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캔디의 성장에세이] PART 2. 넘어지고 일어서고
강사생활을 하며 제일 기억에 남는 시간들이 있다면, 재수학원에서 꽃이 피기 직전의 친구들을 가르치던 시간이다. 수능 제2외국어 영역에 베트남어가 있었기에 나는 재수학원이나 기숙학원에서 강의를 할 기회가 많았다. 아이들은 자신이 꽃인 줄도 모르고 굉장히 주눅 들어 있었고 나는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듯 해 항상 마음이 쓰였다. 나를 만나는 시간이라도, 활짝 웃으며 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강의를 했다.
화려한 대학출신의 강사님들 사이에서, 나는 조금 별난 스토리를 가진 강사 중 한 명이었다.
26살의 누나(언니)의 입시 성공 스토리를 기대했던 아이들은, 나의 일반적이지 않은 이야기에 참 재밌어했다. 아마 별난 선생님이라 생각했을 거다. 그리고, 난 내 이야기를 통해 나름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기쁨 - 좌절 - 희망으로 끝나는 극의 흐름을 가진 내 수능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고3. 수험생의 신분이 되는 순간, 수능일 직전까지 아니 수능결과가 나올 때까지 숨 막히는 시간을 숨죽이며 보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나는 숨 막히던 1학기가 끝나고, 2학기는 제법 마음을 편하게 가지며 보냈는데 그건 나름 서울의 상위권 대학에 1학기 논술 합격을 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제 최저등급만 맞추면 최종 합격이었기 때문에, 2학기가 시작하고부터는 마음이 붕붕 들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을 배려해야 했기야, ‘최저등급은 껌이지’ 하고 생각하던 티는 절대 내지 않았다.
그러나 건방짐의 아우라는 이를 테면 경쾌한 발걸음이라든지, 구김살 없는 미간이라든지에서...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고 있었을 것이다.
나름의 변명을 해보자면 이제까지 나온 모의고사의 평균을 보아도, 2개 과목에서 2등급이 나오는 일은 사실 그냥 순리대로라면 너무나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베트남어과를 목표로 공부하고 있었고, 수시 1차 합격을 해놓은 곳도 바로 베트남어과였다. ‘가족문제로 힘들었던 지난날을 이렇게 보상해 주시는구나’ 싶었다. 부모님의 이혼을 겪고도, 이렇게 원하는 대학도 철썩 붙는 나란 녀석 참 멋지다! 이렇게 자뻑(?)하며 김칫국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런데 이상하게 수능일이 다가오면서 갑자기 자신이 없어지며 초초해지는 게 아닌가. 수시 합격 후 너무 안일했던 마음이 내 공부의 생명력을 조금씩 앗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나의 시건방짐의 어떤 대가였는지도 모르겠다.
수능 며칠 전부터, 잠자리에 누우면 ‘혹시 최악의 점수가 나와서 떨어지는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능 날에도 이 불안의 메아리는 언어 시간부터 마지막 교시인 제2외국어 시간까지 퍼지며 내 집중력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불안한 마음속 안의 소리부터 개가 짖는 소리, 차가 다니는 소리 같은 바깥의 자잘한 소음들까지, 정말 별소리가 다 내 귀에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더니 머리까지 타고 올라왔다.
시험이 모두 끝나고 나는 정말 패닉 그 자체였다.
시험에서의 이런 느낌은, 내가 모의고사를 수없이 보면서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어떤 것이었다. 불안이 압도하면, 이렇게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것을... 불안의 먹잇감이 되어 매 교시 갈기갈기 찢기고 나서야 알았다. 그날 나는 완전히 잡아먹혔고, 가채점을 하기도 전에 직감적으로 ‘글렀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험이 끝나면 여유롭게 집에 문을 열고 들어와 그동안 내 고3병을 모두 수발해 주셔서(?) 고마웠다고, 그렇게 엄마를 안아주며 말해주고 싶었는데... 나는 돌연 극도로 예민한 시한부 환자가 되어 방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아, 방에 들어가기 전에 전화선을 확 뽑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들의 전화도, 또 만인이 다 아는 ‘고3’ 신분의 딸을 둔 엄마이었기에 그로부터 해방될 엄마를 향한 축하의 전화도, 모두 다 듣기 싫었다. 아니 두려웠다.
결과는 역시나였다. 나는 수시 1차로 7명을 뽑는 논술 전형에 합격하고도, 이렇게 2차에서 최저등급을 맞추지 못해 떨어진 것이다. 차라리, 그냥 떨어졌으면 덜 창피했을 것 같다.
그럼 원하는 대학에 아깝게 떨어졌다든가 하는, 속아줄 수 있는 거짓말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최저등급’을 달성하지 못해서 떨어졌다. 이는 마치, 넌 ‘최저’도 안 되는 애라고 낙인 받는 느낌이었다.
냉정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결과에는 승복해야 했다.
