마찬가지예요.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넬리가 만들었던 최고의 제작방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좋은 악기를 만드는 법"을 계승하죠. 그게 뭔지를 알아내는 게 우선이더라고요. 그게 이 시장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부분이라는 걸 깨달았죠.
사람들이 공감하고 좋아하는 소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게 제 터닝포인트였어요. 그건 바로 "클래식함"이었어요.
음식에 비유하자면, 사람들 취향이 다르고 입맛이 다르지만 다들 국밥은 좋아하잖아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시장 한구석에서 파는 할머니가 만든 국밥. 딱 그런 느낌이죠. 그런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선량: 기본에 충실해야 하는 거군요. 글 쓰는 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나만의 독특한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지만, 사람들은 가장 기본의 글에 공감하고, 감동을 하더라고요. 저도 그 부분이 요즘 가장 고민이 되는 부분이기도 해요. 독자들이 어떤 글을 좋아하는지를 파악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과 내 개성을 살려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충동을 하죠. 그래서 요즘 글을 아예 못 쓰고 있답니다(웃음).
좋은 악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말 민감해야 할 것 같네요. 작은 변화에도 소리가 다르게 나올 것 같은데요, 어떤가요?
지환: 일단 현악기는 수명을 800년으로 봐요. 400년 된 악기들이 최고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새 악기들이 태어나잖아요. 세월이 가져다주는 소리가 있기 때문에 새 악기로서는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죠. 공부를 계속하면서 악기를 만들다 보니 저만의 철학이 생겼는데요, 예전보다 덜 예민한 악기가 만들어져요. 변화에 민감하지 않고, 잘 적응하는 악기를 만들게 되었죠. 오래된 악기가 가진 소리는 지금 당장 만들지 못하지만, 새 악기가 가진 장점들 즉 힘이 있고 건강한 소리, 덜 예민하고 안정적인 소리를 낼 수 있으면 연주자 분들이 조금 더 편해하시니까요.
선량: 400년 뒤에 "박지환 바이올린" 이렇게 엄청 유명질 수도 있겠군요. 저희는 400년 뒤엔 이 세상에 없겠지만, 제작자님의 바이올린과 인터뷰 글은 남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작자님 만의 철학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다음 시간엔 콩쿨수상 그 후의 이야기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지환 현악기 명장에 관한 기사들>>
현악기 명장 박지환, 최고 권위 바이올린 제작 콩쿠르에서 우승 | KBS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