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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Dec 29. 2023

말랑말랑한 것의 힘

비 갠 뒤에는 무지개가 뜬다



가슴 뚜껑 열어보면
끓지 않는 냄비는 없다



  누구나 습관처럼 망각을 하고 산다. 슬프고 우울했던 시간부터 잊는다면 적당히 기억하고 살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살겠지만, 얄궂게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은 늘 행복했던 순간이다. 여한이 없는 듯 행복감에 젖었다가도 금세 잊고 현실로 돌아오고 만다. 기뻐서 들뜬 마음은 무중력 상태에 가깝지만, 현실은 중력의 힘을 거스를 수 없는 '실재의 공간'이기 때문일까. 얄궂게도 행복감은 불쑥 찾아와서 잠시 머물다가 이내 불쑥 사라진다. 행복과 불행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설켜 있어 총량이 아닌, 동전의 양면처럼 알 수 없이 찾아온다지만 행복은 늘 불행보다 빠르게 잊히는 탓에 행복과 불안은 늘 쌍둥이처럼 같이 찾아왔다. 내가 누리는 행복의 총량이 다 하고 나면 어떤 불행을 마주해야 할까. 선물처럼 찾아온 행복을 온전히 만끽하기도 전에 닥쳐올 불행에 대비할 자세를 생각하기 바빴다.



그렇게 언제 또 올지 모를 행복의 순간을 습관처럼 잊었다. 올 지도 안 올 지도 모르는 불행을 앞서 두려워하느라 허송세월을 보냈다. 지난 시간을 허송세월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틈틈이 불행에 대비하는 자세를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은 뒤통수치듯 갑작스럽게 찾아와 대처가 불가능한 별일이기 때문이었다. 행복과 불행 중 그 어떤 감정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엉거주춤한 자세로 하루를 버텨내듯이 살아야 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벌을 서는 것 같은 시간을 끝내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등산이었다.



  이십 대 초반 무렵, 병원에서 근육이 점점 굳어 걷지 못하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 계획에도 없던 휴학을 했고 잠시 서 있는 것마저도 어려워 하루 중 반나절은 누워 지냈다. 칠삭둥이로 태어나 살 가망이 없다 했지만 살았고, 뇌성마비를 앓아 못 걷는다 했지만 여섯 살이 되던 해 기어코 걸어서 퇴원해 '기적'이라 불리던 아이였는데 고작 이십 대 초반에 내리막이라니. 목숨에 대한 시한부 선고는 드라마에서 많이 봤지만 몸에 대한 선고는 처음이었다. 범상치 않은 탄생기를 겪었음에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행은 아무리 연습해도 익숙해질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청춘이었는데 갑자기 브레이크를 잡으라니 관성의 법칙처럼 몸이 마음을 앞질렀다.



  닥치는 대로 뭐라도 해야 살 것 같았다. 어릴 적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기억으로 자칭 '맥주병'이라 부르며 피하던 수영을 시작했다. 뇌성마비가 심했던 사람이 3년을 꼬박 스포츠 댄스를 배우고 난 후, 정상인이나 다를 바 없이 걷는다는 말에 덜컥 두 달치 스포츠 댄스 강습도 끊었다. 물속에 있을 때는 '물에 빠지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으로, 춤을 출 때는 '맥없이 엉덩방아 찧으며 넘어져 상대를 난처하게 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으로 내 몸의 시한부 선고를 잊었다. 그런데 바삐 움직이기를 멈출 때마다 얼굴에 그늘이 들었다. 행복은 습관처럼 망각하면서도 불행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되새김질을 해 잠잠하던 감정이 틈만 나면 널을 뛰었다. 진짜 몸이 안 움직이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그 지옥 같은 시간이 반복될 때마다 꼭 하루씩 다리 근육이 굳는 일처럼 내 꿈도 못 쓰게 되어 딱딱해져 결국에는 그 좋아하는 글쓰기마저 온전히 즐기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에 휩싸였다. 내가 건네는 문장으로 따뜻한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쉽게 읽히는데도 마음에 남아 자꾸 되뇌는 글을 쓰고 싶었다. 삶은 팍팍해도 말랑말랑한 마음만은 꼭 지켜내고 싶었다. 소낙비에 마음이 젖기도 하고 겨우내 쌓인 눈발을 소복소복 밟기도 하면서 날씨처럼 찾아드는 마음의 때마다, 같이 느끼고 기록할 수 있으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랑말랑한 마음'이어야 했다. 살기 위해서, 무슨 수를 쓰든 근육이 굳어 못 쓰게 될 거라는 그 말을 반드시 뒤집어야만 했다. 정신승리로도 부족해 나 자신을 시험해 보고자 엄마와 함께 수락산 정상을 목표로 등산을 떠났다.



