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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경 May 05. 2024

젊고 멋진 고모가 될 로망은 깨어지고



  언제 이렇게 컸을까.


  "몰라. 잼이랑 연이랑 둘이 돌아다녀서 몰랐어."

  잼이가 오늘 얼마나 신나 했는지 작은오빠는 모른다고 했다. 자기는 둘째 데리고 천천히 과학관을 돌았고, 잼이는 작은오빠네 첫째 데리고 알아서 돌아다녔다고.


  언제 이렇게 컸을까. 하루도 엄마 떨어져서 잘 줄 모르던 아이가, 그래서 맘 편하게 나가서 술 한 번 못 마시게 하던 아이가 이제는 삼촌네 가면 집에 돌아올 생각을 안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어린이날 겸 어버이날 기념으로 친정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잼은 또 사촌동생인 연이랑 헤어지기 싫어 작은삼촌네에 가겠다고 했다. 하룻밤인데 짐 없이 가겠다는 잼에게 굳이 집에 들러 짐을 싸서 들려 보냈다. 하루를 자고 난 오늘 아침, 잘 잤냐는 안부 전화에 첫마디가 "엄마, 나 하루 더 잘래!"일 줄 알고 있었으니까.



  초등 저학년과 유치원생을 키우는 작은오빠네 부부는 아직 주말이면 이곳저곳을 다닌다. 몇 년 전부터 주말은 친구와 보내는 잼이 뜻에 맞춰 모든 주말 일정을 폐기한 우리 집과는 달랐다. 어린아이들과 집 안에만 있는 고역을 알고, 어린아이들과 함께하는 나들이의 힘듦을 알기에 작은오빠네 부부를 보면 안쓰럽다고 생각했건만 오늘은 잼이가 그 일정을 함께하니 고마우면서도 반성을 하게 된다.



  종종 작은삼촌네에서 이렇게 자고 오는 일이 있는데도 잼이는 삼촌과 숙모를 편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와 똑 닮아 어른을 어려워하는 성향이 있는 잼이를 보면서 내가 어른을 어려워했던 게 성장 환경 때문이 아니라 성향, 기질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내가 말 한마디 붙이기도 어려웠던 고모들과 큰아빠들과 삼촌들이 있(었)다. 대략 열 명이 넘는 그분들은 모두 나에게 먼 사람들이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젊고 멋지고 이야기 통하는 어른은 없었다. 시골분들에 할머니, 할아버지뻘이 대부분이었다. 드라마에서 봐온 젊고 멋지고 용돈도 척척 주고 예쁜 옷도 사주고 이야기도 통하는 그런 고모나 이모나 삼촌이 없던 나는 드라마에서 봐온 젊고 멋지고 용돈도 척척 주고 예쁜 옷도 사주고 이야기도 통하는 그런 고모가 되고 싶은 로망이 생겼다.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에겐 오빠가 둘이나 있었으니 말이다. 그 시대의 큰오빠 결혼 적령기로 상상해 보면 난 이십 대 초중반에 고모가 되고, 이십 대 중후반엔 조카 손을 잡고 놀러 다니고 이야기 나누고 선물도 사주는 그런 고모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변수가 있었으니... 오빠들은 (나 역시 그랬지만) 시대가 시킨다고 결혼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내 첫 조카는 아직 초등 저학년이다. 잼이가 오늘 과학관에서 손을 잡고 같이 다닌 그 사촌동생 말이다. 조카에게 나는 늙은 고모다. 자기 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를 낳았고, 자기 엄마 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고모니 말이다. 젊고 멋지고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거기다 내 인생의 첫 꼬맹이가 조카가 아니고 내 아이다 보니 내 로망과 다르게 조카에 대한 사랑이 퐁퐁 솟아나질 않았다.



  로망은 깨지고 다시 생겨나라고 있는 법. 나의 로망은 다른 쪽으로 촉수를 내밀기 시작했다. 잼이와 연이의 바람직한 관계. 나에게는 없는, 친구 같고 친동생 같은 사촌과의 관계. 혈연이 뭐 대수냐 싶지만 혈연만큼 계속 끊어지지 않고 보는 관계는 드문 건 사실이니. 웬수 같은 가족 보다 친구, 동료가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계속 보는 관계도 소중한 건 맞다. 거기다 한 집에 살지 않으니 지긋지긋해지는 것도 좀 덜하지 않을까.



  저녁 맛있는 거 먹었다고 보내온 인증샷을 보고 영상통화를 했더니 잼은 내 얼굴은 관심 없고 콩이 보여달라고 콩이 부르느라 정신이 없다가 콩이가 사라지자 연이가 준 선물들 자랑을 한참 해댔다. "이것도 연이가 준 건데 이건 짜파게티 지우개고, 이건 신라면 지우개고, 이건..." 뭔 놈의 라면 지우개가 그리도 많은지. "그리고 이것도 연이가 줬는데..." 계속 나오는 작고 귀여운 쓰레기들. 그 양만큼 연이의 언니 사랑이 느껴진다. 진짜 꼬맹이 시절부터 유난히 잼이 언니를 좋아하는 연이다. 잼이는 그런 연이를 귀찮아하면서도 막상 같이 놀면 또 재미있단다. 언제까지 둘이 잘 놀지는 모르겠지만 커서 함께 추억할 일이 생긴다는 건 특별한 일이니까 그 특별함을 쌓아주는 거에 너무 귀찮아하지 말아야겠다 싶다.



  내일은 잼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 작은오빠네는 내일 새언니네 친정식구들과 만나기로 했단다. 오빠는 잼이를 데리고 가도 된다고 했다. "잼이가 잘도 가겠다." 이야기 들은 남편이 웃는다. 오빠네까지 차로 얼마나 걸리더라. 잼이 없는 밤이 깊어간다.






잼 : 사촌동생 방에 누워서 쫑알거리고 있을 초등 고학년.

엄마 : 잼과 띠동갑.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띠동갑에서 한 바퀴 더 구른 나이에 잼을 낳았지만 잼과의 수준 차이는 한 바퀴를 빼야 한다.



사진: UnsplashDaiga Ella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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