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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경 Oct 13. 2019

윽박지르다

동네에 새로운 가게가 생기면 들러줘야 하는 게 인지상정. 입구를 리본으로 치장한 반찬가게에 슬쩍 들어가 본다. 반찬이 뭐가 있나 훑어보고 있는 내 등 뒤로 주인 부부가 투닥거린다. 들어보니 그냥 투닥거림이 아니다. 아저씨가 아주머니에게 윽박지르고 있었다. 뭔 내용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이 가게에 아직 생기지도 않은 정이 뚝 떨어졌다. 새로 오픈했다고 예쁘게 리본 달아놓으면 뭐 하나. 손님들이 있거나 말거나 주인이라는 사람이 자기 동업자인 아내에게 버럭질을 하고 있으니.



    나는 아저씨가 큰소리 내는 것에 민감하다. 길 가다가도, 식당에 있다가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아저씨가 갑자기 버럭 하는 걸 보면-거의 대부분은 자기 아내에게 그런다- 꼭지가 돈다. 뭐, 그럴 수밖에 없나. 사십여 년을 아빠가 엄마에게 그러는 걸 보며 살아왔으니. 아빠도 아니고 오늘 처음 본 사람이지만 아저씨가 이 버럭질로 너를 겁먹게 만들어 닥치게 만들겠다는 의도로 추태를 부리고 있으면 피가 순식간에 머리로 쏠려 내가 당하는 것 마냥 얼굴이 새빨개진다.



    윽박지르기,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심하게 짓눌러 기를 꺾다.”라는 뜻이다. 윽박지른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어디 감히, 네가 나한테, 네 의견 따위 관심 없으니, 조용히, 닥치라는, 말이다.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이지만 이건 자신과 동등하거나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에게 윽박지르는 걸까.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사람, 대등하지 않은 사람, 자신에게 반격하거나 해를 끼칠 수 없는 사람. 자기보다 신체적 조건, 사회적 위치, 연령의 차이 등으로 누를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윗 계급인 남자(혹은 여자)가 아랫 계급인 남자(혹은 여자)에게, 모르는 남자가 모르는 여자(혹은 약해 보이는 남자, 혹은 어린이, 혹은 장애인)에게, 부모가 아이에게 사용한다.


  

    나는 남이 남에게, 남이 나에게 윽박지르는 걸 아주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럼에도 내 성향과 상관없이 당해온 일도 많다. 집에서는 기본이고, 길 가다가, 버스에서, 전철에서 종종 당했다. 좁은 골목에서 마주쳐서 피해 주려고 해도, 임신해서 노약자석에 앉아 있어도, 서로 어깨를 부딪혀도 모르는 아저씨들이 내게 씁, 확, 이런 의성어를 써가며 위협했다. 모르는 아저씨들, 특히 술 취한 아저씨들은 왜 그리 여자들에게 화를 내는 건지, 왜 내가 남자와 함께 있을 때에는 같은 상황이어도 화를 내지 않는 건지. 원시시대에나 통했을 것 같지만 지금도 여전한 신체 능력에 따른 사람들의 대응 반응에 그저, 여자로, 게다가 작은 체구로 태어난 내가 죄인가 조소 어린 중얼거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싫어하는 윽박지르는 것을 나는 하지 않았나. 나의 윽박 지르기 역사를 떠올려 본다. 나는 항상 신체 능력이나 사회적 위치, 연령에서 갑 보다는 을이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누군가와 심한 갈등이 있을 때에 항의를 할지언정 윽박질러 본 적은 없다. 그런데. 그렇게 내내 빈칸이었던 윽박 지르기가 어느 시기부터 채워지고 있다. 간혹 아이에게 윽박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가 심하게 떼를 부리는 날, 쉽게 제압시키기 위해 최후의 방법으로 한 번씩 쓰곤 한 것이다. 그렇다. 이제 내가 갑이 된 것이다.



    윽박지르다는 말의 뜻을 다시 떠올려 본다. 심하게 짓눌러 기를 꺾다. 내 아이를 심하게 짓눌러 기를 꺾고 있었다. 끔찍하다. 물론 내 아이는 조용하면서 강한 편이라 기가 잘 꺾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 내상을 입었을 거다.



    아이에게 윽박지르기를 시전한 날 저녁이면, 자리에 누운 아이 손을 잡고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아까 엄마가 너무 소리를 어쩌고, 감정적으로 그러면 안되는데 어쩌고, 엄마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말도 안 되는 핑계도 살짝 얹어서- 어쩌고, 미안해, 이제 안 그러도록 노력할게-다신 안 한다는 소리도 안 한다. 그러면 아이는 쿨하게 괜찮다고, 자기도 아까 미안했다고, 그러면서 나를 안아준다. 넓은 마음으로 항상 변함없는 사랑을 주는 건 내가 아니라 아이다.





    아이와 반성의 시간을 갖고, 나 혼자 더 반성해 본다. 나는 왜 아이에게 윽박질렀는가. 내가 그럴 수 있는 상대여서. 아이보다 나는 신체 능력, 지위, 연령에서 우위에 있다. 그래서다. 내가 누구에게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가. 아무리 짜증 나는 상황이라도 남편에게, 부모에게, 친구에게, 하물며 모르는 사람에게도, 아무에게도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자기 보다 약한 여자에게만 묻지 마 폭행을 저지르는 찌질한 남자들을 인간 이하로 보았는데 그 자들의 심리와 나의 심리는 일맥상통하는 것 아닌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는 사람에게도 내가 우위에 있다며 이런 행동을 하다니. 나의 얄팍한 마음에 상처 받는다. 엄마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화내는 엄마의 모습도 아이에게 보여주는 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화와 윽박지르는 것은 다르다.





    이제 생각은 그만, 실천할 때다. 아이에게 화가 날 때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참는다. 다른 사람처럼 대하자. 이 아이는 어른 친구이다. 어른 친구, 어른 친구. 그런데 어느 어른 친구가 이렇게 똑같은 말 계속하고, 계속 떼를 쓰지? 화가 올라온다. 그러면 아이에게 이야기한다. 엄마, 네가 이렇게 행동해서 화나려고 해. 화나는 건 표현하되 윽박지르진 말자. 다짐하고 다짐한다. 아이는 나처럼 윽박지르는 걸 너무 당해서 윽박지르는 걸 너무 싫어하면서 윽박지르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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