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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Jan 12. 2024

생애 첫 오답노트

나의 생각이 내가 보는 세상을 결정한다


  삶이 시험지라면 나의 답안지는 빗금투성이었다. 킬러문항 같았던 탄생의 고비를 겨우 넘겨 쟁취한 삶이었지만 남과 다른 모습은 미운 오리새끼처럼 읽혔고, 이름 모를 이들이 날 선 시선으로 흘길 때마다 온몸은 빗금으로 베이는듯했다. 왜 틀렸는지도 모르는 문제가 수두룩했지만, 아무도 풀이해 주는 이가 없어서 정답을 달달 외듯이 살았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오답 같았고 답안에 맞지 않는 나는 일평생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깍두기 신세였다.



  영문도 모른 채 오답 처리되었을 때의 부작용은 시험지를 쳐다보기도 싫어진다는 것이다. 타고난 삶 자체가 답안에 들지 못했으니 거울 속 나를 인정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타고난 육체가 번복의 여지없는 오답이 되고부터는 삶 전체가 불행으로 기우는 듯했다. 몸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에서 타고난 겉모양만으로 틀린 문제 취급을 받으니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탄생의 이유를 비롯해 스스로의 쓸모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았다.





  시선을 육체에 두면 모든 열심의 끝은 공허뿐이었다. 이미 타고난 모양을 바꿀 수 없으니 애써도 변하는 건 없었다. 키 작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장신이 될 수 없듯이. 탈출구 없는 곳을 향하여 온몸을 내던지듯 힘쓰다 온몸을 휘감는 허탈감에, 마음이 자주 주저앉았다.



  다만 몸이 불편할 뿐인데 그 사실만으로 평생 마음이 출구 없는 방에 갇힌다고 생각하니 나 자신이 안쓰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세상이 정해놓은 답이 아닌, 꽉 막힌 숨통을 트여줄 만한 나만의 답을 찾아 헤맸다. 간절한 마음이 길을 내듯 결심을 하고 난 후부터 새로운 날이 펼쳐지는 듯했다. 그 덕분에 요즘은 생애 첫 오답노트를 작성하는 기분으로 지난 과거를 다시 풀이하는 중이다.





  지나온 삶을 시험지 삼아 오답노트를 쓴다는 생각으로 가만히 나에게 묻는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Q. 나에게 일어난 일 중에 불행을 고르시오.

1. 미숙아로 태어나지 못하고 안락사될 뻔했다
2. 뇌성마비를 앓아 핸디캡을 안고 살게 되었다
3. 장애로 인해 학창 시절 내내 따돌림을 당했다
4. 퇴근 10분 전 별안간, 회사에서 잘렸다
5. 결혼을 앞두고 보이스피싱으로 재산을 잃었다


표면적인 것만 보면 이 중에 불행이 아닌 것은 없었다.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불행을 열거할 수 있고 그 시절, 나의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쳤다. 위기의 순간을 맞아 삶의 의욕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흘려보낸 뒤에 얻은 것을 생각하면 과연 그것을 불행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Q. 다음 일어난 일로 얻은 것을 적으시오.

1. 미숙아로 태어나지 못하고 안락사될 뻔했다
 → 목숨 걸고 낳아준 엄마 덕분에 무사히 태어남

2. 뇌성마비를 앓아 핸디캡을 안고 살게 되었다
 → 결핍 덕분에 작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됨

3. 장애로 인해 학창 시절 내내 따돌림을 당했다
→ 진짜 나를 위하는 친구를 분별하는 눈을 얻음

4. 퇴근 10분 전 별안간, 회사에서 잘렸다
→ 오래 절필했다가, 다시 글을 쓰는 계기가 됨

5. 결혼을 앞두고 보이스피싱으로 재산을 잃었다
 → 나를 오답 취급하던 세상이 허상임을 알게 됨


  시작은 불행이었다 해도, 그것이 떠난 자리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과연 내게 온 불행이 정녕 불행인가.  이 일로 잃은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칠삭둥이로 태어나 건강한 몸을 잃었고 내내 따돌림을 당해서 학창 시절 친구들을 사귀지 못했다. 날벼락같은 해고 통보를 받았을 때, 그리고 보이스피싱을 당했을 때 금전적 피해는 물론 그로 인한 상심의 정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 고통에서 파생된 불행한 감정들을 서술한다면 아마도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것이다.



  불행하다는 관점으로만 본다면 그렇다. 여기에 불행이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이미 일어난 불행을 되새김질하기를 멈추고 관점을 바꿀 때. 눈 안에 비친 세상은 과거에 보던 것과 완전히 달라진다.



  강도 높은 불행의 지진이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갔을 때. 그것이 훑고 지나간 자리는 폐허가 아니었다. 텅 비었다고 생각했던 자리에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 있었다. 어른 손바닥 만한 체구의 나를 살리겠다고 자기 목숨을 건 엄마를 비롯해,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사랑의 현존이나 다름없었다.



  어릴 때는 걸림돌 같았던 핸디캡이 더는 문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변한 것이라고는 이전과 다르게 보겠다는 결심뿐이었다. 빗금투성이었던 나를 오답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세상이 정해놓은 답에 맞지 않아서 틀린 문제 취급을 당했을 때는 평생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의 그림자가 뒤꽁무니를 쫓는 듯했는데, 그늘진 마음을 벗고 다시 보기로 결정하고 나니 이 세상은 온통 빛뿐이었다.



  눈 안에 비친 세상이 이토록 눈이 부셨던가. 눈을 감았다 뜬 것처럼 훤히 빛나는 빛 안에 있으니 기를 쓰고 감추려 했던 장애도, 긴 긴 울음으로만 토해내던 불행도 모두 환한 빛 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찰나의 생각. 그 지각 하나가 지나온 과거를 몽땅 새롭게 풀이했다. 연신  턱 막힌 숨이 트이게 해 줄 것을 찾아 헤맸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숨은, 바로 내 안에 있었다.



  이제껏 세상이 정한 답을 나에게 주입한다고 볼 멘 소리를 했는데, 정작 그 답이 맞다고 힘을 주고 있던 것은 나 자신이었다. 세상이 말하는 답이 참이고 그에 맞지 않는 나는 오답이라는, 그 생각에 힘을 주고 놓지 못한 것은 바로 나였다. 오래도록 미뤄온 생애 첫 오답노트를 풀이하면서 알았다.



  나는 틀린 문제도, 미운 오리새끼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이 나를 속이는 줄도 모르고, 던져주는 답을 주입하듯 달달 외우며 살았던 것일 뿐. 결국 나의 생각이 내가 보는 세상을 결정한다. 만일 누군가 나와 같은 생각으로 불행의 길을 지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다시 선택하라.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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