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의 한국인 현악기 명장, 박지환 제작자
선량: 내가 의도한 대로 악기가 만들어지는지 너무 궁금합니다. 아니면 내가 의도한 대로 악기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는 어떠신가요?
지환: 당연히 의도한 대로 다 만들어지진 않아요. 하지만 예전에는 제가 의도했던 방향으로 가는 길이 삐뚤빼뚤 하면서 그 폭이 엄청 컸는데 지금은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 조금 벗어나더라도 그 반경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근데 그게 또 "맞느냐, 틀리냐" 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 같아요. 아주 디테일한 감각적인 부분에서 사람들의 취향이 갈리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좋아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싫어할 수도 있죠. 그래서 제가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게 바로 이거였어요.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이 업계에서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 즉 소리적인 측면이나 시각적인 측면에서 최대한 공감시킬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갖춘 상태에서 그 외의 디테일한 부분에 나만의 개성을 드러낸다면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악기를 만들고 있죠.
선량: 확고한 가치관이 느껴지네요. 역시 기본에 충실한 후에 개성을 갖추는 게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기본이 없이 겉모습만 화려한 건 언젠간 대중에게 들키기 마련이죠.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은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 악기를 제작하는지, 아니면 먼저 제작을 해놓고 판매를 하는지입니다. 어떠세요?
지환: 사람들마다 다른데요. 예전에는 미리 만들어놓고 팔았는데 요즘은 주문제작으로만 하고 있어요. 메이저 콩쿨의 경우에는 악기를 가져가거든요. 폴란드 대회에 나갔던 악기도 폴란드 문화재청에 들어가 있어요. 거기서 소유를 하면서 악기 연주자 학생들에게 빌려주는 것이죠. 그런 악기는 주문악기로 할 수는 없죠.
선량: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네요. 폴란드 문화재청에 내가 만든 바이올린이 있다는 게.... 한번 가서 직접 보고 싶네요.
지환: 사실 저도 그 뒤로 안 가봤어요.
선량: 들으면 들을수록 정말 대단한 분이라는 게 느껴집니다.
이제 사랑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저희 부부도 네팔에서 해외봉사 하다가 만났다고 하면 사람들이 신기하게 보기도 하고, 약간 로맨틱하게 생각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두 분은 여기, 이탈리아에서 현악기를 만들다가 만났다고 하시니까 왠지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두 분, 어떻게 만나셨나요?
지환: 아내는 대학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어요. 연주를 할 수 있었죠. 제가 일을 배우던 곳의 선배 형이 제작한 악기를 연주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제 지인을 통해서 비올라 연주자를 섭외했는데요, 마침 악기 박람회 시기였어요. 그때 저랑 아내가 함께 다니면서 연주를 했었어요. 그러면서 좀 친해졌죠. 마침 유학 시절에 저와 함께 살던 친구랑 아내와 함께 살던 친구가 커플이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주말에 한 번씩 만나서 놀게 됐고,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죠.
선량: 첫눈에 반하고, 그런 거 없었나요?
슬기(박지환 제작자님의 아내): 그런 건 전혀 없었고요. 저희 남편은 오히려 그 선배가 "괜찮은 것 같으니까 한번 잘해봐." 이 말에 현혹되듯이 "그런가?" 이렇게 생각을 했었대요. 그때부터 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대요. 첫눈에 반한 케이스는 절대 아닙니다.
선량: 뭔가 로맨틱한 영화를 기대했는데.... 뭔가 아쉬운데요? 그래도 이탈리아의 멋진 거리를 거닐며 꽁냥꽁냥 하는 모습, 상상만 해도 마음이 간질간질합니다.
슬기 님도 악기 만드는 걸 배웠다고 하셨는데요, 지금은 안 하시나요?
지환: 네. 맞아요. 아내도 제작학교를 다녔었죠. 그런데 졸업할 때즘엔 저희가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어요. 그리고 첫째 아이를 임신하고, 아이가 태어날 때 베로나에 살기 시작했어요.
선량: 슬기 님도 결혼과 출산으로 꿈을 접으신 거군요. 저도 그렇고 사랑이 전부였던 때가 있으니까요. 물론 지금은 "내가 그때 왜 그랬나, 내가 왜 이 남자를 만나 이렇게 살고 있나.... 싶지만 그때는 또 나름 진심이었겠죠?(웃음)
다시 악기제작을 해보고 싶진 않으세요?
슬기: 그런 고민은 지금도 매일 하고 있어요.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까요, 여기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죠.