나는 원하던 대학교에 들어갈 뻔하다 바로 입구에서 제지당했고 이제는 발길을 돌려 또 다른 문을 두드려야 할 때였다.
다들 ‘그래도’ 인서울 대학이 좋겠다고 했다.
점수를 맞춰 가능한 인서울의 어떤 대학이든 들어가는 게, 그나마 제일 괜찮은 차선책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또 다른 옆길에서는 재수학원 전단지가 날 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그래도 원하는 대학에 다시 한번 도전하지 그래?’ 하며...
고민에 고민을 한 끝에,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베트남어’라면, 그냥 본질에 집중해 보자. 그렇다면 학교 이름이 무슨 상관인가?
베트남어를 배울 수 있는 곳 어디든 가면 되는 것이 아닌가? 젊은 날의 반항심에, 학교 간판을 따지는 일이 괜히 속물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난 재수도 하지 않기로, 인서울 대학도 쓰지 않기로 했다.
당시에 베트남어과가 있는 학교는 서울과 부산 이렇게 두 군데였다.
서울에 있는 학교로부터 차인 나는, 부산행을 결정했다.
그리고, 부산은 나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것이 아닌가. 서울 남자친구는 나를 매정하게 버렸지만, 부산 남자친구는 1년 전액 장학금으로 우리 부모님까지 챙겨주는 센스가 있었다.
그리고 나름 처음 살아보는 부산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아래에서 보면 끝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 높은 언덕에 있는 학교는 봄이면 그렇게 긴 길을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언덕 위(?) 끝까지 올라가면 바다뷰를 볼 수 있는 운치 있는 학교였다.
느린 말투와 함께 돌려서 말하기가 선수급이었던 충청도 아이는, 부산 특유의 센 억양과 직설적인 화법에 마음이 덜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자들 사이에서는 후배가 선배를 ‘행님~’이라 불렀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무슨 조폭영화의 한 장면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서서히 부산에, 그리고 부산 친구들에게 스며들었다. 부산 친구들은 충청도 말투를 가진 나를 나름 귀여워해주었고, 나도 겉으로는 아주 센 느낌이지만 정 많고 살가운 부산 친구들이 좋았다.
또 학교 아래에 있는 돼지국밥집, 서면 길거리에 파는 가래떡 떡볶이, 쌈장 찍어먹는 순대 등은 지금까지도 나의 최애 음식이기도 하다. 잠시 1년을 살았는데, 얼마나 열심히 먹으러 다녔는지 여전히 내 입맛은 부산스타일이다. 그리고 내 연애사의 2/3는 경상도 남자 아인교?
참, 신문사 활동도 빼먹을 수 없는 추억이다. 나름, 지성의 대학생이고 싶었던 나는 학보사에 들어가 학교 기자로 활동을 했다. 선배들은 참 진보적이고 똑똑하고 바지런했다.
머릿속이 꽃밭(?)이라, 비판할 부분을 잘 보지 못했던 나는 선배님들의 날카로운 시선과 그것을 이성적인 어휘들로 풀어내는 능력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내 크로스 사각 가방에는 꼭 기자 수첩이 넣어져 있었다. 언제라도 취재를 해보겠다는 나의 의지였다.
그런 나를 보며 놀리던 혜리 친구가 생각난다.
“윤선애~ 니 그런 거 할 시간에 눈썹이나 좀 다듬으라. 산적 같다 아이가”
그렇게 깔깔 웃으면서 내 눈썹을 정성스레 다듬어주는 츤데레 같은 이 친구들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인서울에 실패하여 차선책을 오게 된 부산에서의 대학생활은, ‘힘들었던 점’을 말해보라고 하면 생각이 잘 나지 않아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좋았던 점’을 말해보라고 하면 정말 끝도 없이 수다를 떨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겨우 1년 동안, 자그마치 10년간은 곱씹을 수 있을 법한 추억을 만들고 베트남으로 떠났다. (베트남으로 떠나게 된 이야기는 다음 꼭지에서 또 신나게 자판을 두드려 보려 한다.)
아마도, 훗날 내가 베트남에 자신 있게 혼자 가보겠다고,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던 첫 계기는 부산에서 혼자 지낸 1년의 시간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내게 부산은 열려있었고, 부산 친구들은 두 팔로 활짝 열어 마음을 주었다. 그리고 나 역시 몸과 마음을 활짝 열어 모든 걸 받아들였다.
문득 , 만약 내가 실패에 갇혀 있었다면, 그리고 떨어진 학교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런 것들을 경험해 보지도, 아니 똑같은 것을 경험을 해본다 한들 느끼는 것들이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옳은 길’이라는 것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선택이 무엇이든 발을 딛고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면 또 그 길이 나의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도 하고 … 또 때로는 이렇게 인생에서 곱씹으며 웃을 수 있는 추억의 길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걸...
부산행이 내게 알려준 소중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