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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경 Jun 06. 2019

브이와 전과 나

미드를 공중파 티브이에서 성우 목소리로 보던 시절, 나는 드라마 브이에 빠져 있었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해서 대항하는 뭐, 그런 이야기였는데 지구인과 똑같은 외모이지만 피부를 벗기면 안에 파충류 얼굴이 나오는, 매회 흥미진진한 드라마였다. 특히 외계인 사령관이었던 다이애나가 케이지 안에 있던 흰 쥐를 통째로 먹던 모습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어린 시절에 봤는데도 기억이 선명하다. 징그러운 걸 싫어하는 엄마를 빼고 주말이 되면 브이가 방영하는 시간에 맞춰 안방 티브이 앞에 아빠와 오빠들과 나란히 앉아 흠뻑 빠져 보곤 했다.


      그날도 명절맞이 재방송이었는지 티브이에서 브이가 했었다. 신문에서 잘라놓은 명절 연휴 티브이 편성표에서 브이를 찾아 동그라미를 해놓고 시간을 기억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에 아빠와 오빠들과 함께 안방에 있지 않았다. 명절이니까, 어김없이 언제나처럼, 나는 부엌에서 전을 부치고 있었다. 문이 닫힌 안방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긴박한 목소리와 음악에 귀를 세우면서.




      명절이면 엄마와 나는 꼬박 이틀을 부엌에 묶여 있었다. 명절에 하는 음식들을 주르륵 읊기 시작하면 다들 차례 지내냐고 물어보곤 했지만 아빠는 아홉 형제의 막내였다. 그저 명절의 흥을 느끼고 싶은 아빠의 바람을 위해 이틀에 걸쳐 씻고 자르고 재우고 끓이고 삶고 지지고 볶아댔다.



      나는 ‘취학아동’으로 승급되고 나서부터 부엌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아직 ‘아동’ 일 때에는 전만 담당했다. 꼬치전, 호박전, 표고버섯전, 동태전, 동그랑땡, 깻잎전, 부침개. 보통 명절이면 꼬박 반나절 넘게 양반다리를 하고 허리를 구부리고 전을 부쳤다. 엄마가 준비해놓은 재료에 밀가루를 살짝 묻히고 달걀 옷을 입혀 전기 프라이팬에 올린다. 밀가루, 달걀 옷, 프라이팬, 밀가루, 달걀 옷, 프라이팬, 이 순서로 계속 일하다 보면 양손 열 손가락 끝에 바로 떼어서 수제비를 만들어도 될 것 같은 동글동글 반죽이 매달려졌다. 일하는 중간중간 떼어내고 손을 한 번씩 씻어도 곧바로 생기던 동글동글 반죽이.




      한 번씩 다리가 저려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엄마가 먹으라고 내놓은 요구르트를 마시면서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열 살 정도였던 그때에는 아직 뭘 몰라서였는지 그냥 엄마 도와주는 착한 딸 역할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다. 야무지게 잘한다는 칭찬도 마냥 좋았었다. 와서 전 좀 부치라고 하면 하기 싫다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큰오빠도, 친구랑 논다고 휙 나가 버리는 작은오빠도, 그러면 “에이그, 그래, 너희 있어봤자 잘 못하니까.”하고 마는 엄마 아빠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었다.




      그날도 그냥 그랬을 것이다. 브이가 그 날 티브이에서 하지 않았다면. 항상 아빠와 오빠들과 함께 앉아있던 안방 티브이 앞에 내가 없고, 안방 문은 닫혀 있고, 그 문 밖으로 소리들이 흘러나오지 않았다면. 눈물이 흘렀다. 다행히 엄마는 내 뒤에서 다른 음식을 하시느라 바빠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눈물을 훔치면서도 전이 탈까 계속 뒤집었다. 틈틈이 간 본다고 입에 넣으면서 말이다.









      다이애나의 원맨쇼가 끝났나 보다. 오빠들과 아빠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오빠들이 아무렇지 않게 내 옆에 앉아 소쿠리에 예쁘게 담아놓은 전들을 흐트러뜨리며 마음에 드는 걸 골라 입에 넣는다. 이 전은 어떻네 저 전은 어떻네 품평을 시작한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빠들은 전을 씹어대며 오늘 다이애나와 도노반의 활약에 대해 떠드느라 바쁘다. 전을 뒤집으며 오빠들의 이야기를 듣는데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에 턱 하고 자리 잡고 앉아버렸다. 어디에서 올라온 건지 알 수 없는, 침을 삼켜도 내려가지 않는 그것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오빠들은 다 먹었는지 각자 방으로 사라졌고 나는 계속 전을 부쳤다. 엄마 몰래 큰 한숨으로 마음을 돌리고 전이나 집어 먹었다. 목구멍의 그것이 내려가길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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