선량: 사실 저도 남편 때문에 해외에서 엄마로 살다가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글을 쓰기 시작했거든요. 물론 글을 써서 돈을 많이 벌진 못하지만, 그래도 소소하게 돈을 벌고 내 일을 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자존감이 꽤 올라간 경험을 했어요. 슬기 님도 슬기 님 만의 무언가를 꼭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두 분이 함께 악기를 제작해 보신 적은 있으세요? 아니면 부부가 함께 악기를 제작해 보는 건 어떠세요? 그것도 꽤 의미 있을 것 같은데요.
슬기: 그건.... 약간 남편한테 운전을 배우는 것과 같은 거라서요.
선량: 아.... 안 되겠네요. 너무 힘든 일이네요.
바로 다음 질문 드릴게요. 제작학교를 졸업한 후에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분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이탈리아에 남기로 결심한 이유가 뭔가요?
지환: 저는 악기를 계속 만들고 싶었어요. 사실 크레모나 시장을 벗어나면 악기 제작뿐만 아니라 악기 수리를 겸업해야 해요. 악기만 만들어서는 생업을 이어나가기가 쉽지 않거든요. 악기제작에 있어서 레이블, 즉 라벨에 이탈리안 이름인지, 메이드인 크레모나인지가 악기의 가치를 매기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요. 크레모나에 현악기 제작 공방이 많이 몰려있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서울이나 다른 해외 도시에서 제작공방을 한다면 그 도시의 연주자들을 상대해야 해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악기를 손봐야 하는 거죠. 고장 나면 고쳐주거나 부품을 교체하거나....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 이 일이 주업이 될 수밖에 없죠. 그게 아니라면 아예 연주자들의 접근을 차단을 하고 나만의 제작의 길을 가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죠.
'크레모나'라는 지역은 악기를 사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곳이에요. 물론 그 안에서도 제작자들끼리의 경쟁이 치열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니까 여기에 남는다면 악기 제작을 계속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내가 이탈리아 생활에 만족했습니다.
선량: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나면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책임감이 더 커지잖아요.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 것 같아요. 그런 중압감은 없으셨나요?
지환: 제가 결혼하고 첫아이를 낳을 때쯤 제가 한창 제작콩쿨에 나갈 때였어요. 크레모나 콩쿨에도 나갔었는데 그때는 순위권에는 들었지만, 상을 타진 못했어요. 폴란드 콩쿨을 준비할 때 큰아이가 3 살이었는데요, 이 콩쿨까지 나가보고 잘 안 되면 현실과 타협을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콩쿨에 한번 나가려면 해외에 계속 나가야 했고, 제작콩쿨 준비하는 데 시간적 소모도 굉장하거든요. 아이도 있는데 그럴 수는 없으니까 잘 안 되면 악기 만들어서 판매하는 데 집중을 하겠다고 했죠.
선량: 그런데 상을 받으신 거네요? 정말 다행이네요.
지환: 원래 폴란드 콩쿨이 수요일에 파이널 심사가 끝나고 그날 공표가 나야 되는데 연락이 안 오는 거예요. 그래서 안 됐나 보다....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목요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국제전화가 딱 오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비행기표 끊었죠.
선량: 세상에나.... 미리 연락 좀 해주지.
지환: 심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나 봐요. 보통 제작콩쿨이 연주자 다섯 명, 제작자 다섯 명이 악기를 놓고 한 달 정도 심사를 해요. 마지막 심사가 소리 심사인데요, 1차, 2차, 3차, 4차 심사가 있어요. 대부분 4차 심사가 끝나면 그날 저녁에 공개가 되거든요. 근데 연락이 딱히 없어서 저는 기대를 안 하고 있었죠.
선량: 거기서 1위, 2위를 하신 거네요. 심사위원들도 정말 고심을 많이 했었나 봅니다. 너무 영광스러운 일인 것 같아요. 폴란드 콩쿨에서 상을 타신 후에 삶이 확 바뀌셨나요? 어떠셨나요?
지환: 꼭 그렇지는 않더라고요(웃음).
그 당시에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선생님께서 연주콩쿨 2등을 하셨어요. 선생님은 그 전부터 여러 콩쿨에서 입상하셔서 워낙 유명하셨지만, 폴란드 비에냐프스키 연주콩쿨에서 수상을 하신 후 더욱 스타덤에 오르셨죠요. 하지만 저희는 그렇지 않아요. 저희 업이 사실 30, 40대가 전성기가 아니에요. 저희는 보통 일한 지 30년이 지나야 전성기인데요, 50대, 60대라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젊은 제작자들이 아무리 좋은 성과를 냈다 하더라도 우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게 주의 깊진 않아요. 그래도 그런 성과가 있었기에 기회가 많이 열렸어요.
