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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경 Sep 05. 2019

나도 내 잔소리가 지긋지긋하다

나는 혼자 있는 공간과 시간을 사랑한다. 누가 내 공간에 침범하는 것도, 내 인생에 침범하는 것도 싫어한다. 결혼 전 혼자 살 때에는 한 번 놀러 오면 엉덩이가 무거워 일어나지 않는 구 남자친구(현 남편)가 꼴 보기 싫어 집에 좀 가라고 닦달했다. 결혼할 때에는 돈만 있으면 집을 두 개 얻고 싶었다. 어차피 두 개 얻지도 못할 거면서 일주일 중 남편과 함께 보내는 날이 며칠이어야 이상적일지 고민했다.


 

    크는 내내 사사건건 화를 섞은 잔소리 공격을 해대는 아빠에게 질린 건지, 그런 아빠를 피해 항상 내 방으로 피신 와 있던 가족들에게 질린 건지, 그냥 내 기질인 건지, 나는 어릴 때부터 온전한 내 공간, 내 시간이 중요했고, 필요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변비를 핑계로 화장실에 틀어박히곤 했다.



    결혼할 때 집을 두 개 얻고 싶었다는 내 이야기를 듣자 친구가 대뜸 “이 개인주의자!” 한다. 나쁜 뜻으로 쓰이는 ‘이기주의’와 다르게 쓰이기 시작하고부터 종종 듣는 말이다. 이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가 인생의 모토인 남편도 마찬가지여서 연애부터 이십 년 된 관계이지만 여태 큰 문제없이, 서로 그다지 관여하지 않고 살고 있다.



    다른 ‘개인주의자’들은 잘 모르겠으나 우리 집 두 개인주의자들의 특징은 이렇다. 우선 간섭, 혹은 꾸지람을 빙자한 간섭, 혹은 충고를 빙자한 간섭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리고 남의 인생에 간섭, 혹은 꾸지람을 빙자한 간섭, 혹은 충고를 빙자한 간섭을 하는 것도 극도로 싫어한다. 솔직히 남의 인생에 그렇게까지 관심도 없다.





    그런 내가, 매일,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의 반은 잔소리에 쓰고 있다.


    손부터 씻어, 손 씻으라고, 아니 손부터 씻고 그거 만지라고, 어서, 어서. 티브이 뒤로 가서 보고, 뒤로 가라고, 눈 나빠진다니까. 밥 먹자, 밥 먹자고, 밥 먹자고 부르면 와야지, 엄마 먼저 먹어? 몇 번을 불러야 오니. 이제 그만 좀 이야기하고 밥 먹어, 언제까지 씹고 있니, 반찬만 먹고 밥 한 수저도 안 먹었네, 밥 먹은 지 모래시계 열 번이야, 알았어, 노래 틀어줄 테니까 밥 어서 먹어, 아니, 춤은 밥 다 먹고 추고 밥 먹으라니까. 씻자, 씻게 이리 와, 빨리 와서 옷부터 벗어, 이리 오라니까, 네가 목욕하고 싶다면서, 어서 와.



    목욕을 마치고 책을 읽고 불을 끄고도 조잘조잘 대던 아이가 잠든다. 그러면 나는 무기력해진다. 아이란 존재는 엄마 기를 쪽쪽 빨아 쭉쭉 커가는 게 아닐까 농담처럼 하던 말이 진담으로 느껴지는 시간이다. 더 이상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유령처럼 기어 나와 건성으로 책을 읽거나 넷플릭스를 틀거나 맥주를 딴다. 눈이 금방이라도 감길 것 같은데 그냥 자기에는 뭔가 억울하다. 집안일을 마저 더 하려고 했는데 그건 무리다. 나는 왜 이리 기운이 딸리는가. 기본적인 돌봄 노동에 왜 이리 기력이 없어지는가.



    그러다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까먹고 ‘엄마’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걸.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 짓을 역할 놀이 덕분에 하루에 백 번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내 잔소리에 내가 지긋지긋해졌다는 걸.




    나도 지긋지긋한 내 잔소리를 정작 아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이는 내 물음에 골똘히 생각한다.


    음... 엄마가 이야기 안 해주면 나는 유치원에도 시간 맞춰 못 가고, 밥도 못 먹고, 가고 싶은 데도 못 가고, 잠도 못 자. 그래서 내가 혼자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엄마가 말해줘야 해.


    아이가 이렇게 생각할 줄 몰랐다. 난 이거 하고 싶은데 딱딱 맥을 끊어버리는 엄마 잔소리를 그저 싫어할 줄만 알았는데. 아직 아기 티를 벗지 못한 목소리로 자기는 아직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왠지 그런 생각을 한 아이가 안쓰럽고 사랑스러워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아이와 항상 하는 뽀뽀 백 번도. 쪽쪽쪽쪽.





