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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tic Eagle Nov 09. 2024

금사빠의 사랑은 '금방'도 느린 것임을.

사랑은 이미 하기에, 좋아할 일만 남는다는 것을. 

아파트 처음 입주해서

자주 만나는 분들은 

항상 밝고 명랑한 미소로 

마주침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일 여년이 지나면

서로에게 제공하던 무상의 

친절을 거두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 친절의 무중력 상태가

우리가 고수해야 할 

본질인 지도 모르는 방식으로 











어쩌다 

마주쳐서 

밝은 인사를 나누게 될 확률이

이미 생각보다 적었음을 

깨닫는 중이다. 









그러함을 깨닫다 보면,







그리하여 

한창 해맑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음이 

대견하고 







그리하여 사랑에 빠질 수 있었음이

꽤 칭찬할 만한 방식으로 










같은 방식으로 사랑에 빠질 수 없는 

지금에 대한 생각을 한다. 










금사빠가 

혼이 나는 세상에 

사는 1인으로서








이제와서 깨닫는 건.





금사빠에게는 

'금방'도 

느린 개념인지도 

몰랐다. 









이미

사랑에 존재하기에.











어찌 아이의 

그 모든 것을 이해해주겠다는 

웃음과 사랑을 

금사빠로 

정의하여

섭섭하게 할 것인가. 










어쩌면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아이의 시선. 세상을 향한

사랑에의 믿음을 

고수하는 한 사람으로서.







금사빠라서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면






속도를 요구하는 세상이

비겁한 지도 모르는 방식으로 







금방 빠지는 사랑은

의심의 가치만 있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해서 미안하다는 감정이

선점하는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한

생각을 한다. 







사랑하면 바라만 봐야 한다는 

개념에 대한 생각을 하며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싶은 사람도 






어쩌면 개인적 욕심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할 때






내가 좋아하는 그대가 

나를 좋아할 확률이 

존재나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는 방식으로 










금사빠라서 

부끄럽지는 않지만







이 금사빠라는 개념이

얼마나 

누군가를 부담스럽게 할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시작한다. 













골드코스트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스무살의 나는

여기가 과연 죽을 가치가 있는

곳임을 기약한다.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음을. 











그 생각 이후에 십여 년이 지나






그 아이는 

2024년의 끝자락에 

서 있다. 








죽으려고 헤엄쳐 간

바다를 등지고 

해안선으로 발버둥치며










그래도 살아있음에 대한

개념을 정립한다. 










그 시점 이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많은 변화는 없었던.








살아있음이 

다시 사랑에 '금방' 빠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그 삶을 제공해 준 

부모님에게 너무 감사한 

시간이다. 








비로소 그대를 만나게 하였으니. 






그러나 



누군가를 만났음이

반드시 사귈 수 있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함께











이해하려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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