어떤 분의 소개로 연합뉴스에 나가게 되면서 신문사, 방송사에서 연락이 계속 왔었고요. 그러면서 다양한 지역의 딜러들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어요. 원래는 한국에서만 거래를 하다가 미국, 홍콩, 싱가포르 등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 연락이 오는 계기가 되긴 했어요. 그래도 제 생활이 확 달라지거나 하진 않았어요.
선량: 아직 전성기가 오지 않았군요. 10년 후에 전성기가 오겠는데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네요. 뭔가 잘 기다려야 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공방이 집 지하에 있으면, 두 분이 항상 함께 계시겠네요?
슬기: 제가 회사를 다녔던 3년 빼고는 항상 집에 붙어 있었죠. 그래서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저흰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요. 다른 아내 분들은 남편과 함께 집에 있는 걸 굉장히 힘들어하시더라고요.
선량:사실 저도.... 주말에 남편이 집에 있으면 좀 힘들더라고요. (웃음)
베로나에 사시다가 최근에 밀라노로 이사를 오셨는데요, 그 계기가 뭔지 궁금하네요.
지환: 저희는 베로나 삶이 너무 좋았어요. 주변 환경도 좋았고, 사람들도 좋았고요. 그런데 아이들이 커가다 보니까 주위에 교민들이 없다는 게 조금 염려가 되었어요. 지금은 좋지만, 아이들이 좀 자랐을 때 주위에 이탈리아 사람들만 있는 베로나 환경이 과연 좋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래서 밀라노로 이사를 했죠.
선량: 베로나는 어땠나요?
슬기: 베로나는 정말 좋았어요. 저희가 살던 집 근처에 정말 멋진 풍경이 있었어요. 이 풍경이 싫증이 나면 이사를 가려고 했는데 마지막까지도 싫증 나지 않았어요. 발전된 도시의 모습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어우러진 곳이었어요. 이사한 날 식당에서 제가 엉엉 울었어요.
지환: 아내가 너무 울어서 제가 참, 난감했답니다. 저는 지금 아니면 베로나를 떠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요. 첫째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갈 시기이고, 둘째는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시기니까요. 밀라노행이 조금 부담도 되고 무리가 되긴 했지만, 아이들을 생각해서 이사를 했죠.
선량: 그렇게 좋아하던 도시를 떠나 밀라노에 오신 거네요. 와보시니 어떠신가요?
슬기: 아직 적응 중이긴 한데요. 이 도시와 집에 만족하고 있어요. 이곳도 도시긴 하지만 시골 분위기도 나고, 아이들도 많아서 북적거리거든요. 그런 부분이 마음에 들어요.
선량: 이탈리아 사신지 15년 정도 되셨는데, 어떠신가요?
슬기: 전 너무 좋아요. 이탈리아의 시간이 좋아요. 한국은 너무 바쁘잖아요. 매일 아침, 점심, 오후 일과가 따로 있잖아요. 그래서 한국 다녀오면 혼이 나간 느낌이 있어요. 여기서는 그렇게 바쁘게 하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아요.
선량: 약간 느린 거 좋아하고, 바쁜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탈리아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반면에 빠른 거 좋아하고, 기다리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탈리아에 사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요.
슬기: 저는 여기서 배우는 게 많아요. 가족 중심의 분위기도 그렇고, 아이들에게 윽박지르지 않는 분위기도 좋고요. 물론 저희 아이들이 이탈리아 학교에서 힘들어하는 부분도 있고, 언어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은 건 정말 좋아요. 한국에 살았다면 아마 그러지 못했을 거예요.
선량: 나중에 아이가 악기 제작을 배워보고 싶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지환: 안 그래도 아이가 공부하기 싫어하면 제가 악기 제작 하는 거 알려주겠다고 했어요. 아이가 손이 야무지고 저처럼 오랫동안 하나에 집중하는 걸 잘하거든요.
선량: 아이가 뭐라고 하던가요?
슬기: 아빠가 하는 건 절대 안 하겠다고 했어요. 아빠가 만든 바이올린에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던데요.
지환: 저한테 이야기 한 거랑 다른데요? 남자끼리 이야기 한 거랑, 엄마한테 한 말이랑 다른 것 같아요.
선량: 아이가 눈치가 빠르군요!!