    우리 아이는 나에게 애교를 정말 잘 부린다. 아침에 유치원에 데려다주면 아이는 자기 반을 찾아 계단을 올라가면서 하트를 종류별로 다 날린다. 그러면 원장 선생님은 어쩜 저렇게 엄마한테 애교를 잘 부리냐고, 꼭 올라가면서 엄마한테 사랑해하고 올라간다고, 우리 아이만 저런다고 이야기한다. 하루에도 둘이 백 번은 꼭 끌어안고 이마랑 눈이랑 코랑 입이랑 볼이랑 손이랑 팔이랑 배에 뽀뽀한다. 그러다가도 문득, 아, 이런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하고 가슴이 철렁해진다.



    남편은 아이가 빨리 커서 손이 덜 갔으면 좋겠다고, 더 커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더 늘어나니 그때가 더 기대된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다. 상상해 본다. 혼자 할 수 있는 게 늘어나고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게 늘어나겠지. 아이가 혼자 목욕하고 머리를 말리고. 그러면 혼자 화장실에 있을 때 문을 열지 않기 시작하겠지. 아이가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게 많아지는 만큼 나와 함께 하고 싶은 건 줄어들겠지. 아, 또 금세 혼자 서글퍼진다. 기대되는 만큼 슬퍼지는 마음. 나는 아이의 지금 모습을 보면서 너무 사랑스러워서 간혹, 슬프다.




    하지만 나는 간사한 사람이니까- 힘든 건 힘들다. 그놈의 ‘엄마’ 소리 좀 그만 듣고 싶다.


    엄마 이제 밥한다, 엄마 손 바쁘니까 뭐 해달라고 하지 마. 응, 알았어. 아주 깔끔하게 대답한다. 엄마 티브이 좀 틀어줘. 엄마 티브이가 이상해졌어. 엄마 콩이(우리 집 고양이 2호)가 안 비켜, 저리 좀 가라고 해. 엄마 이것 좀 열어줘. 엄마 가위 어디 있는지 찾아줘. 엄마, 엄마, 엄마.


    밥하기 직전까지 끌어안고 쪽쪽거리고 “세상에서 우리 귀염둥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뉴규?”하면서 난리 치던 사람, 분명히 나 맞는데 그새 엄마 타령에 성질 폭발, “엄마 좀 그만 불러!! 으아아아아악” 변신 직전이다.





    아직 나와 아이는 이런 관계다. 내가 아이를 계속 부르기도 하고, 아이가 나를 계속 부르기도 하는. 잔소리를 하고, 하나하나 해달라고 하고. 그러다가 또 금세 붙어 뽀뽀 백 번 시작이다. 아직 아이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너무나 크다.



    이제 일곱 살, 그래도 자기 세계가 점점 생기는 중이다. 엄마가 모르는 유치원 생활도 있고, 친구들과의 비밀도 있다. 엄마도 좋지만 친구들과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신나기도 하다. 새로운 것을 만나면 엄마 뒤에 숨고 싶으면서도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펄쩍펄쩍 다가간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만 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는 일도 늘어나고, 공부가 뭔지도 모르면서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일곱 살이다.



    그 세계를 들여 보다가 놀라기도 한다. “이거 내 거잖아. 내 건데 왜 엄마(아빠)가 뭐라고 해?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잖아.” 이건 뭐. 움찔움찔 꿈틀꿈틀. 우리 집 개인주의자가 한 명 더 생겨나려나 보다. 아이가 간혹 엄마 아빠와 선을 긋고,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선언하면 나는 남편과 눈빛을 교환한다. ‘누가 범인이야, 누구 닮은 거야?’





    아이의 세계가 커나가는 걸 지켜보는 일. 그게 아마도 부모가 할 일이겠지. 지금도 마음이 복잡할 때가 있는데 아이가 성장할수록 얼마나 더 복잡해질까. 클로이 데이킨의 <널 만나러 왔어>라는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학교 급우에게 신발을 빼앗겨 혼자서 끙끙대던 아이가 드디어 아빠에게 털어놓는다. 아빠는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이와 나누는 대화.



“네가 직접 말해주길 바랐을 뿐이야."
“왜요?”
“네가 준비되어야 우리가 뭔가를 해볼 수 있으니까.”




    아이를 기다려줄 줄 아는 건 부모의 큰 능력일 거다. 아이의 세계가 나를 넘어서는 동안,  나와 한 몸인 줄 알았던 아이가 떨어져 나간다고 징징대지만 말고 나의 능력을, 나의 세계를 키워야겠다. 더 이상 뽀뽀 백 번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 사랑한다는 걸 믿으면서.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지금 하면서. 아이가 커나갈수록 내 잔소리도 줄어들 거라고 나 스스로를 믿으면서. 내 잔소리에서 나도 아이도 해방될 날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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