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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경 Aug 29. 2019

딸들의, 강요된 비밀

늦은 밤, 허둥지둥 집에서 급히 나와 집 앞 편의점으로 향한다. 편의점에 들어서 주변에 누가 있는지 살피며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고 계산대로 향한다. 하필 계산대에서 다가오는 날 쳐다보며 기다리는 건 남자 직원이다. 장바구니를 계산대에 올리고 시선을 내리고 카드를 내놓는데 내 뒤에 한 젊은 남자가 줄을 선다.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직원은 속이 비치는 하얀 비닐봉지를 꺼낸다. 나는 다시 얼굴이 달아오른다.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편의점을 나와서야 혼자 투덜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아우, 센스 없게! 왜 검은 봉지에 안 넣어주는 거야!” 그러면서 생리대를 누가 볼세라 겨드랑이에 끼고 집으로 달려간다.




    열네 살 겨울, 첫 생리가 시작됐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둘 이미 시작한 친구들에게서 들은 거라곤 그냥 귓속말로 툭 던지는 “나도 시작했어.” 생리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수업시간에 배운 이론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 배가 살살 아팠다. 여태까지의 배탈과는 달랐다. 설사는 설사대로 나오는데 복통은 여전하고 아랫배에 묘하게 기분 나쁜, 처음 겪는 생소한 느낌이 계속 맴돌았다. 그러더니 속옷에 갈색의 끈적한 코 같은 이물질이 묻었다. 뭐지? 하고 말았는데 더 많이 나오자 마음이 심각해졌다. ‘나 무슨 병 걸린 거 아니야?’ 그러다가 코 대신 물처럼 바뀌면서 막연히 ‘이게 생리라는 건가?’ 싶었다. 근데 갈색이라니?




    초등학교 오 학년 때였나. 남자애들이 어디에서 구했는지 생리대를 학교에 가져왔다. 가운데에 빨간 물감으로 칠해 교실 뒤편에 놔두고 시끄럽게 소동을 피웠다. (그런 짓을 한 남자애들을 그저 ‘짓궂은’ 애들이라고 하지 않겠다. 그 소동을 보며 내가 파헤쳐지고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그때 생리대를 처음 봤고, 생리혈은 저런 건가 했다. 남자애들이 칠한 새빨간 물감색. 뭔가 작위적이고 날 서고 차가운 느낌의 빨간색.




    생리인가 뭔가가 시작되고 다음날 학교에 가서 단짝에게 귓속말로 이야기했더니 놀랐다. 그거 생리 맞아. 원래 처음 하루 이틀은 갈색이야. 학교 끝나고 꼭 엄마한테 말해. 나는 열두 살 남자애들이 보여준 대로 생리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게 뭐라고 집에 와서도 한참을 엄마 주변에서 빙빙 돌았다. 그러다 저녁밥 준비하는 시간이 되어서야 요리하는 엄마 뒤 식탁 위에 몰래 “엄마, 저 생리해요.”라고 쓴 쪽지를 써 올려놓고 방으로 도망쳤다.




    엄마가 손에 생리대 한 팩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 엄마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생리대를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보여 주었다. 미국 드라마에서처럼 “여자가 된 걸 축하해~” 이런 건 없었지만 엄마가 진지한 표정으로 여자로서의 노하우를 내게 알려주는 것이 마치 새로운 삶의 비밀을 건네받는 것 같았다. 나는 항상 엄마에게 여자로서 연대의식이 있었는데 그게 더 강해진 기분이었다.






    친구가 슬쩍 와서 귓속말로 물어본다. “너 생리대 있어?” 가방을 뒤져 생리대 하나를 찾아 가방 안에서 소매 안에 생리대를 껴넣는다. 친구와 손을 잡는 척하며 친구 소매 안으로 생리대를 쑥 넣어준다. 언제인가부터 파우치라는 게 생겨서 파우치에 넣어 다니지만 파우치 자체도 남자들이 눈치챌까 스리슬쩍 눈치 보며 건네준다. 생리를 하는 여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거기는 학교일 수도 있고 회사일 수도 있고 식당일 수도 있다. 여자들은 항상 생리대를 바깥에 내놓으면 안 되는 것으로 배웠고, 무슨 밀매 현장인 것처럼 생리대를 거래했다.




    이제 나는 남자들 앞에서 장바구니에 생리대를 잔뜩 얹고 다녀도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는다. 검은 봉지에 주면 오히려 ‘이걸 왜 가리라고 하는 거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리 중일 때 아이가 화장실 문을 열려고 하면 “엄마 뭐 하잖아!” 하면서 소리를 지르며 민감해진다. 아이에게 엄마가 지금 생리 중이라고, 생리라는 건 일정 기간 동안 일정 나이의 여자들은 모두가 하는 거라고 이야기하지 못한다.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직 뭐가 뭔지 모르는 아이가 유치원에 가서 혹시 여기저기 이야기할까 두려워한다.





    얼마 전 생리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았다. 생리는 한 달에 한 번 하루 하는 거 아니냐고, 생리도 오줌처럼 참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터무니없는 글들이었다. 내가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처럼 세상도 생각만큼 변하지 않았다. 아이가 조금 더 크면 감추지 않고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는 엄마가 될 거라고, 아직 오지 않은 시기를 변명으로 삼아 위로한다. 그리고 아이가 더 크면 이런 게 비밀이 되어야 하는, 금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일상의 일이 될 거라 믿어 본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을 빌어 나도 세상도 달라질 거라 위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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