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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오 Jun 28. 2021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

PATEKO  <널 떠올리는 중이야>

 의사가 내 팔을 보며 표정을 바꾼다. 접대용 미소에서 영혼 없는 슬픔으로. 내 왼팔에는 4개 정도 벌레에게 물린 자국이 나있었다. 손등에는 두 군데 정도 비슷한 자국이 나있으니 얼핏 보기에도 꽤나 처참한 광경이다.

 "많이 아프셨겠어요." 그는 내 팔을 반대로도 뒤집어본다.


 "네, 아무래도 가려운 게 크죠. 원인이…."

 "진드기예요. 최근에 어디 산이라도 다녀오셨어요?"

 "아, 일요일에…."

 "먹는 약 드릴 테니까, 다른 약이랑 같이 드시지 마세요."


 그는 대답을 듣지 않고 준비된 주의사항을 말한다. 내가 일어서자 들리는 벨소리, 다음 손님을 알리는 간호사의 노크. 나는 가려운 왼팔을 문지르며 카운터로 향한다. 문 앞에 있던 간호사보다 좀 더 노련해 보이는 간호사가 처방전을 뽑는다. "약은 일주일 분이고요, 긁으시면 안 돼요."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그녀에게 카드를 건넨다.


  약국마저 들리고서야 도착한 집에서 오늘 듣게 된 주의사항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다른 약이랑 같이 먹지 않고, 환부를 긁으면 안 된다. 여기에 약사가 덧붙인 "식사 후에 드세요."까지 있으니 꽤나 지켜야 할게 많다. 새로 동아리에 가입한 느낌이었다.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된 산악 동아리의 동아리실 안, 이전 동아리가 쓰고 버린 녹슨 캐비닛 상단에 붙은 종이. 갖가지 주의사항이 스프링노트였던 종이 가득 두꺼운 네임펜으로 써져 있다. 모두 그것들을 지켜야 할 이유는 모르지만, 최대한으로 노력하겠지. 아마 그중 몇 가지는 암암리에 지켜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치 내가 방금 두 가지 주의사항을 지키기 위해 공복으로 약을 먹은 것처럼.


  "뭘 먹긴 해야 되나?" 아무도 없는 5평 남짓한 단칸방에 혼잣말이 살포시 얹힌다. 밥을 먹기에 오후 4시는 적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의사항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잠시 뒤적여본 배달 어플에서도 마땅한 메뉴를 고르지 못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침대에서 느릿하게 일어나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며 냉장고로 향했다. 내 키보다 작은 흰색 투 도어 냉장고는 올해 초 집에서 가져온 김치와 이틀 전 남긴 피자가 담긴 상자 그리고 캔맥주가 있었다. 나는 언제 샀는지조차 기억이 흐릿한 맥주를 집었다.


  스텔라 아르투아. 빨간 바탕 위에 써진 영어를 되뇐다. 준비된 주의사항처럼 작년 가을을 되뇐다. 너와 집 앞 마트에서 맥주를 고르던 10월 말, 오후 4시. 네가 파스타를 만들겠다며 고른 소스와 우유,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채소들이 회색 바구니 안을 채우고 있다. 너는 주류 코너 앞에서 언제나 그렇듯 고민에 빠진다.  매번 다른 맥주를 먹는 취미가 있는 너는 항상 똑같은 맥주만 먹는 내게 묻는다.


“그게 그렇게 맛있어?”


 나는 내 것과 똑같은 맥주를 하나 더 넣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맛있어했었나? 아쉽게도 기억은 마트 근처에서 끊겨있다. 다행히 네가 만든 파스타가 우유가 너무 많이 들어가 느끼했던 일 정도는 다른 기억들과 붙어있다. 하지만 항상 그리움이란 이런 틈새에서 발생한다. 네가 맥주를 먹고 지었던 표정이 떠오르지 않는 틈새, 내 팔을 감쌀 때 네 향기가 떠오르지 않는 틈새. 바지 밑단에 묻는 여름 비처럼 자꾸만 묻어있던 네 흔적이 이젠 없다. 손에 들린 스텔라 아르투아가 마지막 흔적일지도 모른다. 나는 세 번 정도 캔 위에 써진 영어를 엄지로 매만지다 뚜껑을 연다. 세 번의 목 넘김에 네가 사라진다.  


 다시 냉장고 문을 닫고, 마트로 향한다. 진라면 한 봉지를 바구니에 넣고, 주류 코너로 간다. 수많은 스텔라 아르투아가 그곳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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