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열하일기가 열하일기인 이유
-군기대신 복차산(1754-1796)
군기대신(軍機大臣)이란 모두 만인(=만주족)이다. 비밀리에 처리할 중대사가 있으면, 황제는 비밀히 군기대신을 부른다. 함께 높은 누각에 올라가면 밑에서 사닥다리를 치워 버린다. 누상에서 방울 소리가 난 연후에야 도로 그 사닥다리를 가져다 놓는다. 비록 며칠이라도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좌우의 누구도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한다.
이 글을 읽자마자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이 떠올랐다. 제목이나 몇 회 같은 디테일은 희미해졌지만, 누군가 영향력이 막대한 사람이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을 데리고 사다리를 걸어 절벽 위의 별장으로 올라가던 장면이 떠오른다. 거기에서 뭔가 결정이 되면 방울 소리로인지 신호를 보낸다. 그러면 사다리가 다시 설치되고 그 사다리로 두 사람이 다시 걸어 내려온다. 나는 와! 하고 탄복했었다. 일본이 만화의 강국인 줄은 알고 있지만 스토리를 구성하는 참신한 시각이 멋지다, 했었다.
열하일기를 읽다 보니 앞의 글이 나왔다. 공중누각 밀실이라, 그거 별것도 아니었네. 수백 년 전에 청나라에서 이미 써먹은 수법이었네. 만화가들이 공부를 참 많이 하는 줄은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학습만화'라는 말이 있겠는가. 그런데 진짜로 이렇게 많이 하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청나라 황제가 쓰던 방법을 어떻게 알아내어 추리 만화에 가져와 써먹다니, 기발하지 않은가. 탄복을 하며 성경의 옛말을 더듬는다. 정말로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다. 어제의 해가 오늘 다시 뜨고 진다. 온고이지신을 해야할 이유다.
오늘날의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쓰기의 기술로 '낯설게 하기'가 있다. 낯설게 하려면, 지리적으로 비교적 가깝지만 바다를 격하고 있는 일본이라든지, 중세와 고대처럼 시대적으로 머나먼 시대라든지를 가져와 쓰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다른 이들의 눈을 끄는 제재로는 열하일기요, 열하일기의 몇몇 일화들을 가져다가 작금의 현실과 빗대어 접점을 그려내는 면에서는, 청나라 황제의 이야기를 가져온 명탐정 코난의 만화가와 비슷할 터이다. 그래도 나의 낯설게 하기가 눈길을 끄는 데에 성공했는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청나라의 군기대신은 늘 황제 앞에 모시고 앉았다가 황제가 명령을 내리면 담당자에게 전달하는 자이다. 황제의 출근시간이 새벽 3~5시이니 역시 만만치 않은 직업이었을 거다. 계급은 낮으나 황제에게 가까운 직책을 맡았으므로 ‘대신(大臣)이라고 불렀다. 만한병용 정책에 의해 처음에는 한족이 맡았으나. 나중에는 거의 만주족이 도맡았다. 황제권 강화에 매우 요긴한 존재이면서도 명나라의 환관이 그랬듯, 청나라의 군기대신 역시 국사에 전횡을 일삼았다고 한다.
옹정 때 군기대신은 망곡립이었는데, 몽고 사람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 일찍이 강희제와 옹정제의 초상을 그렸단다. 군기대신쯤 되려면 그림에도 전문가 수준의 조예를 갖추었어야 하나보다. 문화예술적인 소양을 갖추는 것이 황제의 각별한 총애를 얻어내는 일에는 경쟁력을 갖추도록 해주었을 것이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악이태, 팽공야 모두 문무를 겸한 재사였다. 정치인이라고 정치만 잘하면 안 된다. 정치를 잘 하는 건 기본겂이고 인간적인 매력을 갖추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필수적인 요소다.
조선 사신단의 열하 길에, 군기대신이 직접 나섰다. 그는 연경에서 길이 어긋나자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달려와 밀운점에서 사신단을 따라잡았다. 그렇게까지 하여 전한 말이 '건륭제가 사신을 고대하고 있으니 반드시 초아흐렛날 아침 일찍 열하에 도착하라'는 재촉이다. 더구나 그 말을 두세 번 거듭 부탁한다. 그는 스물 대여섯쯤 되어 보이는데 키는 거의 한 길쯤이고 허리가 날씬하고 눈매가 가늘어 풍치가 있어 보였다. 부친이 23년간 재상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명문 귀족 출신인, 화신과 함께 건륭제의 오른팔과 왼팔 격인 복장안이었다.
조선 사신단이 반선을 만날 때 복장안은 반선의 아래에 서있었다. 황제를 모실 적에는 누런 옷차림, 반선을 모실 적에는 승려의 옷차림으로 황제의 황교를 똑같이 신봉한다. 금수저 아니랄까 봐 정치적 센스도 탁월하다. 심지어 반선의 말을 오중(五重)통역하는 와중에도 역관을 시키지 않고 몸소 참가했다. 반선이 내려준 불상은 수건으로감싸주고 다른 선물은 일일이 펴 보고 황제에게 보고하러 달려간다. 조선 사신이 성승을 만나는 게 그렇게 중대사였나? 이거 봐요. 황제 폐하, ’머나먼 조선에서조차 내 생일을 축하해주러 왔소‘ 라고 반선에게 그렇게까지 내세우고 싶었소?
1780년의 만수절 축하 사행이 의미 깊은 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 발로 와준 조선에 건륭제는 흡족했다. 다만 뽐내고 싶은 나머지, 내키지 않는 성승 알현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그 억지 덕분에 오늘날 우리에게 '열하일기'라는 불후의 명작이 남았다. 천하의 부가 몰려드는 소용돌이인 열하에서 조선사람 연암은, 두번 다시 가질 수 없는 독특한 경험을 했던 것이다. 1780년 황제의 칠순 생신이 연암의 연행록을 열하일기가 되게 했다. 1790년 황제의 팔순 생일은 또 어땠을 것인가, 그 연행록도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