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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하 Apr 26. 2021

I am my own muse.

<누런 벽지> 샬롯 퍼킨스 길먼

[생각의 마침표] 북 에세이02 <누런 벽지>, 샬롯 퍼킨스 길먼


잘 알려진 작가들에게는 그들만큼이나 유명한 뮤즈가 있다. 로댕의 카미유 클로델, 에곤 실레의 발레리, 김환기와 김향안... 예술 창작에는 실제로 뮤즈가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위대한 (남성) 작가와 그에게 영감을 주는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공식은 보통의 여성들에게도 누군가의 뮤즈가 되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는 것 같다. 최소한 나한테는 영향을 미쳤다. 


얼마 전 이청아 배우 인스타그램 프로필의 "I am my own muse"라는 글귀를 보기 전까지 내가 나 스스로의 뮤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거창하게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문화적 성(gender)은 다르고, 페미니즘(여성학)을 얼마나 아는지....그런 게 아니라 삶 속에서 스스로가 나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왜 그렇게 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나 스스로의 뮤즈가 될 수 있을까?


 I AM MY OWN MUSE 


 


그동안 의무감에 페미니즘 책들을 사면서 젠더 감수성이 높아야 바람직하다고 답을 정해놨던 것 같다. 그래서 겉으로 '나는 젠더 감수성이 부족한 편이야'라고 말하며 방어막을 치고 정작 내가 '여자'라는 정체성으로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경험,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솔직하게 바라보지 않았던  것 같다.  


또 한 번 <쪽수> 모임 덕에, 스스로 절대 사 볼일 없을 (페미니즘 문학의 고전이라 불리는) <누런 벽지>를 읽게 되면서 책장에 오랫동안 꽂혀있던 <젠더와 사회>라는 책을 꺼내 보게 되었다. 여전히 자발적 흥미보다는 미션을 클리어하는 마음이지만 나름 의미 있는 시작이었다 생각한다.   


<누런 벽지>의 다양한 표지 이미지

  


1. 글을 쓸 자유


<누런 벽지>에서 주인공은 의사 남편과 친오빠로부터 신경쇠약 진단을 받는다. 그리고 '휴식 치료 - 인산염과 강장제를 먹고 한적한 시골 마을로 여행하며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를 당한다.  


한동안 처방을 무시하고
글을 쓰기도 했는데
들키면 노발대발할 게 뻔해
몰래 쓰다 보니 금방 지쳤다


흥미롭게도 강제 휴식을 당하는 와중에 여자는 몰래 글을 쓰고 있다 고백한다. 가장 쉬운 글쓰기인 일기 쓰기를 통해 나의 감정과 기억을 뱉어내며 느끼는 배설의 희열, 조금 더 진지한 글쓰기라면 논리적으로 생각을 정리한 끝에 느끼는 명료함의 쾌감을 우리는 안다.   


관습적으로 '글 쓰는 여자'는 (지나치게) 주체적인 위험을 내제 한 여성에 대한 수식어로 쓰여왔다. 19세기의 나혜석과 전혜린에 대한 시선이 그러했고, 버지니아 울프도 그런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는 20세기로 이어져 한나 아렌트, 수전 손택, 디디언, 매카시 같은 유명한 여성 학자, 작가, 저널리스트들이 20세기 뉴욕에서 글로 '자기 자리'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담은 <날카롭게 살겠다, 내 글이 곧 내 이름이 될 때까지>라는 책으로 이어진다. 


보통 글쓰기는 내 안으로 파고들어 감정이 깊어지는, 고요해지는 순간에 이뤄진다는 점에서 우리를 온전히 자신만의 시공간에 머무르게 하는 행위인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한 것이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자율성의 상징이라면, 글을 쓰는 행위는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자율성에 대한 비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남편이 아내에게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행위 차원의 박탈이라면 실은 그 바탕에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존재적인 박탈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낀다. 



2. 귀엽지 않을 자유 


<누런 벽지>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이고, 아내는 부유하고 다정한 남자에게 선택받았으니 행복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는 혼란한 상태이다.   


