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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경 Apr 21. 2024

빌런이면 빌런이지 아줌마 빌런은 또 뭐야



  "엄마 아줌마 빌런 같아."



  잘못 빨았는지 엉덩이 반쯤은 내려오던 기장이 슬금슬금 허리께로 올라간 맨투맨 티셔츠를 입은 내 모습을 보고 잼이 말했다. 빌런. 이상해 보인다는 소리를 참 신박하게도 한다. 아무리 내가 히어로 보다 빌런을 좋아한다고 해도 막상 빌런 같단 소리를 들으니 그다지 기분이 좋진 않다. 그것도 '아줌마' 빌런이라니. 빌런이면 빌런이지 아줌마 빌런은 또 뭐야.



  "뭔 소리야, 아줌마 빌런은 또." 

  "영화 같은 보면 아줌마 빌런들 나오잖아. 그런 사람 같아, 지금. 머리도 젖고 삐죽삐죽하고 옷도 그렇고 암튼 그래."



  그래, 지금 내 몰골의 이상함이 꼭 몽땅해진 티셔츠 때문만은 아니란 건 알겠다. 머리 감고 나와서 안 말리고 돌아다니고 있어서 그런 건 알겠어, 그런데 아무래도 난 너의 그 신박한 디스 표현에 어찌 반응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이럴 땐 지원군이 필요하다. 도움, 도움. 자기 방 동굴 속에 박혀 있는 남편에게 달려가 잼의 디스 공격을 일러바쳤다. 여보, 나보고 아줌마 빌런 같대. 보던 컴퓨터 속 영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남편이 한 마디 뱉어냈다. "풋." 아이씨... 



  아빠한테 무슨 소리하나 궁금해서 쫓아온 잼을 보고 남편이 그런다. 

  "배꼽티 입었네." 

  자신이 어떤 도발을 한 건지 남편은 알지 못한다. 

  "아니야, 크롭티야." "응, 그러니까 배꼽티." "응, 아니라고, 크롭티라고. 배꼽티는 배꼽이 그냥 보이는 거고 이건 팔 들 때만 보이는 거라고, 그러니까 배꼽티 아니라고." "아니, 우리 땐 그런 고 보고 배꼽티라고 했다고." "근데 배꼽티 아니라고, 크롭티라고."



  갑자기 배꼽티와 크롭티 언쟁에 아줌마 빌런은 슬그머니 빠져도 될 거 같다. 아줌마 빌런에서 그냥 아줌마로 변신해야지. 빠르게 머리도 말리고 티셔츠도 갈아입고 왔는데도 둘이 옥신각신이다. 



  "뭐야, 아직도 배꼽티 크롭티 이야기야?" 

  "아니, 네가 어떤 영화에 나온 아줌마 빌런이랑 비슷한지 이야기 중이었어." 

  "뭐?" 

  "엄마, 내가 분명히 엄마랑 비슷한 아줌마 빌런을 봤는데 그게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나, 그래서 아빠가 찾아봐주고 있었어." 



  그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인가. 난 이제 아줌마 빌런 아니고 그냥 아줌마 됐는데? 둘이 그러거나 말거나 난 나가야겠다. 



  "둘이 잘 놀아. 난 나간다. 저녁 잘 먹고." "응, 잘 다녀와." "사랑해, 엄마, 잘 갔다 와."



  나를 배웅하는 목소리들 중에 누가 들어도 빌런 같아 보이는 나이가 든 여성배우의 목소리가 섞여있다. 둘은 여전히 나와 비슷한 아줌마 빌런을 찾고 있다. 하지만 아줌마 빌런이 아닌 그냥 아줌마가 된 나는 나간다. 



  동네를 벗어나 약속이 있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동네에 들어섰다. 아, 진짜 나 아줌마구나. 평소에 또래들과 주로 있다가 이런 곳에 오면 느끼게 된다. 이 거리와 이 식당에서 마주치는 젊은 얼굴들과 내 얼굴의 차이를. 까먹고 있던 내 나이를 자각하게 된다. 



  약속한 식당에 모여 앉은 우리들 말고는 우리 또래 얼굴은 없다. 다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저 젊은 얼굴들과 이곳 사장님에게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 곳에 앉아있는 이방인일까. 소심해졌던 것도 잠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자꾸 목소리가 커진다. 깔깔깔깔. 웃는 것도 왜 이리 큰지. 생각해 보니 내가 젊을 때 아줌마들이 저렇게 크게 방정맞게 웃는 걸 싫어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아까 잼이가 한 말이 떠오른다. 아줌마 빌런. 잼이가 본 영화 속 아줌마 빌런이라는 게 혹시 이런 식의 빌런이었을까.






잼 : 또 일요일 밤에 숙제 초치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했더니 이번 주는 살짝 빨리 숙제 끝낸 초등 고학년.

엄마 : 잼과 띠동갑.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띠동갑에서 한 바퀴 더 구른 나이에 잼을 낳았지만 잼과의 수준 차이는 한 바퀴를 빼야 한다. 



사진: UnsplashBrian McGo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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