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편하려고 공부하는 건데 공부 때문에 더 힘들잖아. 사람이 편하려고 공부하는 건데 대학교 가려고 공부하는 걸로 바뀌었어."
잼이의 일갈에 나는 또 감탄했다.
"크으~ 우리 딸 오늘 또 명언 뱉었네. 적어놔야지."
오랜만에 감동받은 잼이의 말을 <잼이 어록>으로 따로 저장하는 메모장에 까먹기 전에 저장하느라 잼이가 자랑스러운 건지 부끄러운 건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입을 쉬고 있는 걸 무심히 넘겼다. 잼이와 둘이 이야기 시작하면 사운드가 비는 일이 거의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금방 사운드는 채워진다. 어려운 수준의 수학을 왜 배워야 하느냐로 주제가 넘어갔기 때문이다.
며칠 뒤 동료들과 요즘 아이들이 힘들게 공부하는 거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잼이가 한 말을 옮겼다. 우리 딸이 이러더라고, 진짜 그러지 않냐고. 사람들 반응이 '오~~"부터 시작됐다. 철학적인데, 딸 생각이 깊은데. 이런 반응을 듣고자 한 의도가 하나도 없었다고는 못하겠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하려던 이야기를 이어서 무얼 위한 공부인가 토로하다가 딸과 했던 대화를 마저 짧게 옮겼다.
수학이 이렇게까지 어려울 일이냐고, x, y 나오는 방정식 같은 거 몰라도 세상 사는 데 상관없지 않냐고 딸이 그랬다고, 그런데 방정식 정도는 아는 게 나은 거 같고 미적분은 좀 그런 거 같다고 그쪽 일 하는 거 아니면 사는 데 전혀 지장 없는 거 같다고 그랬다고 정말 그러지 않냐고, 글로 옮기니까 긴 거 같지만 말로는 정말 짧게, 정말 짧게 옮겼다. 동료들 반응은 내 생각과 달랐다. 내가 말한 내용 자체에는 관심 없고 그런 대화를 딸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리액션했다. 다들 딸과 친구 같이 대화한다고 신기해했다. 옆에서 친한 동료도 이 사람 되게 딸이랑 친하다고 거들었다. 이 대화가 신기까지 한, 모녀의 친구 같은 대화 측에 낀다니 오히려 내가 신기했다. 이런 반응은 의도한 바가 하나도 없었다.
오늘, 언제나처럼 사운드가 비지 않는 잼이와의 저녁 식사 시간에 동료들에게 네가 한 말을 했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너 철학적이라고, 생각이 깊다고 하던데?"
잼이 내 말에 부끄러운 게 틀림없는 표정을 지으며 작게 말했다.
"그거 유튜브에서 본 건데."
"어?"
"유튜브에서 본 거라고."
"그래도 그게 네 생각하고 비슷하니까 받아들이고 기억해서 네 걸로 만든 거잖아."
얼떨떨한 표정으로 수긍하는 잼. 이렇게 엄마의 정신승리로 잼은 철학적인 아이인 걸로 결론 내리고, 잼은 민망했던 순간을 애써 칭찬으로 무마해 준 엄마 말에 기분이 살아나 큰소리로 다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맞받아 열심히 떠든다.
"사람들한테 그렇게까지 어려운 수학을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너랑 한 이야기 했더니 사람들이 너랑 나랑 친구 같다고 신기해하더라. 그게 왜 신기하지?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건데."
부모니까, 저 아이는 내 자식이니까 그렇게 선을 긋고 대화하면 무슨 대화가 되겠냐고 어쩌고 저쩌고 마침표 없이 계속 이야기하는데 가만히 듣던 잼이가 한 마디 한다.
"엄마, 엄마랑 나랑 친해."
"응? 응, 그렇지."
"그냥이 아니라 많이, 많이 친해. 내 친구들은 안 그래."
"응. 좀 그렇긴 하지."
"거의 친구 수준이야. 좀 신기한 일이긴 해."
"아, 그래?"
잼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걸로. 딸이 이야기하니 바로 수긍해 버린다. 오늘의 결론. 잼이는 철학적이고 잼이와 나는 신기한 수준으로 친하다. 어느 하나 부정적인 내용이 없다. 그러니 그런 걸로.
잼 : 오늘도 일찍 잔다고 말하곤 이제야 누운, 철학적인 초등 고학년.
엄마 : 잼과 띠동갑.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띠동갑에서 한 바퀴 더 구른 나이에 잼을 낳았지만 잼과의 수준 차이는 한 바퀴를 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