다정한 존!
그이는 나를 깊이 사랑하며
내가 아픈 걸 지독하게 싫어한다.


여기서 앞서 언급한 뮤즈에 대한 생각이 이어진다. <젠더와 사회>에서 문화인류학자 김현미는


"남성의 관심을 끌고,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 곧 여성의 존재 이유라는 것을 어릴 때부터 듣거나 미디어를 통해 학습해 온 여성들은 대상화된 객체로 사는 것에 익숙해진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남성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타자(여성이나 기타 성소수자)에 대한 우월성을 내재화하면서 획득한 정체성임에도 오랫동안 자연의 질서, 신의 창조물, 전통이나 관습, 문화라고 생각해왔기에 젠더를 권력 문제로 연결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66).


귀여운 아가씨
감기 걸려


<누런 벽지>에도 아내를 '귀여움의 대상'으로 보는 남편의 멘트가 자주 나오는데 이는 '대상화된 객체'나 '뮤즈'보다 더한 수직관계가 내포되어 있지 않나 생각된다. 강아지와 고양이까지는 귀여워할 수 있고 말 못 하는 아기도 귀여워할 수 있지만 대등한 관계의 누군가를 마냥 귀여움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내가) '귀여움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다수의 남자들이 귀여워할 수 있는 여자를 바란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애칭일 뿐이지만 baby라 부르고, 오빠라 불리길 원하며, 애교는 자주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귀여운 여자가 되길 주저하지 않는다. 애정에서 비롯된 다정함과, 애교와 매너는 어떻게 구분되어야 하는 걸까? 귀엽지 않아도 되지만 사랑받고 싶다면 이중적인 걸까?


성(gender)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 모든 차별과 폭력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페미니즘을 말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사회적 약자라는 공통점에서 서로를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젠더 감수성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차별의 문제에 잘 공감하지 못했던 이유는 나에게는 그런 차별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수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말이나 역할을 맞춰가면 인정받고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본능적인 대응이었던 셈이다. 






<박래현, 삼중통역자>에 전시 된 작업들 (좌 : 노점/ 우: 남편시중기)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 전시 중인 <탄생 100주년 기념 : 박래현, 삼중 통역자(~2021.05.09)>를 보러 일부러 청주를 다녀왔다. 운보 김기창 선생님의 아내이자 그 자신으로도 20세기의 대표적인 여성 미술가였던 박래현 선생님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였다. 작품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지만 그녀의 삶에서 여자로서의 삶의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전시 소개글

그녀의 회고록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성격 상 아내, 엄마, 작가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사람이어서 다 해내느라 잠잘 시간이 부족했다" 


잡지사에 '남편 시중기'라는 글을 쓰고 가족을 두고 7년간 미국 유학을 다녀왔는데도 '신사임당상'으로 선정되며 시대는 그녀를 '예술하는 현모양처'라는 굴레에 가두려 하는 듯 했지만, 오히려 그녀는 시대와 불화하기보다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과 남편과 '무서운 대결'을 펼치는 기개 있는 작가로서의 삶을 씩씩하게 모두 살아냈다. 

 

19세기 여성의 신체 및 정신 질환을 대하는 사회적 태도를 보여준 페미니즘 문학의 고전(<누런 벽지>)에서 시작한 독서는, 여성에게 요구된 역할을 수용하면서도 여성에 대한 사회적 제약을 극복하고 결국 성공을 이뤄낸 여성의 삶도 가능하겠다는 희망의 마음으로 마무리되었다.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아는 삶은 건강하고 빛난다고 생각한다. 열려있되 삶에 있어서의 나의 기준을 단단히 세우는 사람이자 여자로 살아가고 싶다. 그 안에는 빛나는 사랑도 있을 거라 믿으면서.

   

 


 <reference>


<The Yellow Wallpaper> Charlotte Perkins Gilman(1892)

<젠더와 사회 : 15개의 시선으로 읽는 여성과 남성> (사)한국여성연구소(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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