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파스파문자를 아십니까?
-몽골판 세종대왕 파스파(1235~1280년)
몽골의 원나라에는 자국의 문자가 없었어요. 처음에는 위구르 문자, 나중에는 한자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을 정복한 후 대제국을 다스리려면 문자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데 나라를 세우듯 몽골문자를 창제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더욱 대단합니다. 문자는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죠. 뜻글자인 한자도, 소리글자인 알파벳도 오랜 시간 동안 저절로 다듬어져 만들어진 것이지, 누가 마음먹고 뚝딱 만든 것이 아니었든요.
믿을 수 없는 출생 전설을 가지고 태어난 파스파(八思巴, 1235~1280)는 어린 나이에 능가경 1만 권을 외웠다고 합니다.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 칸(忽必烈)(1215~1294)이 황제로 즉위한 이후 파스파의 소문을 듣고 부릅니다. 마침내 문자를 만들라고 명령하지요. 1265년에 파스파는 새로운 문자 곧 파스파문자를 만듭니다. 파스파문자는 자음 30자, 모음 8자, 기호 9개로 되어 있는 소리문자에요. 파스파는 고국인 티베트 문자를 네모나게 하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쓰도록 했습니다.
1269년에 파스파문자는, 몽골어는 물론 중국, 티베트, 산리트, 위구르 등 몽골 치하 지역의 모든 언어를 표기하는 공용문자로 공표됩니다. 쿠빌라이 칸은 문자를 만든 공로를 치하하여 파스파에게 ‘대보법왕’ 칭호를 하사했습니다. 그야말로 몽골판 세종대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가지가 궁금하긴 해요. 누가 몽골판 세종대왕인가요? 제 나라 문자를 가져다가 남의 나라 문자로 만든 파스파인가요 또는 엄청난 투자를 감행하여 자국어 문자 창제를 주도한 쿠빌라이 칸인가요?
쿠빌라이 칸은 아낌없는 지원을 해줬더군요. 라마교를 받아들이고 파스파를 원나라의 국사로 삼고 황제의 스승으로 예우했어요. 파스파가 죽자 황천지하일인지상선문대성지덕진지대원제사(皇天之下一人之上宣文大聖至德眞智大元帝師)라는 어마어마한 호까지 하사합니다. 말로야 돈 안 드니 뭔 말을 못해! 그냥 왕이라고 해줬구만, 했는데 이렇게 알고보니 원 세조가 뻘로 황제가 된 거 아니라는 느낌이 팍팍 옵니다. 파스파에게 티베트의 통치까지 위임해다고 하니 자국민이 아니어도 능력별로 등용했던 글로벌 마인드의 주인공이었네요.
파스파문자는 이후 100여 년 동안 두루 사용됩니다. 하지만 파스파문자의 그 네모네모를 부드러운 붓끝으로 그려내려니 참 표기하기가 불편했겠습니다. 중국인에게는 한자가, 몽골인들에게는 위구르 문자가 있어 파스파문자 없이도 잘만 살았는데 왜 굳이 새 글자를 애써 익히고 사용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파스파문자는 이후 14세기에 원나라가 멸망하며 함께 폐기됩니다. 파스파문자를 사용한 당시의 공문서만 남아 학술자료로 귀중한 자료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글은 놀라운 성과물이지요. 파스파 문자가 힘없이 사라진 반면 한글은 여전히 꿋꿋이 살아남아 세계 속의 문자로 확산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한글은 만든 초기부터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으며 닿소리와 홀소리의 생성 과정을 가지고 임상실험과 요즘 말로 다른 자료들의 연구를 거친 정교한 결과물입니다. 물론 한글이 아무런 영향도 없이 독립적으로 창제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문자를 만들어 냈다면 난들 못하겠느냐, 하는 전례로 동기유발을 했다는 점에서는 기여했을 거에요. 그러나 파스파문자가 한글의 조상이거나 없어서는 안 될 영향력을 끼쳤다고 한다면, 글쎄요. 억지스럽군요.
당시의 연구 자료가 다 파기된 터라 확인할 길도 없습니다. 세종임금이 연구자료들을 없애버렸습니다. 글쓰기를 해보니, 자료를 없애버린 마음이 공감이 됩니다. 글 하나 쓰려면 여기저기서 검색을 하는 나머지 자료가 쌓여요. 나중에는 자료들끼리 엉켜, 어디에서 그걸 봤더라 하고 뒤적거려야 합니다. 언제 또 쓸지 모른다고 놔뒀다가는 쓰레기 동산이 됩니다. 날 잡아서 청소를 해줘야 합니다. 개인의 일만으로도 그러는데 기록의 나라 조선이라고 할 망정 아무도 원하지 않는 문자를 극비로 창제하던 자료를 잘 보관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랑캐의 특징이 자국의 문자를 갖는 것이래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 오랑캐입니다. 세종 임금에 비기다 보니 갑자기 파스파나 쿠빌라이 칸까지 존경스러워지는 아침이네요. 그러게 처음 만들 때 잘 만들지 그랬어. 만드는 것은 그렇다고쳐도 그것을 잘 사용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또 다른 일입니다. 후손인 우리의 몫이지요. 어쨌든 기득권자는 한자만으로도 얼마든지 행세할 수 있겠지만, 우리야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지 않겠습니까? 그런 우리더러 쉽게 익혀 날로 편안하게 쓰라고 만들어줬으니, 마음껏 사용해야겠지요. 줘도 못 먹나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