거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의 비전, 또는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지환: 이 업계가 "이탈리아 이름"으로 만들어진 것에 대해 영향력이 굉장히 커요. 제작자 중에 이탈리아인이 아니기 때문에 가치가 좀 폄하되는 경우가 많죠. 판매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고요. 저 역시 동양인이니까 그런 경우가 더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요. 콩쿨에 우승했다고 실력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거든요. 실력을 인정받으려면 제가 만든 악기를 직접 들고 연주자들을 찾아가야 해요. 그래서 전시회에 목적을 두고 참여를 하고 있고, 주로 독일이나 뉴욕 전시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 시장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 일이 코로나 때 조금 끊겼었는데 지금 다시 재개되어서 하고 있어요.
제가 이루고 싶은 것은 그 사람들처럼 연주자들에게 동양인으로서 편견 없이 인정받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지도'를 얻고 싶어요. 어느 분야나 비슷한 것 같아요. 단순히 실력 만으로 인정받는 단계가 있고, 그 이상을 넘어가려면 인지도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선량: 한마디로 제작자님이 만든 악기가 "브랜드"가 되길 바라는 것이죠.
지환: 실력이 일단 받쳐줘야 인정을 받는 거지만, 그런 거품은 언젠가는 사라지니까요. 제가 지금 가장 중요한 시점이긴 해요. 지금 활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향후 10년 뒤에 좀 더 안정적인 수준에 올라섰을 때, 그때는 새로운 걸 하려고 해도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따라주지 못하겠죠. 저에 한계가 드러났을 때를 잘 준비하고 싶어요. 제가 만든 악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선량: 글을 쓰는 작가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글 쓰는 사람들의 꿈은 책출간인데요, 출간을 했다고 해서 삶이 절대 바뀌지 않거든요. 오히려 책 출간 후에 슬럼프에 빠지는 작가들이 굉장히 많아요.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인지도에서 밀리게 되어 있어요. 오히려 유명인이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죠. 그래서 책을 팔려면 글 잘 쓰는 실력보다 인지도가 더 중요하다고 업계에서 종종 말하곤 합니다. 그 부분에도 저도 자주 슬럼프에 빠지곤 해요. 인지도를 먼저 올려야 할지, 그 시간에 글을 한 줄이라도 더 써야할지.... 고민 하다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제작자 님의 말을 듣고 보니 무엇보다도 탄탄한 기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대중들이 좋아하는 글이 무엇인지 먼저 이해해야 할 것 같고요. 그 기본을 갖춘 후에 저만의 개성으로 글을 써야 비로소 저만의 글체가 완성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제작가의 길을 가고 싶은 친구들이나 관심이 있는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지환: 연주는 안 될 것 같으면 빨리 포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연주에 있어서는 노력이 재능을 이기긴 힘드니까요. 제 아버지가 연주를 하셨고 아버지의 제자들도 많이 봤으니까요. 하지만 악기 제작은 감각이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하지만, 관심이 있고 열정이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일인 것 같아요.
다만 악기가 빨리 만들어지지 않거든요. 하나 만드는데 빠르면 한 달 반, 아니면 두 달 정도 걸려요. 모든 게 진행이 느리죠. 일반적인 회사원이나 사업에 비해서 다이내믹한 게 없고, 굼벵이처럼 기어가야 하고, 혼자서 일을 해야 하는 작업이에요. 그런 게 잘 맞는다면 내가 그런 걸 즐길 수 있다면 재능이 딱히 없어도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선량: 한 마디로 성격이 급한 사람이나 사회적 관계가 중요한 사람에겐 힘든 분야겠군요.
제작자님 덕분에 새로운 분야의 일을 자세히 드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점심때 시작했는데 어느새 저녁이 되었어요. 저희가 이렇게 말을 많이 했군요!!
지환: 아이들이 너무 잘 노는데 아예 저녁까지 드시고 천천히 가시죠.
선량: 아이고 너무 민폐인 걸요.
지환: 아니에요. 저희도 즐거웠고 무엇보다 애들이 너무 잘 놀고 있으니까요.
선량: 그럼 염치 불고하고 저녁까지 먹고 가겠습니다!!
이날 우리는 제작가님 댁에서 점심- 간식- 저녁까지 먹고 밤 10시에 집으로 돌아갔다.
밀라노라는 낯선 땅에서 만난 한국 사람의 정과 따뜻함이 길고 깊게 파고든 날이었다.
홀로 악기를 만들며 명장 님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
나무가 악기가 되어 소리를 낼 때는 어떤 마음이 드실까?
내가 쓴 글이 한 권의 책이 되어 독자에게 전달될 때의 마음이 떠올랐다.
걱정과 기대, 근심과 설렘이 교차하는 시간.
묵묵히 한 길을 걸으며 10년 뒤, 20년 뒤를 준비하는 명장님의 인내가 나에게 다가왔다.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나 역시 글을 쓰며 나만의 길을 걷고 있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