  쉬울 거라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세상에는 정말 쉬운 일이 없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을 떨치지 못한 채 오른 길이었으나 막상 가파른 언덕과 돌길을 만나니 '당장 눈앞에 밟고 지나가야 할' 돌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나를 지배한 불행한 감정에 속지 않으려면 멀리 봐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당장 이 험준한 오르막을 무사히 지나기 위해서는 바로 앞의 장애물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집중하지 못하고 갖은 생각이 가지 치듯 이리저리 뻗었을 때마다, 먼저 내디딘 발의 중심축이 흔들려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아무 생각 말고
내가 밟은 돌만 밟고 따라와.



앞서 간 엄마의 발끝만 보며 몸을 바쁘게 움직이자 무겁게 느껴지던 머릿속이 이내 홀가분해졌다. 그렇게 눈앞에 놓인 돌을 하나씩 밟고 오르다 보니 정상이었다. 땅만 보고 걷느라 몰랐을 뿐 어느새 가파른 오르막은 다 지나고 난 뒤였다. 그때 불현듯 어느 드라마에서 봤던 대사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얼른 다 내려놔요.
빈 손일 때만 다시 잡을 수 있는 거예요.  



  그거였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불행을 스스로 되새김질하고 행복감보다 우울과 슬픔에 휩싸일 때, 일단은 그것을 비우고 멈추는 것이 순서였다. 온종일 기분을 가라앉게 만드는 느낌에 속지 말아야 한다. 갑작스레 찾아온 별일에 뒤통수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는 '우리는 너무도 젊어, 모든 게 다 별일이다. 젠장'이라고 시원하게 욕지거리 한 번 날리고 머릿속을 비워야 무엇으로든 다시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 깨달음 덕분에 그때의 나는 바쁘게 지내던 일상 속 모든 역할을 멈추고 오로지 재활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한 학기가 지날 무렵, 몸 건강히 걸어 다시 학교를 복학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사연으로 자기 보금자리를 가득 채우고 산다.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 미련, 애틋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간혹 있는 줄도 몰랐던 것들이 자리 차지를 하거나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두어 오히려 동선을 어지럽히는 경우를 보고는 한다. 이때 정리 전문가들은 먼저 비워야 한다고 말한다. 불필요하게 자리 차지하거나 어지럽혀진 것들부터 비워야 정리할 수 있다고.   



  나 역시 행복의 순간을 습관처럼 망각한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불행을 되새김질하며 내게 온 행복을 만끽하기도 전에 '만약'이라는 말로 갖은 불행을 상상할 때도 있다. '나'만 불행한 것 같고 왜 '나'만 이렇게 어려운 것 같은지. 이 모든 불행의 초점이 '나'에게만 있다고 오해할 때 그 감정에 매몰되기 쉬운 듯하다. 정말 세상이 '나만 갖고 그러는 걸까?' 겉으로는 불행의 그늘 하나 없이 행복만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온 것만 같은 사람도 들여다보면 각자의 비극이 있고,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한 속내를 열어 보면 부글부글 끓지 않는 냄비는 없다고들 말한다. 결국 모두 가슴속으로 앓는 열병 하나쯤은 있다는 말일 테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열이 있으면 식기도 한다는 것이고 불행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 끝은 사람마다 달라서 차별과 차등처럼 비칠 뿐 결국 모두가 별스러운 세상 속에 몸 담고 살아간다. 나 조차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넘어지는 마음이지만 누군가의 불행이 그 혼자만 지나는 터널이 아니라는 것으로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의 기록이다. 홀로 힘들고 아프다고 생각하며 그 감정에 속을 때마다 퍽퍽해지는 것은 마음이요, 삶의 자세로까지도 이어질 수 있으니. 혹여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행복의 순간을 좀 먹고 습관처럼 잊게 만드는 감정에 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시끄러운 속을 비워야 한다. 마음의 방은 크기가 한정적이라서 제때 비우거나 치우지 않으면 '자리 차지'를 해 정작 행복의 기운이 왔을 때, 그 감정이 앉을자리를 뺏고 만다. 겨우 찾아온 행복이 마음의 방에 오래 앉지 못하고 손님처럼 들렀다가 불쑥 사라지고 만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행복에게 물 한 잔 내어주고, 편히 앉을자리도 줄 수 있는 말랑말랑한 마음이어야 불쑥 찾아드는 감정마다 왜곡 없이 건강하게 느끼고 또 보내줄 수 있다.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설킨 행복과 불행을 바로 볼 수 있는 시선이 있어야 행여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     




※ 본 글은 기존에 발행된 바 있는 글을, 연재 브런치북으로 엮기 위하여 퇴고를 거쳐 재발행한 글입니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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