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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Jan 26. 2024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다

  

  그간 나에게 장애는 도랑 같았다. 매일 아침 반드시 건너야 할 개울이, 별안간 평온한 일상을 망치고 마는. 예기치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그리 깊지도, 위험해 보이지도 않는 매우 작고 좁은 것이 일평생 마음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타고난 눈동자 색처럼 아킬레스건도 익숙해질 줄 알았건만. 어느 무리에도 들지 못하는 미운 오리 새끼가 되어 마음은 한없는 불안으로 들끓었다.



  행복의 수명은 하루살이처럼 짧기만 했고 기한 없는 행복을 꿈꾸다가도, 거울 안에 비치는 여전한 현실에 부딪쳐 산산조각 났다. 남들과 다르게 타고난 이유로 오답 취급을 받으며 사는 동안 아킬레스건은 언제고 꼭 한 번씩 빠질 수밖에 없는 도랑 같았다. 멀쩡히 잘 살다가도 불현듯 울음이 차오를 때. 이것은 평생 지고 가야 할 십자가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무거워도 벗을 수 없고 무던히 무게를 견뎌야 하는 운명인 줄만 알았다.






  작고 좁은 개울쯤이야 끄떡없다며 호기로운 마음일 때도 있었지만, 부지불식간에 물이 불어나 모조리 적시는 까닭에 정신은 금세 아득해졌다. 과연 스스로 타고난 것이 장애인지 장애물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워, 항복하듯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때. 막다른 길인 줄 알았던 자리에 새로 난 길이 보였다.



  태생이 길치라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길을 잃었다고 체념했을 때에야 마주한 길은 한 줄기 빛이었다. 이제껏 출구 없는 방에 갇힌 듯 우두커니 서서 버텨내기만 했는데, 나아갈 길이 있다는 사실이 못내 반가웠다. 막다른 길 너머, 새로 난 길을 걸으면서 깨달았다. 길치라서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나의 시선이 가리어진 길을 비췄을 뿐이었다.



  사는 동안 타고난 장애를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자 오답으로 여겼던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쇠하고 말, 때 되면 공평히 누추해질 몸이건만. 그저 타고난 옷에 불과한 몸을, 어떻게든 정답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 쓰고 있는 나를 직면했다. 짓궂은 누군가의 농간으로 지독한 마법에 걸려서 남들과 다른 몸을 타고난 거라는 생각도, 백마 탄 왕자처럼 누군가 나타나 구원해 줄 거라는 가난한 믿음도 모두 내게서 온 것이었다.       





  기똥찬 동심에서 시작된 상상력이었지만 어른이 된 지금까지 그 어린 생각을 놓지 못한 것은 바로 나였다. 아킬레스건이 있는 육체를 오답으로 여겼고 오류투성이 몸을 타고났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정작 나를 막다른 길로 내몰았던 건 다름 아닌, 눈먼 내 마음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애쓰던 마음을 내려놓고 온몸의 힘을 빼고 나니 이제껏 보이지 않던 새 길이 보였다.



  다만, 세상이 하는 거짓말에 속아 타고난 육체의 약함이 삶 전체를 불행하게 할 거라는 헛된 믿음이 있었을 뿐. 나는 어떤 것에도 위협받을 수 없고 상처받은 적도 없는, 참모습 그대로였다.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납작 엎드리는 마음이 되고 나서야, 나를 무겁게 짓누르던 것들이 하나둘씩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 이 누추한 육체의 집을 지탱하려 애쓰지 않게 되었다.



  머릿속으로 계획했던 것들이 전부 틀어졌고 날 때부터 잃어버린 그 무엇도 되돌려 받지 못했는데, 어느새 거울 속 내가 웃고 있었다. 결국 자기 연약함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힘을 뺐을 때. 한결 부드러워진 마음이, 감은 눈을 뜨고 가리어진 길을 터준 셈이었다.





  처음 수영을 배울 때, 가장 당혹스러웠던 말은 물 먹기 싫으면 힘 빼라는 말이었다. 당장 물에서 숨 쉬는 것도 익숙지 않은데 힘을 빼라니. 턱밑까지 차오르는 물이 매섭기만 했다. 되레 몸은 잔뜩 긴장했고 입과 코로 물을 몽땅 흡입하고서야 겨우 힘을 뺐다. 자유형, 배영, 접영 전부 배우고도 발장구 치는 힘이 약해 여전히 맨몸 수영은 젬병이지만, 그때 몸으로 익힌 교훈이 삶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바다거북이도 자기 키를 넘어설 듯 넘실대는 파도를 만나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몸을 맡긴단다. 힘을 빼고 누우면 물의 길이 보이듯 마음도 그렇다. 본래 물이 지닌 부력의 성질이 자연히 몸을 띄우듯이. 내가 완전히 뒤로 물러나니 마음이 제 힘을 발휘하는 듯했다.



  마음의 무게를 덜고 난 후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던 걸음도 가벼워졌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바로 보게 되었을 때 오랜 어둠으로 가득했던 마음에 빛이 드는 듯했다. 어느 날 갑자기 도랑에 빠지지 않을까 염려하던 마음도 간 데 없이 사라졌다.



  당연히 마법이 풀린다던가 하는 몸의 변화는 없었다. 타고난 장애는 그저 몸이 입고 태어난 옷과 같음을 깨달은 뒤에도, 거울에 비친 모습은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였다. 오로지, 마음의 눈을 뜬 것뿐이었다. 감은 눈을 뜨고 난생처음 참모습을 마주했다. 거울 속 나는 오답이 아니었다. 생애 한 번도 빗금 쳐지거나 틀린 적 없는, 무결한 존재로 빛나고 있었다.




분명 마음에 차지 않는 내가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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